2013년 12월호

행복한 지옥에서 지루한 천국으로

  • 허태균│고려대 심리학과 교수

    입력2013-11-19 15:2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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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한 지옥에서 지루한 천국으로

    사람 다니기도 비좁은 시장통을 경적을 울려대며 비집고 드나드는 차량들로 북새통을 이룬 1989년 서울의 어느 날.

    지루한 천국과 행복한 지옥. 20여 년 전 젊은 유학생의 눈에 비친 미국과 한국의 모습이다. 필자가 미국 유학을 떠난 1990년대 초의 대한민국은 지금과 비교하면 부족한 것이 참 많았다. 아파트와 자가용은 국민 대다수에게 그림의 떡이었다. 겨울에는 난방이 제대로 안 됐고 여름에는 에어컨이 드물었다. 기본적인 생계 말고는 지출할 여력이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아 아끼고 절약하는 것이 몸에 배어 있었다. 청바지를 사거나 냉장고를 살 때, 외식을 하거나 심지어 아이스크림 하나를 사 먹을 때도 그것을 할 수 있는 사람과 할 수 없는 사람의 문제가 부각됐다.

    그때 미국은 모든 면에서 풍족한 사회였다. 웬만한 생활필수품과 삶을 편리하게 해주는 물건들은 국민 대부분이 소유하고 있었다. 아무 수입이 없어 미국 사회에서 빈민층에 속했던 유학생마저 기본적인 생활을 하는 데는 불편함이 없었고, 많은 경우에 한국에서의 삶보다 풍족했다. 그런데도 나는 유학 시절에 한국이 그렇게도 그리웠다.

    예측가능성 vs 이중성

    부모님과 친구들이 살고 있고, 한국말로 편하게 소통할 수 있는 조국이 그리웠다. 25년을 한국에서 자라고 교육받은, 뼛속까지 한국 사람인 내게 미국 사회는 너무나 지루했다. 풍부한 물자와 잘 갖춰진 인프라, 사회적 합의와 명시된 규칙에 따라 예측가능하게 돌아가는 미국 사회는 스트레스가 적고 평화롭고 편안했다. 그런 환경을 찾아 한국인을 비롯해 전 세계의 많은 사람이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하지만 이런 마음의 평화와 평온은 곧 나를 지루하게 만들었다.

    미국의 주택가엔 해만 지면 돌아다니는 사람이 드물어 조용하다. 저녁과 주말에는 가족들이 잔디구장이 완비된 공원에서 운동과 피크닉을 즐겼다. 차선을 바꾸려고 방향지시등을 켜면 차 대부분은 길을 내줬고, 널찍한 주차장에서 서로 양보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공공기관, 학교, 식당, 병원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최소한 표면적으로는) 서로 친절하고 배려하며, 그 관계들은 대부분 예측 가능한 범위에서 합리적으로 이뤄졌다. 미국이 대표하는 서구 사회의 키워드는 예측가능성이었고, 일관성과 합리성이 중요한 덕목이자 평가의 기준인 것 같았다. 하지만 이런 예측가능성이 나를 질리게 만들었다.



    한국에선 낮엔 진지하고 올곧고 점잖던 사람도 밤엔 폭탄주를 강권하고 만취해서 추태를 부리는 이중성을 갖고 있었다. 방향지시등을 켜면 오히려 속도를 높여 달려오는 차와 치열하게 경쟁하며 끼어들어야 했다. 주차장에서는 안내원의 지시를 무시했다. 공공기관, 병원, 학교, 일상에서 순서와 원칙보다는 각종 연결고리와 변칙이 통했다. 같은 사람이 가정에서는 아버지로, 집 밖에선 친구로, 직장에선 상사와 직원으로 보여주는 모습이 너무나 달라도 당연하게 여겨졌다.

    이런 한국 사회에서 예측가능성, 일관성, 합리성은 지루하고 ‘유토리(융통성)’가 없는 고지식함으로 받아들여졌다. 규칙을 준수하고, 교통법규를 따르고, 원리원칙대로 일처리를 하고, 누구에게나 늘 같은 모습으로 대하는 사람을 보면 답답하고 속 터져 했다. 실제로 그런 사람이 사회적으로 그리 성공하지도 못하고 대인관계도 원만하지 않은 사회였다.

    이런 한국 사회가 나는 너무 그리웠다. 삶 자체의 질은 낮고, 어렵고, 힘들고, 고될지언정 그 삶은 역동적이고 재미있고, 말 그대로 ‘사람 사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래서 토종 한국인인 내게 미국은 지루한 천국, 한국은 행복한 지옥이었다.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

    그랬던 한국이 지금 표면적으로는 행복한 지옥에서 지루한 천국으로 변화를 추구하고 있다. 이제 한국인들은 예측 가능한 사회, 즉 법리와 규범, 원칙이 지배하는 합리적인 사회를 원한다. 우리 사회의 옛 모습을 비합리성, 부패, 혼란, 무질서로 인식하며 좀 더 합리적이고 원칙대로 운영되는 사회를 이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 이상적인 사회는 어떻게 이뤄질까. 답은 하나다. 사회 구성원, 즉 우리들 하나하나가 모두 원칙과 규범을 따르면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합리적이고 일관되게 예측 가능한 행동을 하면 그런 사회가 이뤄진다.

    그럼에도 구성원 대부분은 사회적 문제를 얘기할 때 자신은 예외로 간주하고, 제3자의 관점에서 매우 점잖고 중립적인 논평을 내놓는다. 우리 사회에선 ‘문제가 많다’ ‘원칙이 없다’ ‘편법이 난무한다’ ‘부패했다’는 식의 평가를 서슴지 않는다. 때로는 한국인에 대해 ‘질서 의식이 없다’ ‘학연·지연에 연연한다’ ‘이중적이다’며 자학적으로 단죄한다.

    그런데 우리 사회 구성원 대부분이 실제로 그런 인식을 갖고 있고 그런 행동을 하지 않는데, 동시에 우리 사회가 그런 현실을 보일 수 있을까. 모든 사람이 질서를 지키는 무질서한 사회가 가능할까. 모든 사람이 원칙과 규범을 따르는 예측 불가능한 사회가 존재할까. 모든 사람이 소신을 지키며 사는 일관성 없는 사회가 있을까.

    대개는 자신은 안 그런데, 일부 사회지도층, 일부 나쁜 사람들이 사회를 망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런 현상이 지속적으로 너무 자주 일어나고, 더구나 국민 대부분의 일상에서 경험할 만큼 광범위한 현상으로 나타난다는 것은 일부나 소수의 문제가 아니라는 얘기다. 가정에서는 좋은 남편과 아버지인 사람들 중 적지 않은 이가 집 밖에서는 성매수를 하고, 뇌물을 받고, 탈세를 하고, 비리를 저지른다.

    일부가 아닌 운전자 대부분이 양보를 하지 않고, 가끔 신호를 위반하고, 불법주차를 하고, 그러면서 서로를 욕한다. 정치인, 검찰, 경찰과 같은 권력의 비리를 욕하는 사람들도 자신이 조금이라도 억울한 일을 당했다는 느낌이 들면 자신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가족, 친척, 친구, 심지어 친구의 친구를 찾는다. 이런 모순은 착각이라는 인간의 본성에 비추어 보면 너무나 당연한 것이라 비난할 일만은 아니다.

    일관성의 욕구

    물론 착각을 넘어 누구나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할 명분을 다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자기가 먼저 시작하지 않았고, 단지 손해 볼 수는 없어서, 가족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누가 시킨 것이기에 자신은 그래도 덜한 편이라고 얘기한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이 먼저 바뀌길 기대하며, 자신이 손해를 보지 않는 세상이 오면 그때는 원칙을 지키고 규범을 따르며 자기 소신대로 일관되게 살 거라고 얘기한다.

    개인적인 면에서 보면 그런 측면이 전혀 없다고 하기는 힘들다. 한 개인과 사회의 관계라는 관점에서 사회적 존재인 인간이 사회의 영향을 받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하지만 한 사람이 자신을 제외한 5000만 한국인으로부터 영향을 받을 때, 자신은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주는 그 5000만 명 중 하나다. 사람들은 자신이 얘기하는 그 사회를 자신이 구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종종 잊는다.

    우리 사회가 ‘지옥’이 된 이유를 일부 소수의 사람 탓으로 돌리고 싶다면, 우리 대부분은 스스로가 사회에서 별 영향력이 없는 시시한 존재라는 점도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서 늘 다른 사람들이 영향을 미치는 대로 끌려 다니는 소신 없는 존재임을 인정해야 한다. 과연 우리 사회는 90%의 착한 한국인이 10%의 악마들이 만들어놓은 지옥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걸까. 국민 대부분이 전혀 원하지 않는 지옥 한가운데로 어쩔 수 없이 떠밀려 들어와서 진정으로 천국으로 이사 가길 원할까.

    다른 문화 속에서 그 문화 구성원들의 생각과 행동의 차이를 연구하는 비교문화심리학적 관점에서 보면 문화 간의 차이는 그 구성원들의 차이와 같은 말이다. 즉 문화가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의 전체, 그 자체가 곧 문화인 것이다. 한국과 다른 나라 사람들을 비교한 비교문화심리학적 연구들에서 문화 간 차이가 일관되게 발견되는 심리적 속성 중 하나가 일관성이다. 미국으로 대표되는 서구 사회의 심리적 특징에서 일관성에 대한 강조를 빼놓을 수 없다. 단순히 피상적인 사회적 체계의 일관성이나 행동적인 일관성이 아니다. 그런 일관성을 만들어내는, 일관성을 추구하는 인간의 근본적인 욕구를 얘기한다.

    서구 심리학은 인간에게 일관성의 욕구(need for consistency)가 있다고 전제한다. 사고 체계의 주요 작동 원리 중 하나가 일관성이고, 나아가 사고와 행동 간의 일관성을 추구한다는 관점이다. 이런 관점은 심리학의 한 시대를 지배했다. 인간은 자신이 생각하는 바와 다른 행동을 했을 때 불편한 심리적 각성 상태에 빠진다는 인지부조화 이론(cognitive dissonance theory)의 근간이다. 좋아하는 물건을 사고, 좋아하는 사람에게 잘 대해주고, 좋아하는 후보와 정책에 투표하고, 싫어하는 음식은 피하게 되고, 무슨 이유에서든 그와 반대로 행동하면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불편한 감정을 느껴 일관성을 회복하려고 노력하는 경향성을 갖는다는 논리다.

    그런데 인지부조화 이론이 한국 사회에서는 잘 들어맞지 않는다는 연구 결과가 많다. 한국 사람들은 자신이 믿거나 생각하는 바와 일치하지 않는 행동을 해도 크게 불편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서구 문화와 동양 문화의 차이를 설명할 때 흔히 등장하는 개인주의와 집단주의에 대한 심리학적 논의에서도 일관성이 언급된다. 개인의 고유성과 욕구, 개인적 성취와 자아실현을 추구하는 개인주의는 자신이 믿고 원하는 바를 추구하는, 즉 개인적 차원에서의 일관성을 보장해주는 자유와 권리로 연결된다. 반면에 집단주의는 집단과의 조화, 집단의 목적을 우선시한다. 이런 문화에서는 개인적 일관성을 추구하는 행동은 흔히 이기적이고 사회성이 부족하다는 부정적 평가와 직결된다.

    역동성, 기동성, 유연성

    행복한 지옥에서 지루한 천국으로

    행복의 조건은 뭘까. 하버드대 연구팀이 75년간 추적한 바에 따르면 결국 ‘사랑’이었다.

    4명 이상 시켜야 먹을 수 있는 부대찌개를 팀원 전체가 먹으려고 하는데, 자신은 된장찌개를 원하기에 팀원들이 부대찌개를 못 먹게 되는데도 끝까지 된장찌개를 주장하는 직원을 상상해보라. 그런 상황 자체를 가능케 하는 메뉴 구성도, “하나로 통일하면 빨리 나온다”고 아무렇지 않게 얘기하는 종업원도, 그 상황에서 불편해하는 ‘싸가지 없는’ 직원도, 그 직원을 비난하는 팀원들도 개인적 일관성 따위는 그리 중요시하지 않는 우리의 모습이다. 그 많은 교육을 통해 옳고 그름에 대한 기준, 준법의식, 사회질서, 교통법규, 질서 의식을 가르쳐도 그런 사회가 되지 않는 근본적인 이유는 일관성과 관련돼 있다.

    한국 사회가 행복한 지옥인 것은 그 지옥에서 우리가 가장 행복하기 때문이다. 세계에서 가장 뜨거운 음식을 호호 불어가며 먹는 우리에게, 뜨거운 욕탕에서 불린 몸을 거칠거칠한 때수건으로 아프도록 문질러야 시원하다고 느끼는 우리에게, 수백 가지의 폭탄주 제조법을 자랑하고 그 자격증까지 발부하는 우리에게 이 모두는 행복을 느끼는 순간이다. 과연 우리 사회의 어떤 부분은 우리가 원해서 만든 것이고, 어떤 부분은 원치 않았는데 누군가 만들어놓아서 우리가 억지로 빠져있는 걸까. 그런 것은 없다. 우리 사회의 모든 것은 우리가 만든 것을 넘어 그냥 우리 자신이다. 그래서 나는 유학을 끝내고 한국에 돌아왔을 때 정말 행복했다. 공항에서 나오자마자 버스가 뿜는 배기가스를 맡는 순간, 나는 흐뭇한 미소와 함께 중얼거렸다. “바로 이거야…”라고.

    행복한 지옥에서 지루한 천국으로의 이동은 현재 우리 사회 갈등의 근원에 자리한다. 지난 10여 년 동안 정치적, 사회적 갈등의 중심에는 혁신과 원칙, 부패와 청렴, 성장과 분배의 논의가 있었다. 최근 우리 사회는 과거 비약적인 경제 발전을 이루는 데 기여했던 수많은 것을 거부하며 비난하기 시작했다. 원하든 원치 않든 그런 논란의 중심에는 사회적 역동성이 있다.

    우리가 전 세계에 유례가 없을 정도의 발전을 이룬 배경에는 행복한 지옥을 만들어낸 무원칙, 무질서, 예측 불가능과 같은 부정적 측면의 다른 얼굴인 역동성, 기동성, 유연성이 있었다. 환경, 사회적 정의, 절차적 공정성, 인권과 같은 가치를 무시하고 정부 주도의 선택과 집중을 통해 경제 발전과 사회적 인프라를 구성했다. 기업들은 우리 정부뿐 아니라 전 세계의 정부와 기업에 뇌물을 건넸고, 한 기업의 이익을 다른 기업의 성장에 이용하는 배임과 횡령을 저지르며 세계적인 기업을 일궜다.

    개인적인 차원에서도 그 어떤 가치보다 가족의 생존과 성공이 중요했다. 자녀의 성공을 위해 목숨까지 바칠 각오가 돼 있는 부모에게 도덕적 원칙이나 사회적 규범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자녀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한 명을 위해 가족 모두가 희생하는 선택과 집중, 그리고 그의 성공이 다른 형제자매와 친척들에게 재분배되는 비리와 부패의 순환적 고리가 만연했다. 부모와 형제자매가 보편적 가치, 원칙, 규범을 몰랐던 게 아니라 그것들을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그것들을 초월할 수 있는 심리적 유연성을 가졌기에 가능한 일이다.

    지금은 비록 아무것도 없지만 곧 부자가 될 수 있다는, 성공할 수 있다는 꿈을 꿀 수 있는 것도 사회를 역동적으로 지각했기에 가능했다. 우리와 비슷한 처지의 많은 국가가 이루지 못한 사회적 발전을 이뤄낸 것은 당장은 지옥이지만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내가 잘살 수 있다는 역동성에서 비롯됐고, 다른 사람과의 차이보다는 어제보다는 나아지는 자신의 변화로 보상받았기에 가능했다.

    함께 느려지는 천국

    그런데 이런 사회적 역동성은 지킬 것이 많으면 당연히 떨어질 수밖에 없다. 가족의 사랑과 가치를 지켜야 하는 아버지에게 날마다 야근과 회식, 회사를 위한 헌신을 강조할 수는 없다. 환경을 보전하고 문화재를 지키고 삶의 터전과 같은 가치를 하나하나 중시하며 진행하는 도시개발과 인프라 사업은 느릴 수밖에 없다. 모든 규제와 법규를 준수하며 도덕적 가치와 윤리적 원칙을 스스로 지키는 기업의 경쟁력은 그렇지 않은 다른 국가의 기업보다 낮을 수밖에 없다. 이런 모든 요인은 우리 사회를 어쩔 수 없이 저성장으로 이끈다.

    사실 지금 선진국 대부분은 이미 저성장 국가들이다. 과거의 우리처럼, 경제 발전이 막 시작된 후진국이나 개발도상국들은 성장 속도가 어마어마하다. 그래서 저성장에 빠진 선진국들이 삶의 수준을 유지하는 방법은 고성장 국가들의 역동성을 이용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또 변칙과 역동성, 착취가 생겨난다.

    일반적으로 사회 발전은 개인적으로도 역동성의 감소로 이어진다. 고시를 패스하거나 의사와 같은 전문직에 종사하는 사회 엘리트들이 누리던 인생 역전 드라마는 더 이상 없다. 인생 역전의 많은 부분이 현재의 기준에서 적절하지 않은 방법으로 얻어진 기득권이 됐고, 그런 기득권을 없애는 원칙과 규범의 적용은 사회적 계층 이동을 가능케 하는 사다리를 없애는 결과로 나타났다.

    고성장 사회에서는 아파트를 사거나, 주식투자를 하거나, 사업을 하거나, 심지어 등록금을 대줄 똑똑한 자식이 없어서 그냥 땅을 가지고 있었던 농부들이 벼락부자가 되는 역동성이 있었다. 하지만 더 많은 원칙과 규범이 지켜져야 하고 일관성과 합리성이 강조되는 사회에서는 인생의 변화도 대개 예측가능한 범위에서만 이뤄진다. 과거에는 10년이면 벌었던 돈을 버는 데 이제는 30~40년이 걸리고, 한 세대에 가능했던 변화가 이제는 여러 세대에 걸쳐 천천히 이뤄질 수밖에 없다.

    그럼 느려져서 지루해지면 천국은 가까워질까. 그건 아니다. 느린 사회가 천국이 되려면 그 사회에 사는 사람들도 같이 느려져야 한다. 사회 구성원 대부분이 단기간 내 인생 역전을 꿈꾸지 않으며, 물질적 성공에 매달리지 않고, 성공이나 성장 이외의 개인적 가치를 추구하고, 원칙이나 규범에 의해서 스스로 손해 보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자기만의 천국

    미국의 대학 진학률은 50%가 넘지 않는다. 프랑스의 중산층 기준은 하나 이상의 외국어를 하고, 직접 즐기는 스포츠가 있고, 다룰 줄 아는 악기가 있으며, 근사한 요리 실력, 사회적 정의에 민감하고, 봉사활동을 꾸준히 하는 것이라고 한다. 영국이나 미국의 중산층 기준도 물질적이거나 사회적 성공과 무관한 내용이 대부분이다. 물론 그들 사회에도 한순간에 성공하거나 사다리를 타고 계층을 순간 이동하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그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며, 그만큼 특이하기에 뉴스거리가 된다. 그들의 행복도가 우리보다 훨씬 높고 그들의 사회가 지루하면서도 천국인 것은 아마 우리 사회와 같은 역동성이 필요 없어서일 것이다.

    사람들 대부분에게 우리 사회는 행복한 지옥에서 지루한 천국으로 가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절대 지루하지 않은 천국을 원하기 때문이다. 머지않은 미래에 2000cc 이상의 자동차와 부채 없는 아파트를 소유하고, 월 500만 원 이상의 소득과 1억 원 이상의 현금, 그리고 연 1회 이상의 해외여행을 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한다. 최소한 자신이 못 이루면 자녀는 그 꿈을 이룰 수 있다고, 반드시 이뤄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신이나 자녀가 평생 학자금과 주택, 차량 대출금을 갚고, 대학은 신중하게 고려해서 수지타산이 맞을 만한 자녀만 스스로 알아서 진학하고, 그냥 살던 동네에서 평생 동안 살고, 그러다 세상에 알려지지 않고 조용히 죽어가게 될 것이라는 상상은 하기도 싫고 받아들일 수도 없다.

    행복한 지옥에서 지루한 천국으로
    허태균

    고려대 심리학과 졸업, 미국 일리노이 주립대 문학석사(일반심리학)·노스웨스턴대 철학박사(사회심리학)

    現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

    저서 : ‘가끔은 제정신’


    그러나 사실은 이것이 우리가 부러워하는 이른바 선진국 국민 대부분이 살고 있는 모습이며, 우리 사회가 향해가는 지루한 천국의 모습이다. 그들이 그런 천국에서 살아가는 지혜는 물질적 성공과 성장 이외의 삶의 이유와 가치를 빨리 찾아내는 것이다. 아직 그러지 못한 한국인들은 우리 사회가 지루한 지옥으로 변해갈까봐 전전긍긍하는 듯하다. 지루한 천국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면, 그 지루함을 견디게 할, 자기를 위한, 자기에 의한, 자기만의 천국을 만들기 시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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