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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의 심리학

노력의 사회에서 포기의 사회로

  • 허태균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

노력의 사회에서 포기의 사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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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부모와 사회가 왜 그렇게 노력에 집착하는지가 명확해진다. 자녀와 국민이 실패를 자기 탓으로 받아들이고, 절대 포기하지 않고,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면서 끊임없이 노력하도록 만들기 위해서다. ‘나는 능력이 안 된다’고 줄기차게 외치는 자녀와 국민에게 ‘아니야, 절대 능력도 운도 아니야. 노력이 부족해서 그런 거야. 그러니 더 열심히 해’라면서.

이렇게 애정 어린 격려처럼 들리는 말이 실제로 많은 자녀와 국민에게 얼마나 현실적인 의미가 있고 도움이 될까. 진실로 애정 어린 격려이기는 할까. 자녀가 실제로 성공할 수 있을지와는 상관없이 부모의 만족을 위해서? 한국 사회가 유지되고 발전하고 성장하려면 국민 개개인의 성공 여부와는 상관없이 죽어라 노력하다가 극히 일부의 성공을 확인시켜주는 임무를 완수할 다수의 실패자가 필요해서?

노력을 사회적 덕목으로 강조해온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공통적이었다. 이런 보편성은 진화론적 관점에서 설명해볼 수 있다. 노력의 부족에서 성공과 실패의 원인을 찾고 부단히 노력하며 뭔가를 해보려고 했던 이들의 생존과 번식 확률이 높았을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자연선택 과정을 오랫동안 반복하면서 모두의 유전자 속에 노력을 중시하는 성향이 생겼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럼에도 이런 논리는 한국 사회의 남다른 집착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 한국 사회는 새마을운동 구호와 같은 사회적 신념을 넘어, 노력이 아닌 다른 요인은 아예 거론하기를 금기시하는 것 같다.

자기고양 vs 자기향상

노력의 사회에서 포기의 사회로

수능 성적표가 배부된 지난 11월 27일 서울 배화여고에서 수험생들이 대학 정시 배치참고표를 들여다보고 있다.

청소년의 90% 이상이 대학을 목표로 똑같은 공부를 하는데, 전교 1등도 꼴등도 성적이 떨어지면 모두 노력이 부족해서지 결코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고 한다. 학생 스스로 능력이 없어서라고 말해도 부모, 교사, 사회는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에 가장 높은 교육열과 가장 긴 노동시간, 선진국에 비해 턱없이 짧은 수면시간…. 이 모든 것은 노력, 또 노력, 끊임없는 노력을 강조하는 우리 사회의 단면이다.



왜 이렇게 됐을까. 우선 농경정착사회, 친족 중심의 집단생활, 유·불교적 가치와 같은 생태학적 특성이 한국인들로 하여금 자신이 속한 집단의 기대에 부응해야 하는 책임과 의무를 강하게 느끼도록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태어나면서부터 평생을 거의 같이 살아가는 주변 사람들은 한국인에게 특별히 중요할 뿐만 아니라, 자신에 대해 속속들이 잘 알고 있어 감추거나 속이기 힘든 대상이다. 이런 한국인들에게 주변의 평가는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라 그들의 긍정적인 평가를 더욱더 추구하게 만들었다.

이에 비해 서양 사회는 사회적 이동성이 상대적으로 높고 개인주의적 가치를 중요시해 주변의 평가보다 자기 스스로의 평가를 더 중요하게 여기게 됐다. 이런 문화적 차이는 다소 착각의 여지가 있더라도 스스로를 긍정적으로 보려는 주관적 자기고양(self-enhancement)을 서양인들에게 선사했다. 그래서 자신을 실제보다 잘난 사람으로 믿는 경향을 갖게 됐다.

반대로 한국인에게는 스스로를 어떻게 보는지보다는 타인에게 어떻게 보이는지가 중요했다. 따라서 객관적이고 긍정적인 평가를 얻기 위해 실질적 발전을 이뤄내는 자기향상(self-improvement)이 더 중요했다. 많은 비교문화 연구에 따르면 서양인들은 자신에 대한 긍정적인 정보를 더 원하고 더 가치 있게 여기며 자신을 정확히 묘사하지만, 한국인을 포함한 동북아시아 사람들은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정보를 더 가치 있게 평가하고 더 중요하게 다룬다. 자기향상에 대한 심리적 성향은 그 무엇보다도 노력을 강조하게 만들었다.

한국 사회는 이런 역사적 배경을 가진 문화심리적 특성에다 마치 불난 데 기름 부은 격인 폭발적 요인이 하나 더 있다. 지난 60년간의 엄청난 경제발전이다. 비약적인 경제발전 과정에서 사회는 물론 한국인 개개인도 엄청난 사회적, 경제적, 개인적 발전과 성공을 이뤄내고 목격했다. 아직도 어려운 사람이 많고 균등하게 성공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대부분의 국민은 60년 전보다 훨씬 잘 먹고 잘산다. 60년 전 세계 최빈국 국민이던 한국인들은 이후 목숨을 걸고 노력했고, 그간의 변화와 발전 과정에서 노력에 대한 엄청난 학습효과를 경험했다. 그 결과 더 잘 살게 된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훨씬 많다. 배경과 능력이 다른데도 국민 대부분이 더 잘살게 된 경험은 그 무엇보다 노력이라는 요인을 부각시켰다.

이런 학습효과에 더해 우리를 헛갈리게 한 것은 인과 혼동의 오류다. 성공한 사람 100명을 붙잡고 물어보면 99명은 엄청난 고생과 노력을 통해 그 자리에 왔다고 얘기할 것이다. 사실이다. 지금 성공한 사람의 대부분, 아니 성공하지 못한 사람 대부분도 몇 십 년 전에는 못사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노력하지 않고 성공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노력이 성공의 필요조건인 건 맞다.

하지만 그렇다고 절대 충분조건이 되진 않는다. 성공한 사람이 노력했던 건 맞지만, 노력한 사람이 모두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노력한 사람 중에 성공하지 못한 사람이 성공한 사람보다 훨씬 많다. 따라서 이런 학습효과와 인과 혼동의 오류에서 비롯된 ‘하면 된다’라든지, ‘열심히 노력하면 꿈을 이룬다’는 주장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진실보다는 거짓이나 사기에 더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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