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5월호

더 나은 세상 위해 불공정 감수할 순 없나

어린이집 CCTV 논란으로 본 정의의 한계

  • 허태균 |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 taekyun.hur@gmail.com

    입력2015-04-24 09:2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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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 나은 세상 위해 불공정 감수할 순 없나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법안심사소위원회가 어린이집에 CCTV 설치를 의무화하는 영유아보육법 개정안 합의에 실패했다. 이 법안이 좌초할 위기에 처하자 전국의 영유아 부모 단체와 다수 국민이 분노한다. 수년 동안 잊을 만하면 반복적으로 일어난 아동학대 사건에 국민은 경악해왔다. 학대 양상은 도덕적 측면에서 이해할 수준을 넘었고, 어린이가 보육원 교사의 폭행으로 사망하는 사건까지 일어나면서 이대로 그냥 둘 수 없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시급한 문제는 아동학대를 막고 보육시설, 유치원에 자녀를 보내는 학부모의 불안감을 없애주는 것이다. 해결 방안으로 나온 게 모든 어린이집에 CCTV를 설치하도록 하는 법안이었다. 학부모가 24시간 감시할 수 있도록 해 학대를 막고 부모의 불안을 줄이자는 논리다. 이와 유사한 법안이 벌써 4번이나 발의된 바 있으나 입법은 번번이 무산됐다. 입법을 무산시킨 표면적 논리는 인권 및 교권 침해 요소가 있으며 실효가 별로 없을 것이라는 점. 일부에선 보육시설 단체의 로비 탓이라고 음모론을 내놓는다. 

    근본적 질문 놓쳤다

    CCTV를 설치한다고 아동학대가 근절되지는 않겠지만 억제 요인이 되기는 할 것이다. 아동학대는 어떠한 명분으로도 합리화할 수 없으며 반드시 막아야 한다는 측면에서 CCTV 설치는 합당하다고 볼 수도 있다. 반면 안 그래도 자기 자식만 중요시하는 젊은 학부모가 늘어가는 시대에 부모가 자녀를 언제나 들여다보게 된다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의 분쟁을 일으킬 소지가 있다. 자식에 관한 일을 객관적으로 공정하게 인식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며, 그런 부모라면 그다지 인간적이거나 부모답지 않다고도 할 수 있다.

    어린이집뿐만 아니라 이런저런 문제가 생기는 영역, 장소마다 감시 장비를 설치해야 한다면 CCTV를 설치하지 않아도 되는 곳이 몇 군데나 남을까. 회사에서도 비리가 벌어진다. 게으름 피우는 직원은 어느 조직에나 있다. 아파트엔 쓰레기를 무단으로 버리거나 질서를 지키지 않는 사람이 있고, 국회의원도 부정부패에 연루되고 야합과 비리를 저지른다. 학교 교실에선 따돌림과 폭력이 만연해 있다. 이런 곳 모두에 CCTV를 설치할 수 있을까. 표현과 의사소통에 한계가 있는 영유아를 대상으로 한 시설이라는 점에서 특수성이 있지만, CCTV가 아동학대의 궁극적 해결 방법이 될 수는 없다.    



    온 사회가 모든 어린이집에 CCTV를 설치할지 말지에 대한 논쟁에 집중하다보니 더 중요한 문제에 대한 논의가 실종됐다. 아동학대를 막으려고만 하는 현재의 양상은 이런 일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고 전제한 것이다. 아동학대가 왜 일어나는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은 찾아볼 수 없었다. 가치의 실종이니 도덕성의 상실이니 하는 허탈한 외침만 나돌 뿐이다.

    다른 곳도 아니고 어린이를 보호하는 시설인 어린이집에서 학대가 일어나는 비극적 현실의 근본 원인은 무엇일까. 이 역설적 문제의 바탕에 공정함, 공평함, 투명함에 대한 한국인의 집착이 있다고 해석해보면 어떨까.   

    ‘정의란 무엇인가’의 이면

    최근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키워드 중 하나가 정의다. 마이클 샌들 하버드대 교수가 쓴 ‘정의란 무엇인가’가 한국에서 100만 부 넘게 팔려 저자마저 깜짝 놀랐다는 농담 아닌 농담이 나돌 정도다. 더 재미난 것은, 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은 사람은 구입한 사람 중 100분의 1도 안 될 것이라는 우스갯소리다. ‘정의란 무엇인가’가 많이 팔려 정의가 한국 사회의 키워드가 된 게 아니라, 한국인의 심리 속에 정의가 중요하게 자리 잡고 있기에 어려운 (결국 안 읽은) 책이 그만큼 팔린 것이다. 한국인이 정의에 목말라 있다는 사실의 방증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한국인은 왜 이렇게 정의에 매달릴까. 심리학이 밝혀낸 바에 따르면 ‘가족 확장성’과 ‘관계주의’를 강조하는 한국 사회의 문화적 특성은 사회적 정의와 충돌할 수 있다. 거시적 차원에서 가족주의나 관계주의는 사회적 태만이나 부정부패를 방지하는 기능도 한다. 회사, 국가와 같은 공적인 조직마저 가족이 확장된 것으로 이해하는 한국인의 특성은, 조직의 업무를 내 가족의 일, 내 자신의 일처럼 여기게 해 헌신적으로 행동하도록 한다. 관계주의적 심리 특성도 체면을 중시하고 다른 사람의 평가를 중히 여기게 해 더 열심히 일하고 양심적으로 행동하도록 우리를 이끌기도 한다.

    한국인의 이 같은 특징은 우리가 세계에서 유례없는 경제 기적을 이뤄내는 데 견인차 구실을 했다. 하지만 이러한 심리적 특성은 일대일 인간관계에서 인정에 끌려 판단하게 하고, 청탁을 거절하기 힘들게 하고, 공정함을 잃게 한다. 다시 말해 부정부패를 일으키는 주범이 되기도 한다. 하나의 문화적 특성이 정반대의 현상을 설명하는 양날의 칼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역사를 살펴보면 정의로움을 향한 한국인의 열망이 더 잘 이해된다. 기본적인 인간성을 유지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던 일제강점기와 전쟁 시기를 경험한 한국인에게 생존 이외의 가치는 사치였다. 생물학적 생존과 욕구 충족, 물질적 풍요와 발전이 국민과 국가의 가장 시급한, 최고의 목표이던 시대에는 오직 효율성과 생산성만이 추구됐다. 절차의 공정함, 사회정의, 투명함과 같은 추상적 가치는 종종 무시됐고, 그 과정에서 많은 국민이 부당한 피해와 상실을 경험했다. 정의로움과 공정함을 지키려 한 이들이 오히려 큰 손해를 보는 억울한 상황도 흔했다.

    공정하면 모든 게 OK?

    이러한 경험 탓에 인간의 일차적 욕구를 거의 충족한 오늘날의 한국인은 우리 사회를 부당한, 정의롭지 못한, 공정하지 않은 것으로 가득 찬 사회로 인식한다. 우리의 부모가 관행적으로 했던 수많은 일이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공정함에 위배되고 정의로움을 위협하는 행위가 돼버린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앞서 설명한 가족 확장성이나 관계주의를 강조하는 한국인의 특성 때문에 오늘날을 사는 우리는 정의롭지 못한 행동에 더욱 격렬한 비난을 쏟아낸다. 부정부패나 불공정한 행동을 단지 규범이나 법규를 위반한 것이 아닌, 가족을 배신하거나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을 개인적으로 배반한 패륜적 행동으로 인식하는 측면이 있다.

    한국인의 이런 특성은 어찌 보면 미래의 우리 사회를 세계에서 유례없는 속도로 정의롭고 공정하게 바꾸는 원동력이 될 수도 있다.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기현상을 만들어내듯.   

    정의와 공정성, 공평함, 투명성을 추구하는 시대적 변화는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히 그래야만 하는 것이다. 다만 반론의 여지가 거의 없고 절대선처럼 보이는 사회적 가치를 아무런 대가 없이 공짜로 얻을 수는 없다.

    흔히 사회적 정의를 절차적 공정성을 통해 찾으려고 노력한다. 너무나도 다양한 요인이 영향을 미치는 복잡한 사회에서 미래를 예측한다거나 절대적 정답 혹은 궁극의 선을 확신하기 힘들 때 절차적 공정성이 해법으로 여겨지곤 한다. 절차적 공정성은 정해진 규칙과 규정대로 예외 없이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원칙을 적용할 때 실현된다고 일반적으로 인식된다. 그래서 어떤 사회적 문제가 일어났을 때 우리는 사건이 일어난 과정이 규정대로 진행됐는지, 원칙은 지켜졌는지 우선적으로 확인한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우리를 감동시키는 세상의 이야기는 대부분 절차적 공정성을 뛰어넘어서 (혹은 무시해서) 정해진 규정대로 하지 않은 결과다. 규정에 따르면 무너진 건물 잔해에 깔린 사람을 포기하고 나와야 하는데, 규정을 무시하고 목숨을 걸면서 생명을 구하는 소방관 이야기(영화에서는 대부분 조난자를 구하고 자신도 살아남는다)가 대표적이다.

    점수 매기기 딜레마

    더 나은 세상 위해 불공정 감수할 순 없나

    탈출해야 한다는 규정을 무시하고 사람의 목숨을 구한 소방관 이야기는 우리에게 감동을 준다.

    규정만 정확하게 따르면 기초생활수급자 자격이 없는 곤궁한 노인에게 운영의 묘를 발휘해 지원을 받게 한 공무원의 사례는 어떻게 봐야 할까. 법률상으로는 분명히 위법이지만 억울한 사람이 울분 탓에 저지른 법규 위반을 눈감아주는 경찰의 유연성, 법률로는 유죄 판결을 하기 힘든데도 ‘정말 나쁜 놈’을 준엄하게 꾸짖으며 유죄로 판결하는 판사의 소신은 또 어떤가.

    앞에서 본 소방관, 공무원, 판사의 사례는 절차적 공정성을 무시했기에 가능한 것이다. 더 큰, 또 다른 측면의 정의를 실현하고자, 명문화한 절차나 규칙 대신 사회적으로 공유하는 암묵적 가치를 따른 것이다. 정의로움과 절차적 공정성은 이렇듯 늘 함께하진 않는다. 때로는 충돌할 수도, 때로는 독립적일 수도 있다.

    절차적 공정성과 공평함, 투명함을 중시하다보면 정당화할 수 있고 증명할 수 있는 것만 강조하는 폐해가 생긴다. 그때그때 다르거나 사람에 따라 다르게 적용하는 규정과 규칙은 존재하기 어렵다. 규칙과 원칙은 예측 가능하고 평가 가능하며 객관적으로 구성하게 돼 있다. 또한 직접 관찰할 수 있거나 수치화할 수 있는 것으로 구성되게 마련이다.

    우리 사회가 학벌과 ‘스펙’에 목을 매고, 수학능력시험에 목숨을 걸고, 토플이나 토익 점수에 매달리고, 쓸데없는 수치와 보고서에 매달리는 까닭도 절차적 공정성에 부합하기 위해서다. 오늘날의 한국 사회는 수많은 판단과 의사결정 및 선택의 과정을 세분화해 평가 기준을 만들려고 노력한다. 대학을 평가할 때도, 교수를 평가할 때도 측정 가능한 요인을 선정해 그것을 수치화하고 수치의 조합으로 점수를 매긴다. 정부가 구성한 온갖 위원회도 평가 수치를 만들어내는 일을 한다. 위원들이 주관적으로 평가하더라도 결과는 늘 점수로 제시된다. 공정성을 담보할 숫자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창의성, 잠재력을 강조한다. 기업의 신입사원 공채나 대학 입시, 교수 채용에서도 스펙이나 업적이 아닌 창의성과 잠재력을 최우선하는 게 좋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공정성을 잃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입시나 채용 과정에서 불공정하거나 정당하지 않은 일이 생기면 처벌하겠다는 경고도 잊지 않는다. 그러고는 다시 한번 강조한다. 눈에 보이는 빤한 스펙은 무시하라고. 장난하나….

    주관과 객관 사이

    더 나은 세상 위해 불공정 감수할 순 없나

    지크문트 프로이트는 존재조차 확인할 수 없는 원초아 자아 초자아 등의 개념에 착안해 정신을 분석했다.

    절차적 공정성 혹은 합리성이 가장 중요한 학문 분야가 어찌 보면 심리학이다. 절차적 공정성을 확보하지 않으면 심리학은 그냥 뜬구름 잡는 소리나 사기에 가까운 궤변이 될 수밖에 없다. 왜? 심리학은 직접 확인할 수 없는 무언가에 대한 얘기이기 때문이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대부분의 개념은 심리학자도 직접 본 적이 없는 것이다. 주의, 생각, 느낌, 감정, 성격, 태도 등 심리학이 다루는 개념은 실제로 존재를 확인한 것이 아니다. 다만 그것들이 없다면 우리의 행동을 이해하기 어렵기에 ‘있어야만 하는 것’ ‘그냥 있다고 전제한 것’이다.

    필자 개인의 생각으로는 (훌륭한?) 심리학자가 되기 위한 덕목 중 하나가 상상력이다. 오감으로는 직접 확인이 안 되는, 우리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마음의 과정을 눈에 보이는 듯 상상하고 눈으로 본 듯 타인에게 설명하는 능력이 대단히 중요하다.

    일례로 지크문트 프로이트(1856~1939)가 제시한 마음속의 무의식은 실제로 존재하는지 확인할 길조차 없다. 그럼에도 정신세계를 빙산에 비유하며 의식과 무의식, 원초아와 자아, 초자아 간 갈등을 마치 눈앞에서 일어난 사건처럼 묘사한 프로이트의 상상력이 역사상 최고의 심리학 이론을 탄생시켰다. 프로이트는 뭔가를 실제로 보여준 게 아니라 뛰어난 상상력으로 사람들이 거부할 수 없는 (최소한 그 당시에는) 이야기를 한 것이다.

    프로이트급의 상상력을 갖추지 못했다면 설득력은 과학적 방법론, 다시 말해 절차적 합리성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 현대 심리학은 과학적 방법론을 강조하면서 철학으로부터 분리돼 발전해왔다. 심리학은 타인을 논리적으로 압도하는 합리성을 무기로, 부인하기 힘든 객관적 자료를 보여주는 방법으로 이론을 제시한다.

    그러려면 대부분의 사람이 납득할 객관적이고 표준화한 척도와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 좋다. 또한 이 과정에서 주관성을 철저히 배제하는 것을 추구해왔다.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질문을 하는 식의 표준화한 척도와 절차를 개발하고, 인간이 주관적으로 관여하지 못하는 자동적이거나 암묵적인 반응을 연구하고, 나아가 신경세포 단위의 활동을 조사한다. 이러한 노력은 새로운 지식과 강력한 학문적 설득력을 제공해줬다.

    잠재력을 증명하라니…

    이렇듯 객관성을 강조하는 쪽으로 움직여온 기조는 심리학의 의미와 가치를 모호하게 하는 역설적 위험도 지녔다. 본질적으로 주관적인 인간에게서 주관성을 거세하면 심리학이 연구하는 대상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세계는 있지만, 인간에게 객관적인 세계는 없다. 인간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반응하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심리학에서 애기하는 객관성은 제3자의 눈에 비친 객관성, 다시 말해 대부분의 사람이 인식하는 것을 객관적 사실이라고 규정한 것일 뿐 절대적 객관성은 아니다. 인간은 무의미한 자극에 반응하지 않으며 의미가 있는 자극에만 반응한다. 여기서 의미, 무의미는 주관적으로 해석되는 것이지, 자극이 객관적으로 갖고 있는 게 아니다. 따라서 주관적이지 않은 객관성은 존재할 수 없는데도 심리학은 편의상 객관성이 존재하는 것처럼 간주해온 것이다.

    과학적 합리성이나 절차적 공정성은 이렇듯 본래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주관적 해석에 의해 존재하는 것이다. 성격을 측정하는 척도나 영어 실력을 측정하는 시험도 마찬가지다. 성격검사 결과나 토익 점수는 성격과 영어 실력을 부분적으로 반영하는 것일 뿐이다. 다시 말해 점수가 곧바로 특정한 사람의 성격이나 영어 실력인 것은 아니다. 척도와 시험 문제를 결정한 사람의 주관성과 그것에 답하는 사람이 그 순간 선택한 주관성이 반영된 매우 주관적인 결과다. 어쩔 수 없이 그것이 객관적인 것처럼 서로 약속하고 받아들이는 것뿐이다.

    사정이 이런데도 객관적이라고 받아들여지는 자료의 사회적 영향력은 엄청나다. 절차적 공정성이 확보됐다는 환상을 심어주기 때문이다. 척도나 방법이 실제로 무엇을 측정하는지에 대해 논란의 여지가 많더라도 자료가 제공되는 순간 그것을 무시할 수 없다. 그것을 무시하려면 또 다른, 더욱 강력한 자료가 필요하다. 그래야 사람들이 공정하다고 믿어주기 때문이다.

    잠재력을 중요시한다면서 잠재력을 증명하라고 하는 경우가 많다. 증명이 가능하다면 그게 잠재력이 맞나. 잠재력은 아직까지 드러나지 않은 어떤 능력을 말한다. 드러나지 않은 능력을 증명하라는 게 말이 되나.

    수치화할 수 없는 가치

    아동학대 문제로 되돌아가보자. 왜 아동학대 사건이 잇따라 일어날까. 아니, 왜 최근에 더 빈번해지는 것처럼 느껴질까.

    어린이집 교사가 되는 과정에 답이 있다. 어린이집 교사가 되려면 보육교사자격증을 따야 한다. 필수 교과 및 실습 과정의 학점을 이수하면 보육교사자격증이 나온다. 문제는 이 과정에 아동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확인하는 절차가 없다는 점이다. 보육에 필요한 지식을 배울지는 모르지만 아동을 사랑하는 법을 제대로 익히지는 않는 것 같다. 또한 아동을 사랑하는 자질이나 성향은 배운다고 온전히 익혀지는 것도 아니다. 보육교사로서의 자질을 검증하거나 키우거나 확인하는 절차가 보육교사자격증 취득 과정에 없다는 것은 문제다.

    보육교사만의 문제가 아니다. 초·중·고교 교사는 어떨까. 교사자격증을 획득하고 교사가 되는 과정에 학생을 얼마나 사랑하고, 강의와 상담, 훈육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측정하고 확인하는 절차가 없다. 교사 자격시험에 학생을 사랑하는 정도를 측정하는 항목이 없는 것이다. 교생실습 또한 이수하면 그만이지, 실습 때 학생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교사로서의 마음가짐이 어땠는지를 검증하는 점수나 추천서는 없다. 교생실습 때 학생을 아끼는 마음이 부족하다는 사실이 드러나 교사가 되지 못했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 있는가.

    의사가 되는 과정도 마찬가지다. 고등학교 이과 졸업생 중 상위 1%에 들지 못하면 의대 진학은 꿈도 꾸지 못하는 세상이다. 생명에 대한 존중 정도나 아픈 사람에 대한 측은지심을 의대 입시 기준에 포함했다는 얘기를 듣지 못했다.어려서부터 생명을 소중히 여겼으며 배려의 마음으로 타인을 사랑한 청소년이 의대에 들어갈 확률은 얼마나 될까.

    도서관에서 죽어라 공부만 한 똑똑한 젊은이가 교사가 된다. 옆도 쳐다보지 않고 열심히 공부한 젊은이가 공무원 시험에 붙는다. 확률적으로만 생각한다면 봉사정신이 투철하고 인류를 사랑하고 공적 의식이 강한 사람이 교사나 공무원 시험에 합격할 가능성이 높을까, 아니면 목표 지향적이면서 개인적인 욕망이 강하고 이기적인 사람이 합격할 가능성이 높을까.

    대학교수를 채용할 때도 마찬가지다. 대학은 본질적으로 학생을 가르치는 교육기관인데도 교수를 채용하거나 평가할 때 학생을 가르치는 부분에 대한 고려가 취약하다. 수치로 측정하기 좋은 연구 실적만 강조하는 경향이다. 학생을 얼마나 아끼는지, 가르치는 사람으로서의 자질이 어떤지는 측정하지도 않는다. 사정이 이런데 왜 대학 교육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느냐고 물어보는 것은 개그에 가깝다.

    자격증보다 중요한 것

    그렇다면 아동을 사랑하는 마음, 학생을 아끼는 마음, 가르치는 것을 좋아하는 마음, 환자를 아끼는 마음, 국가와 국민을 섬기는 마음을 어떻게 측정할 수 있을까. 최소한 현재의 방식에 문제가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과거에는 오히려 마음 혹은 자질을 반영하는 선발 과정이 있었다. 학력고사 점수대로라면 이른바 인기 학과를 갈 수 있었는데도 사범대를 선택한 이들에게 교사임용 과정에서 가산점수를 줬다. 그러나 이 가산점수는 ‘불평등’ ‘기득권’이라는 오명을 쓰고 퇴출됐다.

    우리는 초경쟁사회를 살고 있다. 청년실업률은 최고조다. 직업 선택의 자유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다수의 사람이 몇 안 되는 좋은 일자리를 놓고 경쟁한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객관적으로 비교가 가능한 시험 성적이 전가의 보도가 됐다. 주관적 요인은 불공정과 부정이 개입될 여지 탓에 배제된다. 상상력의 가치가 약화한 현대 심리학의 비극처럼 마음, 의도, 사랑처럼 객관적 측정이 어려운 가치가 무시되기 시작한 것이다.

    수치로 측정 가능한 능력이 중요한 부문이라면 객관적 척도만으로 선발해도 문제가 없을 것이다. 인성과 무관하게 똑똑하거나 능력 있는 사람을 원하는 영역은 (완벽하지는 않지만) 객관화한 평가만으로 사람을 선발해도 될 것이다. 하지만 봉사정신, 사랑, 애정, 열정 등과 같은 덕목이 필요한 공공 부문은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더 나은 세상 위해 불공정 감수할 순 없나
    허태균

    1968년 출생

    고려대 심리학과 졸업, 미국 일리노이 주립대 문학석사(일반심리학)·노스웨스턴대 철학박사(사회심리학)

    저서 : ‘가끔은 제정신’


    공공 영역에서 사람을 채용하거나 자격을 심사할 때 공정성을 조금 포기하는 것을 고려해봐야 할 때가 됐다. 어찌 보면 그것이 절차적 공정성을 일부 포기하는 대신 궁극적 정의를 실현하는 것일 수 있다. 그냥 보육자격증을 가진 사람보다, 그냥 의사자격증을 가진 사람보다, 그냥 교사임용고시를 합격한 사람보다, 그냥 공무원시험에 합격한 사람보다, 아이를 사랑하는 어린이집 교사, 환자를 사랑하는 의사, 학생을 사랑하는 교사, 나라와 국민을 사랑하는 공무원이 더 많은 세상을 모색해볼 시점이 아닐까.

    끝으로 노파심에서 한 마디 더 한다. 사랑이나 봉사정신 같은 가치를 ‘객관적으로 측정해 선발하라’는 미친 요구는 없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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