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2월호

용꿈 속에 감춰진 혁명의 칼

  • 박종평 | 이순신 연구가

    입력2015-01-21 13:2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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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꿈 속에 감춰진 혁명의 칼
    많은 사람이 묻는다. 이순신은 왜 혁명을 하지 않았을까. 이순신이 혁명을 했다면 조선은 어떻게 됐을까. 이순신 연구를 업으로 삼은 필자도 답이 궁금하다.

    ‘친필 초서본 난중일기’에 기록된 이순신의 한(恨)과 분노, 피눈물과 통곡(痛哭·慟哭)을 엿본 사람이라면 그가 한때는 혁명을 꿈꾸었음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난중일기’에 기록된 ‘용꿈’은 단적인 예라 할 수 있다.

    ‘난중일기’에는 총 40개의 꿈 얘기가 나온다. 곁에서 이순신을 지켜본 친조카 이분(1566∼1619)이 남긴 최초의 이순신 전기 ‘이충무공행록’에도 꿈에 대한 기록이 5번 나온다. 대부분은 이순신이 직접 꾼 꿈에 대한 기록이다. 이순신의 꿈 중에는 잠재의식 속에서 혁명을 꿈꾼 이순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용꿈’도 있다. 명량해전 전날에는 신인(神人)의 꿈을 꾸었고, 어머니와 아들의 죽음을 예언하는 듯한 꿈도 꾸었다. 출세와 성욕, 불안감과 육체의 병을 반영한 꿈도 여러 번 등장한다. 꿈에 대한 기록은 1594년(10회)과 1597년(18회)에 특히 많다.

    1597년은 이순신에게 많은 일이 벌어진 해였다. 한산도에서 체포돼 한양으로 압송됐고 모진 고초를 겪은 뒤 백의종군한 때다. 그해 삼도수군통제사였던 원균이 이끌던 조선 수군은 칠천량에서 대패했다. 원균이 죽은 뒤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한 이순신이 명량해전에서 대승을 거둔 것도 그해의 일이다. 같은 해 어머니와 아들(이면)이 뜻하지 않은 죽음을 맞았다. 그래서일까. 1597년 이순신이 남긴 꿈에 대한 기록 중엔 삶의 고통과 간절한 열망이 반영된 게 많다.

    1594년은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로 강화협상 기간 중에 군대는 물론 민생까지 보살피며 행정가이자 경영자로 능력을 발휘하던 시기다. 이 시기의 꿈은 1597년과는 달리 자신감에 넘치고, 무의식 속에서 잠재적 욕망이 분출되는 상징적인 꿈이 많았다. 한쪽 눈이 먼 말, 높은 산봉우리에 말을 타고 오름, 미인의 손짓, 달려오는 외딴섬을 당당히 마주함, 붉고 푸른 용이 하늘에 오르다 벽화가 돼버린 화룡(畵龍) 등이 그것이다.



    이 시기의 꿈속엔 이순신이 가졌을 법한 ‘혁명의 욕망’이 숨어 있다. 스위스 정신분석학자 카를 융의 표현대로라면 ‘원형적 꿈’이다. 물론 이순신은 스스로 꿈을 해석하면서 자신의 잠재적 욕망을 외면했다. 하지만 현대 심리학을 적용해 분석하면 ‘은폐되고 억눌린 정치적 욕망’이 확연히 드러난다.

    聖人은 聖人의 꿈을 꾼다

    명나라 때 편찬된 꿈 해석서 ‘몽점일지’는 “제왕은 제왕의 꿈을 꾸고, 성인은 성인의 꿈을 꾼다”고 했다. 필자가 보기에 이순신은 바로 그런 꿈을 꾼 사람이었다. 그 시대 다른 사람들의 꿈 기록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이순신 시대 전후 인물 중 꿈에 대한 기록을 남긴 이는 여러 명이다.

    선조 때 예조·공조·이조 참판 등을 지냈으며 경전과 역사에 능했던 유희춘(1513~1577)은 평균 2~3일에 한 번 자신의 꿈은 물론 부인·아들, 심지어 노비의 꿈까지 기록해놓았다. 프로이트의 성욕론으로 해석할 수 있는 꿈, 출세욕과 가족 번영을 기원하는 꿈이 대부분이다. 임진왜란 때 의병활동을 했던 김종은 왜란 때 경기도 김포에 피란해 있으면서 추의군(秋義軍)에서 막좌로 활동한 인물로 출세욕이나 전쟁으로 인한 심리적 불안감과 관련된 꿈 기록을 많이 남겼다. 임진왜란의 전쟁 기록인 ‘쇄미록’을 저술한 문신 오희문(1539~1613)도 피란 중 헤어진 가족을 걱정하는 꿈을 많이 꿨다. 1644년 무과에 급제해 무관으로 활동한 박취문(1627~1670)은 함경도에서 1년 동안 의무 복부를 하면서 꿈 기록을 여럿 남겼는데, 고향을 그리워하거나 가족을 걱정하는 꿈이 많았다.

    이들과 이순신의 꿈을 비교해보면 공통점과 차이점이 확인된다. 공통점은 △조짐이나 계시라고 생각하며 긍정적으로 해석한 경향 △출세와 가족의 안위에 중점 △계시라고 해석한 꿈 내용이 때로 실현됨 등이다.

    그러나 차이점도 크다. 이순신은 개인적인 욕망의 발현으로 해석할 수 있는 꿈조차 사적으로 해석하지 않았다. 그는 공적인 해석, 즉 자신의 자리인 군인·장수·리더의 처지에서 모든 꿈을 해석하려 애썼다. 똑같이 전쟁을 겪은 김종이나 오희문, 같은 무신이던 노상추, 고위관료였던 유희춘의 꿈과 비교할 때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대목이다.

    임금과 관련한 꿈에 대한 관점도 다른 이들과 크게 달랐다. 조선시대 인물 대부분은 임금에 대한 충성심과 고마움, 기대 사항이 가득한 꿈을 꾸거나, 그렇게 해석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유별날 정도로 그 부분이 불투명했다. 어림짐작도 할 수 없을 만큼 간략하게 기록했다. 임금에게 뭔가를 바라고 기대하는 등의 모습이 그의 꿈에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이순신은 다른 사람과 달리 자신의 꿈을 현실의 전쟁 상황에 직접 반영해 해석하는 경우가 많았다. 다른 사람들은 꿈을 길흉화복이나 예언으로 생각한 반면, 이순신은 언제나 자신의 꿈을 현실에서 마주한 일본군과의 대결과 관련된 군사작전과 연계했다. 다른 양반들이 부귀영화를 염원하며 꿈을 해석할 때, 이순신은 꿈의 징조까지 유비무환의 수단으로 활용했고 꿈속에서까지 승리를 열망했다.

    그의 꿈에는 나라의 명운을 걸머진 리더로서, 또 생사의 경계선에 서 있는 부하들의 생명을 지키는 장수로서, 삶의 무게를 짊어져야 하는 가장으로서의 책임감과 고통, 눈물과 회한, 사랑과 열망이 담겼다. 그의 꿈은 회상이나 일차원적 욕망이 아니라 지혜의 원천이었고, 마음의 칼을 가는 숫돌과 같았다.

    푸른 용과 화룡(畵龍)

    1595년 2월 9일. 꿈을 꾸었다. 서남쪽 사이에 붉고 푸른 용(龍)이 한쪽에 걸려 있었는데, 그 모습이 굴곡져 있었다. 나는 홀로 지켜보고 있었다. 이를 가리키며 다른 사람들도 보게 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볼 수 없었다. 머리를 돌린 틈에 벽 사이로 들어와 화룡(畵龍)이 되어 있었다. 내가 한참동안 어루만지며 완상[撫玩]했는데 그 색깔과 움직이는 모습이 기이하고 웅장했다. 기이한 징조가 많을 듯했기에 기록해 놓았다.

    이순신의 용꿈 일기다. 이 용꿈은 정조 때 편찬된 ‘이충무공전서’는 물론이고 ‘친필 초서본 난중일기’에도 나오지 않는다. 충무공 집안이 소장한 ‘충무공유사’에 기록된 일기에만 나온다. 해석 방식에 따라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바로 ‘용꿈’이기 때문이다.

    고대 중국에서는 황제나 왕을 용에 비유했다. 황제나 임금에 관계된 것에는 모두 ‘용’이라는 접두사를 붙였다. 용안(龍顔·임금의 얼굴), 용상(龍床·임금이 앉는 평상), 용루(龍淚·임금이 흘리는 눈물), 용기(龍旗·임금의 기), 용포(龍袍·임금의 옷) 등이 그것이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고구려 동명성왕의 아버지 해모수는 다섯 마리 용이 끄는 오룡거를 탔고, 어머니는 수신(水神) 용왕 하백의 딸이었다. 신라 박혁거세의 왕비 알영은 계룡에서 나왔고, 석탈해는 용성국(龍城國) 출신으로 용의 호위를 받으며 신라에 왔다. 백제 무왕은 그의 어머니가 연못의 지룡(池龍)과 교통해 출생했고, 신라 문무왕은 죽은 뒤 동해의 호국룡이 됐다. 고려 태조 왕건은 할아버지 작제건과 용녀의 소생인 아버지 용건의 아들이다. 조선의 창업을 찬양한 ‘용비어천가’에서도 왕을 용으로 묘사했다. 용꿈은 정치적 위상을 지닌 사람들이 자신의 존재를 신성화하거나 자신의 정치 행위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많이 활용했다.

    커져가는 분노와 야망

    이순신은 이 용꿈을 꾸기 전에도 잠재의식 속 야망이 드러나는 꿈을 몇 차례 꾸었다. ‘난중일기’에는 이런 기록이 여러 차례 등장한다.

    1594년 2월 3일. 새벽꿈에 한쪽 눈이 먼 말을 보았다. 무슨 징조인지 모르겠다.

    1594년 2월 5일. 새벽꿈에 좋은 말을 타고 곧바로 바위가 첩첩인 산꼭대기로 올라갔다. 아름다운 산봉우리가 서에서 동으로 이어져 있고, 산마루 위에 평평한 곳이 있어 자리를 잡으려다 깨었다. 무슨 징조인지 모르겠다. 또 한 미인이 홀로 앉아 손짓을 했는데 소매를 뿌리치고 응하지 않았다. 우스운 일이었다.

    1594년 9월 20일. 홀로 앉아 지난밤 꿈을 기억해보았다. 바다 한가운데 있던 외딴섬이 달려오다 눈앞에서 멈췄다. 우레 같은 소리에 여기저기에서 모두 놀라 달아났다. 나만 홀로 서서 그 모습을 끝까지 관찰했다. 아주 기쁘고 반가웠다. 이는 곧 왜놈이 화친을 애걸하다 스스로 멸망할 상(象)이다. 또한 나는 준마(駿馬)를 타고 천천히 가고 있었다. 이는 임금의 명령을 받아 올라갈 조짐(兆)이다.

    1594년 2월 3일, 2월 5일, 9월 20일의 꿈은 지속적으로 상향적이다. 이순신의 잠재의식이 점차 높은 곳을 향해 변화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그 결정적 지점이 용꿈이다. 전쟁이 소강상태인 강화기였지만, 이순신은 이미 불패의 명장으로 명성이 드높았고, 삼도수군통제사로 남서해의 제왕과도 같은 위치에 있었다.

    전쟁 중임에도 현실에서는 온갖 부조리가 난무했고, 무능한 리더들은 여전히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 그런 상황에서 칼을 든 장수 이순신의 가슴속은 절망과 고독, 그리고 분노와 변화에 대한 욕망이 뒤엉켜 복잡했을 것이다. 그의 차가운 머리는 인정할 수 없었겠지만, 그의 가슴속 용광로는 활활 타올랐고, 그것의 정점이 바로 불의한 세상을 전복하는 꿈, 즉 새로운 왕조 창업의 꿈인 용꿈으로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용꿈 속에 감춰진 혁명의 칼

    지난해 10월 11일 전남 해남 울돌목 해상에서 열린 명량대첩 축제.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13척의 배로 일본 수군 133척을 격파한 해전을 재현했다.

    1595년 1월 21일. 장흥 부사(전봉)가 와서 만났다. 그가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의 일하는 방식이 지극히 잘못되었고, 게다가 나를 해치려고 아주 많이 애쓴다”고 했다. 우스운 일이다. 우스운 일이다.

    1595년 4월 30일. 아침에 원수(元帥·권율)의 계본(啓本)과 기(奇)·이(李) 두 사람의 공초(供招·죄인의 진술서)를 보았는데, 원수가 근거 없이 헛되게 보고한 것이 아주 많았다. 반드시 그 잘못에 대한 문책이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데도 원수의 자리에 둘 수 있는가. 괴이한 일이다.

    1596년 5월 25일. 비가 계속 내렸다. 저녁 내내 홀로 수루 위에 앉아 있으니, 온갖 생각이 다 일어났다.‘우리나라 역사(東國史)’를 읽어보니 한탄스러운 생각이 많이 들었다

    바다의 제왕

    1594년부터 용꿈 일기를 쓰던 전후의 일기 속 이순신의 모습은 상당히 다르다. 절제하고 겸손한 리더 이순신 모습 대신 최고라는 자부심과 부조리에 대한 분노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또한 ‘우리나라 역사’를 읽으며 역사 속의 우리나라의 모습을 기억하고자 노력하는 모습도 있다.

    이순신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에야 다가올 전쟁에 대비하기 위한 조정의 고육지책으로 발탁돼 초고속으로 승진했다. 전라좌수사로 임명되기 전까지 14년 동안 그는 오르락내리락했다. 여진족과 싸우며 죽을 고비도 넘었고, 패전 책임을 뒤집어쓰고 백의종군도 했다. 최전선에서 적과 전투하면서 생사의 고비를 넘어온 이순신의 처지에서는, 탁상공론을 일삼으며 현장의 현실을 모르는 임금과 고위 관리들이 결코 좋게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이순신도 양반가 출신에 유교를 생활 철학으로 여긴 사람이기에 임금을 비난이나 비하의 대상으로 삼을 수 없었겠지만, 여진족과 왜구의 빈번한 침략으로 군사와 백성이 죽어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근본 원인과 해결책을 모색했을 것이다. 최종 책임이 임금에게 있다는 데 양반 귀족은 물론 백성도 공감했기 때문이다.

    그 상황에서 사실상 남해 바다의 제왕과도 같았던 이순신이 용꿈을 꾼 것은 잘못된 세상을 바꾸어야 한다는 잠재적 욕망이 반영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용꿈 외에도 그가 특정 왕조를 넘어선 역사적 공동체로서 한반도 국가를 우선시하는 잠재의식이 드러난 다른 사례도 있다.

    1593년 6월 21일. 맑았다. 새벽에 진을 한산도(韓山島) 망하응포(望何應浦)로 옮겼다.

    이날 일기의 한산도는 ‘閑山島’가 아니라 ‘韓山島’다. 초서본 ‘난중일기’에는 한산도에 대해 이날 일기를 제외하고 모두 한가롭다는 뜻의 ‘한(閑)’ 혹은 같은 뜻의 다른 글자인 ‘한(閒)으로 썼다. 그런데 유독 이날은 삼한(三韓)의 ‘한(韓)’, ‘나라 한(韓)’자로 한산도를 표현했다.

    이순신은 이날 군진을 옮겼고, 그 후 1597년 2월 체포돼 서울로 압송될 때까지 약 3년 8개월 동안 한산도에서 조선의 바다를 지켰다. 그가 한산도로 진을 옮기면서 ‘한(閑)산도’를 ‘한(韓)산도’로 표현한 것은, 이찬구 교수가 말한 것처럼 “한(韓)산도가 민족과 나라를 구할 최전선이며, 최후의 보루”라고 생각했을 것이라는 주장과도 관계된다. 이순신이 본진을 한산도로 옮길 때 쓴 편지에도 그의 이런 생각이 확연히 드러난다.

    “호남은 나라의 울타리입니다. 만일 호남이 없으면 나라가 없어지는 것입니다(湖南國家之保障. 若無湖南, 是無國家). 그래서 진을 한산도로 옮겨 바닷길을 가로막을 계획입니다.”

    이순신에게 한산도는 한반도를 지키기 위해 물러설 수 없는 최전선이었다. 한가로운 한(閑)산도가 아닌, 한반도 그 자체를 의미하는 ‘한(韓)산도’였다. 삼한의 ‘한(韓)’은 사대적 관점에서 스스로를 낮추는 동국(東國)이나 해동(海東)과 다르다. 이 땅의 선조 스스로가 자신의 정체성을 담아 표현한 고유한 나라 이름이다. 삼한은 민족과 영역을 포괄한 개념이다.

    또한 고려나 조선 등의 왕조 명칭이 특정 시기의 국가 또는 왕조를 지칭하는 국호라면, 한(韓)은 이 땅에 일시적으로 존재하는 특정 왕조나 국가가 아니라 한반도를 포함해 오랫동안 존재한 한(韓)문화의 영역과 집단이 구성한 역사적 공동체를 의미한다. 이순신이 표현한 ‘한’은 삼한의 ‘한’으로 특정한 왕조나 국가를 넘어선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의미에서의 역사 공동체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이순신의 ‘한산도’는 바로 이순신의 잠재의식 속에 있는 역사인식의 반영이며 혁명의 꿈을 지닌 속마음이기도 하다.

    그런 바탕에서 억제할 수 없이 커져가는 야망과 현실에 대한 분노가 응축돼 1595년 2월 9일, 마침내 화룡의 꿈을 꾸었다. 그런데 용꿈이긴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정상적인, 혹은 희망적인 용꿈이 아니다. 주요 상징어는 ‘서남쪽’ ‘붉고 푸른 용’ ‘혼자 본 것’ ‘용이 그림이 된 것’ ‘화룡이 된 용을 감상한 것’ 등이다.

    혁명의 꿈을 감추다

    그 상징을 이순신의 현실과 관련해 해석해보자면, 서남쪽은 이순신이 사실상 지배하는 서남해다. 붉고 푸른 용은 장수와 바다, 그리고 최고의 리더로 볼 수 있다. 붉은 것은 전쟁과 피, 푸른 것은 바다이기에 결국 바다를 지키는 장수가 ‘용’이 되고자 하는 잠재적 욕망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또한 붉고 푸른색은 보라색이다. 카를 융에 따르면 보라색은 ‘신비로운’ 색으로 충동의 이미지를 갖는 원형, 인간 본성이 지향하는 정신적 목표를 나타낸다. 따라서 보라색은 이순신의 잠재적 욕망이 ‘용(왕권)’을 지향하는 것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게다가 “나는 홀로 지켜보고 있었다. 이를 가리키며 다른 사람들도 보게 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볼 수 없었다”고 했다. 자신의 욕망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고 함께하려 했지만, 다른 이들이 그의 잠재적 욕망을 외면해 허탈해하는 모습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순신은 처음부터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았다. 용을 보자마자 다른 사람에게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어쩌면 이순신 자신부터 용이 두려웠는지 모른다. 용이 되고 싶지만, 용이 돼야 하는지 혹은 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뇌 때문에 말할 수 없었던 것은 아닐까.

    한편으로 이순신은 “머리를 돌린 틈에 벽 사이로 들어와 화룡(畵龍)이 되어 있었다. 내가 한참동안 어루만지며 완상[撫玩]했는데 그 색깔과 움직이는 모습이 기이하고 웅장했다”고 했다. 순식간에 하늘을 오르던 그 용이 하늘로 날아가지 않고 벽화가 됐다. 하늘을 날던 용이 어떤 이유로 그가 잠깐 머리를 돌린 사이에 왜 하늘 대신 벽 속으로 들어갔을까. 벽화가 된 뒤 이순신은 왜 혼자만 감상하고, 다른 사람들은 부르지 않았을까.

    날아가던 용이 벽 속에 들어가 화룡이 된 것은 스스로 욕망을 꺾었음을 의미한다. 자신의 유교적 세계관에서는 결코 인정할 수 없는 꿈이고, 꿈속에서 다른 사람들이 용을 보지 못한 것처럼 자신을 지지하고 도울 세력이 없어 실현 불가능한 비현실적인 꿈이기에 잠재적 권력욕의 상징인 용을 벽에 가둘 수밖에 없었던 건 아닐까. 자신의 불타오르는 혁명 욕망을 나타내는 용을 차마 죽이거나 버릴 수 없어 차선책으로 화룡을 선택한 것은 아닐까.

    벽은 공간이나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가로막고 분리하는 장치, 어느 한편을 가두거나 감추는 기능도 한다. 이순신은 자신의 비밀스러운 속마음을 감출 수 있는 마음의 장벽에 자신의 용을 가두었다. 감히 입 밖에 낼 수 없는 혁명의 꿈이라는 용을 가두고 감춰두며 홀로 안타깝게 ‘무완(撫玩)’했다.

    영원히 사는 삶

    ‘무(撫)’는 손으로 어루만진다는 뜻이고, ‘완(玩)’은 희롱하다 또는 사랑한다는 뜻이다. 이순신의 무완에는 현실에서 주관적으로나 객관적으로 실현할 수 없는 날개 꺾인 혁명의 꿈을 위로하고자 하는 애달픈 모습이 묻어난다. 그 결과 그는 자신의 야망 대신 ‘역사의 신(神)’의 판단에 맡겨 일시적인 변혁의 욕망 대신 이 땅이 존재하는 한 자신이 기억되고 영원히 사는 삶을 택했다.

    용꿈 속에 감춰진 혁명의 칼
    박종평

    1964년 충남 보령 출생

    서강대 정외과 졸업, 고려대 석사(정치학)

    저서: ‘흔들리는 마흔, 이순신을 만나다’‘그는 어떻게 이순신이 되었나’ ‘이순신, 꿈속을 걸어 나오다’‘이순신 이기는 원칙’ 등


    사람마다 주어진 환경에 따라 꿈의 내용과 형식이 다르다. 또한 같은 내용의 꿈도 해석이 완전히 다를 수 있다. 이순신의 용꿈은 이순신 자신과 그 시대를 이해한다면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이순신의 잠재의식의 표현이다. 그 용꿈에는 한 개인의 야망이 아니라 역사를 고민하는 리더의 고통과 한숨, 분노가 담겼다. 철저한 책임감이 체화된 것이다. 한편으로는 꿈을 통해 불완전한 자기 자신을 다스리고 위로하는 약한 인간의 모습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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