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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중일기로 만난 이순신과 조선

軍神 이순신 뒤에 천재 멘토 류성룡 있었다

닮은꼴 두 친구의 우국충정 리더십

  • 박종평 | 이순신 연구가

軍神 이순신 뒤에 천재 멘토 류성룡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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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감을 알아보다

이순신과 류성룡의 관계는 “가까운 이웃이 먼 친척보다 낫다”는 말에 해당한다. 허균은 “나의 본가는 건천동(乾川洞·지금의 서울 중구 인현동 일대)에 있었다. 겨우 34가구뿐이었지만 저명한 인물이 많이 나왔다. 근래는 류성룡, 나의 형 허봉(許?·1551~1588), 이순신, 원균이 한 세대”라고 했다. 허균에게 류성룡, 이순신, 원균은 한마디로 ‘동네 형들’이었다는 얘기다. 나이는 원균(1540년생), 류성룡(1542년생), 이순신(1545년생), 허봉(1551년생) 순이다. 그들이 동시에 거주하며 함께 놀았는지는 불분명하지만 34가구밖에 없었다니 서로 충분히 알 수 있었던 관계로 보인다. 류성룡과 이순신은 특히 긴밀했다. 류성룡과 이분(이순신의 조카)이 남긴 기록이 그 근거다.

선조실록 1597년 1월 27일 기록에는 류성룡이 “이순신과 같은 동네(건천동)에 살아 이순신의 사람됨을 깊이 알고 있다”고 했고, “이순신이 글을 잘 알지만 굽히기를 좋아하지 않는 성품이었고, 대장(大將)이 되는 것이 꿈인 사람”이라고 하는 대목이 나온다. 이분의 ‘이충무공행록’에도 “류성룡이 어렸을 때 같은 동네에 살아 친구였기에 장수감이던 이순신을 알아보았다”고 기록돼 있다.

류성룡은 ‘징비록’에서도 “이순신은 어릴 때 똑똑하고 활달했으며, 틀에 구속받지 않았고 아이들과 전쟁놀이를 많이 했다. 나무를 깎아 활과 화살을 만들어 놀았다”라고 썼다. 류성룡이 기록한 이순신의 모습과 류성룡 자신의 모습도 비슷하다. 훗날 이순신의 사돈이 되는 홍가신은 청소년기에 18세의 과거 수험생 류성룡과 관악산에서 함께 공부했다. 그때의 류성룡에 대해 “얼굴빛은 부드러웠으나 말과 행동은 호걸 같았고, 때때로 농담도 잘했다”고 기억했다. 이순신과 류성룡의 어린 시절이 많이 닮았음을 알 수 있다. 유유상종이라 할까.

그러나 이들이 언제 만나 얼마나 같이 놀았는지는 불분명하다. 이순신은 건천동에서 태어났지만 상주 방씨와 결혼한 21세 이전에 어머니 고향인 충남 아산으로 이주했다. 류성룡은 경북 의성에서 태어났으나 아버지 류중영의 관직 변동으로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지냈다. 그의 서울생활은 서울 동학에서 공부한 13세부터 20세 전후까지, 그리고 과거 급제 이후다. 그는 서울을 중심으로 여러 지방을 왕래하며 살았다. 류성룡과 이순신의 나이 차이를 고려하면 이순신이 9~16세이던 시기에 서울에서 만난 듯하다.



그러나 전혀 다른 기록도 있다. 조선 후기 학자 성대중의 ‘청성잡기(靑城雜記)’에는 31세의 류성룡과 27세의 이순신이 처음 만난 것으로 나온다. 즉 류성룡이 홍문관 관리로 근무하다가 잠시 귀향하려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넌 후에 처음 만났다고 한다. 그들이 탄 배에서 술 취한 권세가의 하인이 행패를 부렸다. 조용히 지켜보던 이순신이 강을 건넌 뒤 그를 제압하고 목을 베었다. 그 과정을 지켜본 류성룡은 대장감이라고 생각하며 지나갔다. 시간이 흘러 이순신이 무과에 급제한 뒤 류성룡이 군문(軍門)에서 이순신을 보고 그가 한강변의 그 대장감이었음을 알아봤다는 것이다.

서로에게 ‘싱크탱크’

軍神 이순신 뒤에 천재 멘토 류성룡 있었다

2006년 12월 한국국학진흥원 김종석 박사가 장판각에 보관된 서애 류성룡 선생의 징비록 목판을 보여주고 있다.



류성룡과 이순신의 만남은 바람 앞의 촛불 같던 조선의 역사를 바꿨다. 이순신의 장재(將材)와 문력(文力)을 알아본 류성룡은 그를 지켜보며 후원했다. 1586년 42세의 종6품 사복시 주부 이순신을 종4품 함경도 조산보 만호로 추천했고, 47세의 종6품 정읍현감 이순신을 종3품 전라좌수사로 추천·발탁해 ‘불멸의 이순신’이 될 기회를 제공했다. 그들이 서로 존경하고 끊임없이 소통하면서 기적을 만들었다. 그래서인지 난중일기에는 이순신이 류성룡을 걱정하며 점을 치는 대목, 꿈속에서 만나 나라를 걱정하는 기록도 있다.

두 사람은 각각 ‘난중일기’와 ‘징비록’에 임진왜란의 시작부터 끝까지, 7년 동안의 일을 담았다. ‘난중일기’에는 친구이자 멘토인 류성룡이 자신을 후원하는 대목, 이순신이 류성룡을 그리워하며 걱정하는 광경, 서로 소통하면서 나라와 백성을 위해 함께 고뇌하는 장면을 기록해놓았다. 류성룡의 ‘징비록’은 불패의 명장으로서 이순신의 모습을 기록하는 데 중점을 뒀다. 류성룡은 ‘징비록’의 저술 목적을 이렇게 밝혔다.

“시경(詩經)에서 말하기를, 내가 지난 일을 징계하여 훗날의 근심거리를 삼가게 한다(予其懲而毖後患)고 했는데, 이것이 ‘징비록’을 쓴 까닭이다.”

난중일기는 1592년 1월 1일부터 시작한다. 이순신이 부임한 지 1년도 안 된 시점에서 유비무환의 자세로 쉴 틈 없이 관할지역의 현장을 점검하고 무기와 전선을 살피던 시기였다. 류성룡에 대한 얘기는 그해 3월 5일 일기에 처음 등장한다.



좌의정(左台·류성룡)이 편지와 ‘증손전수방략(增損戰守方略)’이라는 책을 보내왔다. 읽어보니, 수전(水戰)·육전(陸戰)·화공(火攻) 등에 관한 일을 하나하나 논의해놓았다. 진실로 세상 그 무엇에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탁월한 이론이었다. -1592년 3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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