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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중일기로 만난 이순신과 조선

참 진(眞), 다할 진(盡) 나아길 진(進)

이순신 리더십의 요체

  • 박종평 | 이순신 연구가 goldagebook@naver.com

참 진(眞), 다할 진(盡) 나아길 진(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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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점 부끄럼 없는 순결함

백성들이 던진 돌멩이를 맞고 욕을 먹으며 도망친 선조와 전혀 다른 처지다. 이순신은 백성에게 생명 그 자체였다. #1과 #2에서 눈여겨봐야 할 것이 또 있다.

#1이 있기 직전, 이순신은 가덕도 앞바다에 출동해 있다가 체포 명령을 듣고 본진으로 돌아왔다. 그는 도착 즉시 진중의 군량과 무기류를 계산해 후임자인 원균에게 인계했다. ‘행록’에 따르면, 진영 안의 군량미 9914석, 화약 4000근, 전선에 비치된 총통 외 300자루 등을 인계했다. 직위가 해제되고 생사의 갈림길에 섰는데도 이순신은 직분에 충실했다.

‘행록’에 따르면, #2에서 이순신은 권율(權慄·1537~1599)의 요청으로 패전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7월 18일 군관 9명, 군사 6명과 함께 길을 떠났다. 그가 옥과와 순천을 거쳐 보성에 도착했을 때 인원이 120여 명으로 불어났다. 피난을 가던 젊은이들이 이순신을 만난 뒤 가족에게 “이제 우리 대감이 오셨으니 너희들은 안 죽을 것”이라며 수군 재건의 길에 합류했기 때문이다.

무엇 때문에 백성들은 잡혀가는 이순신을 보고 “우리는 다 죽은 목숨입니다”라고 했고, 무엇 때문에 백성들은 복귀한 이순신을 보고 “우리는 살길이 생겼습니다”라고 했을까. ‘난중일기’와 ‘임진장초’에는 그 이유를 설명해주는 사례가 많다. 필자는 그것을 ‘참 진(眞)’ ‘다할 진(盡)’ ‘나아길 진(進)’으로 정리한다.



윤동주가 ‘서시’에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라고 한 것과 똑같다. 한 점 부끄럼이 없는 순결함으로 묵묵히 소명을 실천한 사람이 이순신이다.

1597년 9월 15일은, 8월 3일 통제사 재임명장을 받은 이순신이 군사를 모으고 전선(戰船)을 수습하면서, 닥쳐올 대결전인 명량해전을 앞둔 날이다. 8월 18일 이순신은 회령포(會寧浦)에서 경상우수사 배설 소속의 전선 10여 척을 인수했다. 그가 한산도에 있던 4년 동안 새로 건조하고 정비한 전선이 150여 척이었는데 12척만 남았다.

이순신도 어쩔 수 없는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20일부터 23일까지는 음식을 먹지 못했다. 토하기도 하고 인사불성 상태에 이르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 수군을 궤멸시키기 위해 추격해 오는 일본 수군을 잊지 않았다.

神人을 만나다

지친 몸을 추스르며 그는 소수가 다수를 상대해 승리할 수 있는 장소를 찾아 나섰다. 회령포를 시작으로 8월 20일 이진(梨津), 24일 도괘(刀掛)를 거쳐 어란(於蘭)포로, 28일 장도(獐島), 29일 벽파진(碧波津), 9월 15일 우수영(右水營) 앞바다로 진영을 옮겼다.

이동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일본군은 칠천량 패전으로 사기가 바닥인 조선 수군을 끊임없이 괴롭혔다. 하지만 이순신은 철저한 준비와 계산으로 단 한 차례도 허점을 보이지 않았다.

8월 28일, 적선 8척이 기습했지만 이순신은 “나는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적선이 다가오자 나각(螺角)을 불고 깃발을 휘두르며 쫓아버리게 했다.” 9월 2일, 조선 수군 수뇌부의 일원인 배설이 도망쳤어도 이순신은 흔들리지 않았다.

9월 7일, 탐망군관(探望軍官) 임준영이 일본 전선 13척이 어란포에 도착했다고 보고하자 그는 기습에 대비했다. 오후 4시쯤 일본군이 기습했지만, 준비된 조선 수군에 타격을 주지 못했다. 일본군은 그날 밤 다시 기습했으나 이를 예측한 이순신이 대장선을 이끌고 나가 지자포(地字砲)를 쏘며 격퇴했다.

9월 14일, 임준영이 “적선 200여 척 중 55척이 먼저 어란포에 들어왔다”고 보고하자 그는 결전을 예감하고 전령선(傳令船)을 보내 피난민들을 육지로 올라가도록 급히 명령을 내렸다.”

9월 15일, 이순신은 “벽파정 뒤에는 명량(鳴梁)이 있다. 적은 수의 수군으로 명량을 등 뒤에 두고 진(陣)을 칠 수 없다”며 우수영 앞바다로 이동했다. 그러고는 장수들을 불러 모아 이렇게 말했다.

“병법에 전하기를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반드시 살려고 하면 죽는다(兵法云 必死則生 必生則死)’고 했다. 또한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一夫當逕 足懼千夫)’고 했다. 지금 우리를 두고 한 말이다. 너희 여러 장수가 조금이라도 군령을 어긴다면 곧장 군율로 다스려 용서치 않을 것이다.”

그날 밤 이순신은 꿈에 신인(神人)을 만났다. 신인은 이순신에게 지시하며 말하기를 “이렇게 하면 크게 이기고, 저렇게 하면 패배할 것이다”라고 했다. 이순신이 신인이 알려준 방법대로 전투했는지는 알 수 없다. 확실한 사실은 그가 12척의 전선으로 133척의 일본군과 맞서 승리했다는 것이다. 이순신이 승리를 간절하게 염원했기에 믿기지 않는 일이 일어났다.

배설에게 퇴로 열어줘

꿈에 신인이 나타날 정도로 승리를 열망한 이순신이지만 신인 덕분에 명량에서 승리한 것은 아니다. 7월 중순의 칠천량 해전 이후 10월 29일 목포 고하도(高下島)까지 이동하는 과정을 보면, 이순신 리더십의 진면모를 알 수 있다.

명량해전 두 달 전에 쓴 7월 18일 일기에는 원수(元帥) 권율이 칠천량 패전 후 이순신에게 도움을 요청한 대목이 나온다. 요청을 받은 이순신은 “제가 직접 연해 지방으로 가서 듣고 본 후에 대비책을 정합시다”라며 현장으로 달려갔다.

‘듣고 본 후에 대비책을 정하자(吾往沿海之地 聞見而定)’는 그의 말은, 중국 한(漢)나라의 명장 조충국(趙充國)이 유목민족 강(羌)의 반란 소식을 듣고 대책 수립을 요청하는 황제에게 “백 번 듣는 것보다는 실제로 한 번 보는 것이 낫다(百聞不如一見). 군사의 일은 예측하기 어렵다. 직접 가서 현지 지형을 관찰한 뒤 대책을 세우겠다”고 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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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평 | 이순신 연구가 goldagebook@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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