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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연재 | 조선의 아버지들

멸문지화 자식들에게 “벼슬길 오른 듯 당당하라”

유배지 정약용의 ‘치마폭 훈계’

  • 백승종 |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chonmyongdo@naver.com

멸문지화 자식들에게 “벼슬길 오른 듯 당당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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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약용은 정조의 총아였지만, 정조가 승하하자 천주교 문제로 집안이 몰락한다. 그는 유배지에서 아내의 낡은 치마폭을 잘라 만든 서첩에 20대 두 아들에게 보내는 교훈을 적었다. 가족이 위기에 처할수록 더욱 서로를 배려하고 당당한 태도를 잃지 말라는 당부. 21세기에도 여전히 살아 있는 가르침이다.
멸문지화 자식들에게 “벼슬길 오른 듯 당당하라”

제공·학국실학학회

기세 좋게 잘나가다가도 갑자기 맥없이 꺾이는 것. 예나 지금이나 인생은 그럴 수가 있다. 그럴 때 위기에 빠진 가장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조선 후기에도 한순간에 끝없이 추락한 이름난 사내가 있었다. 다산 정약용(丁若鏞·1762~1836), 오늘날 한국인의 사랑을 듬뿍 받는 바로 그다. 누구나 아는 것처럼 정약용은 정조의 총아였다. 그러나 정조가 승하하자 천주교 문제 때문에 그의 온 집안이 몰락했다. 장래가 유망했던 정약용은 서남해안 강진의 배소(配所, 귀양지)로 쫓겨났다. 그는 18년 동안 그곳에서 가난과 고독을 벗하며 늙어갔다. 하지만 정약용의 푸른 뜻은 꺾이지 않았다. 그는 유배지에서 학문을 갈고닦아 혼탁한 세상을 구제할 뜻을 세웠다.
정약용에게는 멀리 경기도 양주 마재에 두고 온 가족이 있었다. 그는 아내와 자식들을 향한 그리움에 시달리며 편지를 쓰고 또 썼다. 아버지 정약용이 절해고도의 벼랑 끝에 선 절박한 심정으로 가족에게 보낸 편지 가운데 ‘하피첩’이 있다. 거기에는 두 아들에게 주는 일종의 가계(家戒), 즉 교훈이 기록돼 있다. 이 글은 바로 그에 관한 것이다.
우리가 사는 21세기는 역사상 어느 때보다도 풍요롭고 안전해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겉모습뿐이다. 현대는 정약용이 살던 조선 후기보다 훨씬 위험하고 불안정하다. 강요된 퇴직, 사고, 질병 등 일상적 위기가 삶을 짓누른다. 평범한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나는, ‘아버지 정약용’에게 동병상련(同病相憐)의 감정을 느낀다. 그러면서도 그의 청고한 기개와 의연함을 떠올리면 부럽기도 하고, 부끄러운 생각도 든다.



노을빛 치마의 가르침

지난 10월 중순, 국립민속박물관은 정약용의 귀중한 유물 한 점을 언론에 공개했다. ‘하피첩’(보물 제1683-2호)이 그것이다.
 
병든 아내 낡은 치마를 보내, 천리 먼 길에 애틋한 마음 전해왔네. 오랜 세월에 붉은빛은 이미 바래, 늘그막에 드는 마음 서글픔뿐이네. 마름질하여 작은 서첩으로 꾸며, 자식들 일깨우는 글귀를 적었다오. 부디 어버이 마음 헤아려 오래도록 가슴 깊이 새겼으면 좋겠소.

1810년 초가을이었다. 죄인 정약용은 이미 10년째 유배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석방될 조짐은 거의 없어, 유배는 어느덧 기약 모를 일이 되고 말았다. 아내와 자식들을 향한 그리움과 걱정은 더욱 깊어졌다. 그 무렵 아내 홍씨 부인이 보낸 낡은 치마가 강진의 유배지에 도착했다. 시집올 때 아내가 입은 활옷, 곧 결혼예복이었다. 다홍치마 5폭이었다.
정약용은 아내의 정을 가슴에 새기며 한 가지 결심을 했다. 이태 전에 수리한 다산초당의 동암(東菴)에서였다. 그는 낡은 치마폭을 자르고 중국산 종이를 오려붙여 아담한 서첩 하나를 만들 생각이었다. 그리하여 이 서첩을 자신과 홍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두 아들에게 주려고 했다.
당시 큰아들 정학연(丁學淵·1783~1859)은 28세, 둘째아들 정학유(丁學遊·1786~1855)는 25세였다. 그들에게 줄 서첩은 ‘하피첩’이라 했다. ‘붉은 노을빛(霞) 치마(帔)로 된 서첩(帖)’이라는 뜻이다. 아버지는 이러한 특별한 방식으로 아내와의 사랑을 추억했고, 아들들에 대한 자신의 훈계에 애틋함을 더했다.
정약용의 문집을 자세히 살펴보면 ‘하피첩’의 제작 경위를 자세히 기록한 글 하나가 발견된다. ‘하피첩에 제함’(‘다산시문집’, 제14권)이다. 독자의 심금을 울리는 그 글의 일부를 옮겨본다.

나는 이것(아내의 활옷)을 잘라내어 조그만 첩자(帖子)를 만들고, 붓끝이 가는 대로 훈계하는 말을 써 두 아들에게 전해주었다. 훗날 그들은 내 글을 읽고 느끼는 바가 있으리라. 양친 부모의 손때 묻은 자취를 바라보면 그리운 마음이 뭉클 솟아날 것이 아닌가.

‘하피첩’은 이렇게 탄생했고, 그 집안의 가보가 돼 대대로 전해졌다. 서첩에 담긴 정약용의 가르침은 길이 후손들의 삶을 이끄는 지표가 됐다. 그러나 1950년 여름, 6·25전쟁이 일어나는 바람에 서첩은 안타깝게도 분실되고 말았다. 그런데 갑자기 2005년, 폐지 수집으로 생계를 잇는 어느 할머니의 손수레에서 발견돼 세상을 놀라게 했다.



짧은 봄날

천주교 탄압이 본격화하기 전까지만 해도 정약용의 가족들은 남부러운 줄 몰랐다. 그의 집안은 ‘남인’을 대표하는 명문가였다. 조상 대대로 홍문관의 영예로운 벼슬을 거듭해 ‘8대 옥당(玉堂, 홍문관) 집안’이란 명성이 자자했다.
영조 때는 한동안 조정에서 배제되는 등 곤경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정조가 즉위하자 벼슬길이 다시 열렸다. 정조는 탕평책을 힘써 추진해, 노론 위주의 조정에 일부 남인 학자를 등용함으로써 새로운 기풍을 조성했다. 정조는 남인의 영수 채제공을 등용해 훗날 영의정에 임명하기도 했다. 청년학자 이가환 등 남인의 젊은 재사도 여럿 발탁했다. 정약용도 그중 하나였다.
1783년 정약용은 진사시에 합격했고, 6년 뒤인 1789년에는 문과에 급제했다. 그러자 정조는 정약용에게 명령해 화성 행차를 위해 한강에 배다리를 만들게 했다. 또 그를 ‘초계문신(抄啓文臣, 대신들이 추천한 유망한 청년 관리)’으로 뽑아 당대의 재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조정의 반열에 서게 했다. 결과적으로 정약용은 삼사의 화려한 벼슬을 두루 역임한다. 경기도 암행어사에 발탁돼 상당한 업적을 남기기도 했다.
정조는 정약용의 재주를 아꼈다. 친상(親喪)을 당해 벼슬을 떠나 있던 그에게 화성 수축(修築)에 필요한 여러 도구와 기계를 설계하도록 명령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훗날 정약용은 그때의 사정을 이렇게 술회했다.

용(=정약용)이 이에 기중가도설(起重架圖說)을 지어 올렸다. 활거(滑車)와 고륜(鼓輪)은 작은 힘을 이용해서 큰 무게를 옮길 수 있었다. 성을 짓는 일이 끝나자 주상(=정조)께서 말씀하셨다. ‘다행히 기중가(起重架)를 써서 돈 4만 냥의 비용을 줄였다.’
-정약용, ‘자찬묘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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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 |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chonmyongd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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