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동아 로고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새 연재 | 조선의 아버지들

멸문지화 자식들에게 “벼슬길 오른 듯 당당하라”

유배지 정약용의 ‘치마폭 훈계’

  • 백승종 |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chonmyongdo@naver.com

멸문지화 자식들에게 “벼슬길 오른 듯 당당하라”

2/4
정약용이 속한 남인은 조정의 소수파였다. 그럼에도 정조의 비호가 있었기에 그의 승진은 남달랐다. 30대 젊은 나이에 정약용은 병조참지(정3품)와 형조참의(정3품)라는 고위직을 역임했다. 이런 추세가 계속된다면 아마도 수년 뒤에는 정승 판서로 등용될 전망이 뚜렷했다. 1780, 90년대의 젊은 정약용과 부인 풍산 홍씨, 그리고 어린 두 아들에게는 인생의 봄날이 한껏 펼쳐졌다.



겨울 내 건너듯 했건만…

그러나 정조가 쓰러지자(1800년) 천주교 문제가 크게 불거졌다. 이미 1790년대에도 두어 차례 시비가 일어나긴 했다. 그래도 그때는 정조의 적극적인 보호 덕에 별로 타격을 입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다. 정약용이 ‘여유당(與猶堂)’이란 호를 사용하게 된 배경이 그것이다. 여유당은 ‘겨울 내를 건너듯, 이웃을 두려워하듯’ 조심스럽게 산다는 뜻이다. 정약용은 정치적 위기가 다가옴을 직감하고 이런 호를 지어 스스로 경계했지만, 다가오는 화를 피하지는 못했다.
조정에서 서학(西學) 즉, 천주교 신앙을 본격적으로 탄압하게 된 데는 당시 내외의 환경 변화가 작용했다. 18세기 초중반, 이웃나라 중국에서도 몇 차례 ‘교안(敎案)’ 곧 천주교와 관련된 사건이 일어나 다수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1724년 옹정제는 중국인에 대한 천주교의 선교금지령을 내렸다. 자연히 중국의 천주교세는 위축됐다.
설상가상으로 1742년 로마 교황 베네딕트 14세는 조상 숭배를 포함한 일체의 우상 숭배를 금지했다. 이후 중국과 한국의 천주교 신자들은 조상의 제사를 폐지할 뿐만 아니라 사당에 모신 위패도 받들 수 없게 됐다.
중국에서 천주교가 전대미문의 위기에 빠진 18세기 후반, 조선 사회에 천주교가 들어왔다. 후대인의 관점에서 보면, 조선에서도 곧 천주교 문제가 발생할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당대 한국의 천주교 신자들은 그런 정세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다.
초창기 한국 천주교회에서 지도적 활동을 수행한 것은 정약용 집안 사람들이었다. 1784년 1월 정약용의 자형 이승훈은 사신행차를 따라 북경에 가서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세례를 받고 돌아왔다. 그 영향으로 정약용의 형 정약종은 천주교 신학을 집중적으로 연구해 조선을 대표하는 신학자가 됐다. 정약용의 또 다른 형인 정약전도 천주교 신자였고, 정약용 자신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들과 친밀한 이벽, 이가환, 권철신 등 서울의 남인 학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보호자는 떠나고…

멸문지화 자식들에게 “벼슬길 오른 듯 당당하라”

정약용 ‘하피첩’. 6·25전쟁 때 분실됐다가 2005년 우연하게 발견됐다.

조정에서 정약용의 천주교 신앙이 문제 된 것은 1791년의 ‘진산사건’ 때가 처음이다. 남인 학자 윤지충과 권상연이 신앙상의 이유로 위패와 신주를 불사르고 제사를 폐지한 사실이 발각됐다. 그러자 조정에 진출한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공격이 시작됐다. 이후 조정에서는 천주교 문제가 여러 차례 제기된다. 1795년, 결국 정약용은 조정에서 쫓겨나 금정찰방(충남 청양)으로 좌천됐다. 하지만 정조가 적극적으로 감싸준 덕분에 그해 겨울 다시 조정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그는 형조참의에 이어 우부승지, 좌부승지가 돼 정조를 측근에서 모셨다. 그럼에도 그의 신앙 문제에 대한 반대파의 공격은 줄어들지 않았다.
1797년 신변의 위기를 느낀 정약용은, ‘자명소’라는 일종의 반성문을 국왕에게 제출했다. 젊은 시절 한때나마 천주교 신앙에 빠져든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를 빌었다. “책만 보고 만 것이 아니라 마음속으로 반기며 빠져들었습니다.”(‘자찬묘지명’) 정조는 그에게 쏟아지는 비판이 줄어들기를 희망하며, 이번에는 그를 황해도 곡산도호부사로 보냈다. 이태 뒤 천주교에 관한 조정의 논란이 사그라지자 정조는 그를 다시 불러들였다. 그가 서울로 ‘올라오는 도중에 동부승지에 제수하고, 도성에 들어오자 형조참의에 제수했다.’(‘자찬묘지명’) 정약용의 천주교 신앙 문제는 이런 식으로 마무리될 것 같았다.
그러나 1800년 정조가 승하하고 나이 어린 순조가 즉위하자 사정이 일변했다. 왕조의 전통에 따라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가 섭정을 맡았다. 왕후 일파는 천주교 문제를 크게 일으켜 반대파를 모두 제거하고 자신들이 권력을 독점할 계획을 꾸몄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난 까닭이 거기에 있다.
정약용 삼형제를 비롯한 많은 사람이 존망의 기로에 섰다. 희생자 중에는 노론과 북인도 일부 포함됐지만, 대부분은 정조가 중용한 ‘남인 신서파’, 곧 남인 출신 천주교 신자들이었다.
 
(정약)용의 형 약전·약종 및 이기양 ·권철신·오석충·홍낙민·김건순·김백순 등이 모두 차례로 옥에 들어갔다. 그런데 (문제의) 문서들 가운데는 도리어 (정약)용의 누명을 밝게 벗길 만한 증거가 많이 있었다. 그리하여 (정약용에게는) 형틀을 벗기고 의금부 안에서 자유를 얻었다.
-‘자찬묘지명’





두 아들에게 주는 家戒

수사가 본격화하자 정약용이 천주교와는 무관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는 무죄방면될 가능성이 컸다. 다수의 대신은 정약용의 무죄를 주장했다. 그러나 대신 서용보가 그의 유죄를 강력히 고집하자 역풍이 불었다. 서용보는 일찍이 정약용이 경기도 암행어사 시절에 자신의 죄상을 적발한 사실 때문에 깊은 원한을 품었다.
결국 서용보의 주장대로 정약용은 중한 벌을 받았다. 그는 경기도 기장현으로, 그의 중형 정약전은 전라도 신지도로 유배됐다. 또 다른 형 정약종은 여러 교우와 함께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2/4
백승종 |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chonmyongdo@naver.com
목록 닫기

멸문지화 자식들에게 “벼슬길 오른 듯 당당하라”

댓글 창 닫기

2019/09Opinion Leader Magazine

오피니언 리더 매거진 표지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목차보기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