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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아버지들

4대 사화(士禍) 버텨낸 강철 신념, 불꽃 의지

거가(居家) 선비 유계린의 ‘거가십훈’

  • 백승종 |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chonmyongdo@naver.com

4대 사화(士禍) 버텨낸 강철 신념, 불꽃 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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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5세기 말부터 4차례 거듭된 사화로 당대의 진보세력 사림파가 입은 손실은 컸다. 하지만 그들은 소멸되지 않았고, 결국 조선 사회의 주도층으로 성장했다. 조선 초기 사림파의 일원 유계린 역시 ‘거가십훈’의 실천을 통해 멸문의 위기에서 탈출했고, 그의 학문적 지도를 받은 두 아들은 전국적인 명사로 자랐다.
4대 사화(士禍) 버텨낸 강철 신념, 불꽃 의지

유희춘이 노년에 쓴 ‘미암일기’ 원본(보물 제260호)과 그의 문집 ‘미암집’ 목판. 문화재청 홈페이지

사화(士禍)는 15세기 말 조선 연산군 때 시작돼 16세기 전반 명종 때까지 4차례나 거듭됐다. 무오사화(1498), 갑자사화(1504), 기묘사화(1519), 을사사화(1545)가 그것이다.
사화마다 발생 배경이나 전개 과정 엔 상당한 차이가 있다. 하지만 큰 틀에서 보면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사림파, 곧 당대의 진보적 지식인들이 훈구파와 왕실 외척들로부터 정치적 탄압을 당한 일련의 사건이라는 점이다. 현실주의자들이 성리학 정치이념을 구현하려 애쓴 이상주의자들을 거세한 것이다.
거듭된 사화로 사림파가 입은 손실은 막대했다. 그러나 사림파는 소멸되지 않았다. 그들은 되레 조선 사회의 주도층으로 성장했고, 17세기 들어 사림의 시대를 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여러 원인이 있지만, 그 문제를 여기서 일일이 따져볼 겨를은 없다. 다만 지나칠 수 없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다. 그들이 세찬 시련과 위기를 극복하고 성장한 배경엔 아버지들의 비상한 노력이 있었다는 점이다.



김종직-김굉필-유계린

새삼스럽게 유희춘(柳希春·1513~
1577)이라는 호남 성리학자 집안의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유희춘은 말년에 벼슬이 홍문관 부제학(정3품)에 이르렀다. 당대의 석학 김안국(金安國·1478~1543)과 최산두(崔山斗·1483~1536)의 문인이다. 청년 시절부터 학자로 이름을 날렸고, 사후에는 전라도 담양과 무장, 함경도 종성의 여러 서원에 배향됐다. 노년에 쓴 ‘미암일기(眉巖日記)’는 ‘선조실록’을 편찬하는 데 가장 중요한 자료가 됐다. 유희춘의 아내 홍주 송씨도 당대의 여류 문사였다. ‘덕봉(德峰)’이란 호로 이름난 그녀는 한시(漢詩)에 능통했다.
이렇게 몇 줄로 뭉뚱그려놓고 보면, 그 집안에 과연 무슨 큰 어려움이 있었다는 것인지 짐작하기 어렵다. 실상은 비참했다.
그들은 연거푸 4차례의 사화에 얽혀 상당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럼에도 성리학자 가문의 전통을 굳게 지키며 성장을 거듭했다. 결국은 명문가가 됐다. 그런 성공의 이면엔 유희춘의 아버지 유계린의 지혜와 노력이 있었다.
유계린(柳桂隣·1478~1528)은 조선 초기 사림파의 일원이다. 그의 스승은 김굉필(金宏弼·1454~1504)이다. ‘소학동자(小學童子)’라는 별호로도 유명한 김굉필은 무오사화 때 평안도 희천으로 유배됐다. 사건의 발단은 ‘조의제문(弔義帝文)’이라는 한 편의 글. 그 저자는 김종직(金宗直·1431~1492)으로, 그는 고려 충신 길재(吉再·1453~1419)의 학통을 이어 조선 초기 사림파의 종장(宗匠)이 됐다.
김종직은 ‘세조실록’에 실린 이 글에서 은연중 세조의 왕위 찬탈을 중국 고대에 항우가 진(秦) 의제를 살해한 사건에 비유했다. 유자광 등 훈구파는 그 점을 문제 삼았다. 유자광 등은 김종직을 불충한 인물로 규정하고 부관참시(剖棺斬屍, 관을 쪼개어 목을 자름)했다. 그들은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과 김굉필 등 사림파를 대거 숙청하고, 조정의 권력을 독점했다.



해남 성내에 숨어 살아

무오사화 6년 뒤 갑자사화가 일어났다. 이번엔 왕실 외척들이 주도했다. 그들은 연산군의 어머니 윤씨의 복위를 추진하면서 이를 반대하는 일부 훈구파와 사림파를 역신(逆臣)으로 몰아 잔혹하게 처벌했다. 유계린의 스승 김굉필은 사림파의 영수로서 이 사건에 다시 연루됐다. 김굉필은 전라도 순천으로 유배당해 결국 거기서 사약을 마시고 운명했다.
유계린은 두 차례의 사화로 스승과 많은 동료, 선배를 잃었다. 그에게 친아버지와도 같던 장인 최부(崔溥·1454~1504)도 희생됐다. 최부는 이미 무오사화 때부터 김굉필과 유배형을 당했다. 그는 함경도 단천으로 귀양을 갔다. 그러다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김굉필 등과 함께 사형을 당했다.
흔히 조선 초기 사림파라면 영남 출신 성리학자들만 떠올린다. 사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경기, 충청은 물론 호남에도 사림파가 상당수 존재했다. 최부는 호남 성리학자의 대표적 인물로서 김종직의 아낌을 받았다. 최부의 호는 금남(錦南), 훗날 ‘표해록(漂海錄)’이란 책으로 명성을 얻었다. 그는 왕명으로 제주도에 갔을 때 부친상을 당했다. 귀향을 서두르던 중 그가 탄 배가 표류했다. 그로 인해 뜻하지 않게도 중국을 다녀왔다(14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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