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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아버지들

자신에겐 석벽(石壁) 자식에겐 자부(慈父)

다정다감한 아버지 이순신

  • 백승종 |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chonmyongdo@naver.com

자신에겐 석벽(石壁) 자식에겐 자부(慈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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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신의 부족함은 돌아보지 않고 자식을 가르치려 들다 낭패하는 이가 적지 않다. 이순신은 결코 그렇지 않았다. 스스로에겐 엄격했지만 자식들에겐 한없이 너그러운 아버지였다. 그의 자손 중 나라의 동량(棟樑)이 여럿 나왔다.
자신에겐 석벽(石壁) 자식에겐 자부(慈父)

국보 제76호이자 세계기록문화유산인 ‘난중일기’.

이순신의 인기는 여전하다. 연전에는 영화 ‘명량’(2014)이 큰 인기를 끌었다. 김훈의 소설 ‘칼의 노래’(2001)와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2004~2005)도 연달아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순신을 향한 우리 국민의 사랑은 아마 앞으로도 끝이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는 누란(累卵)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했다. 비장한 최후 역시 감동적이다. 게다가 ‘난중일기’라는 자필 일기를 통해 자기 내면을 솔직히 고백했다. 읽으면 읽을수록 그의 인간적 매력에 빠져든다.

난중일기를 통해 남편이자 아버지, 즉 가장으로서 이순신의 모습을 그리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성웅 이순신’이라는 아이콘에 가려진 그의 참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야기의 매듭을 쉽게 풀기 위해 먼저 그에 관한 영웅담부터 꺼내보자.



믿고 의지할 지도자

“공은 몸집이 크고 용맹이 뛰어났으며, 수염이 붉고 담력이 큰 분이셨다.” 17세기의 대학자 윤휴(尹鑴·1617~1780)의 증언이다. 윤휴만큼 이순신을 속속들이 잘 알던 사람도 없다. 윤휴의 서모(庶母)는 이순신의 서녀(庶女)였다. 구국의 명장 이순신을 존경한 윤휴는 관계 문헌을 샅샅이 수집했고, 이순신을 모신 여러 하인과 측근을 만나 궁금증을 풀었다. 그 결과를 정리해 그는 ‘통제사이충무공유사’(‘백호전서’, 제23권)를 집필했다.
이순신의 공적은 무엇일까. “적이 우리나라에 쳐들어와 처음에는 승승장구하며 진격했다. 그러나 우리 수군에게 거듭 패전을 면치 못했다.”(윤휴, ‘통제사이충무공유사’) 이순신의 수군 때문에 왜군의 병참선은 무너졌다. 그들이 계획한 수륙양면 작전도 휴지가 돼 한반도 정복의 야심이 꺾였다. 더욱이 이순신 덕분에 호남지방이 온전히 보호돼 조선은 장기전을 펼 수 있었다.

조선 침략의 원흉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이를 분히 여겼다. 그는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에게 조선 수군의 궤멸을 주문했다. 그러자 고니시는 요시라라는 첩자를 써서 조선 조정을 속였다. 우매한 조정의 처사로 이순신은 통제사 자리에서 쫓겨났고, 목숨까지 잃을 뻔했다.

7년에 걸친 왜란 동안 이순신은 나라를 위해 노심초사했다. “그는 상으로 받은 물건들도 휘하 장수들에게 모두 줬다. 사사로이 차지한 것이라곤 없었다. 또한 백성들을 어루만져 편안케 했다. 부하들에게 농사를 가르쳐 식량을 저축하고, 어업과 소금 제조에 힘써 진중의 생계를 꾸렸다. 덕분에 군량이 넉넉해 끊어진 적이 없었다. 남도의 백성들도 이것으로 먹고산 이가 수만 집이다.”(통제사이충무공유사) 이순신은 변방의 장수였지만, 최고의 통치자이자 경영자였다.

그를 시기한 원균이 “백성들이 이순신을 ‘해왕(海王)’이라고 부릅니다”라고 조정에 고자질한 것을 음해로만 볼 일이 아니다. 백성들 처지에선 이순신만큼 믿고 의지할 지도자가 없었다.
이순신에겐 젊어서부터 웅대한 뜻이 있었다. “장부가 세상에 태어나 벼슬에 나간다면 몸 바쳐 일할 것이요, 등용되지 못한다면 초야에서 농사짓고 살면 된다. 권세가에게 아부하여 부귀를 훔치는 일을 나는 몹시 부끄럽게 여기노라.”(통제사이충무공유사) 이순신은 항상 그런 태도를 보였다. 자존감이 누구보다 강한 그는 남의 인정을 받기 위해 나긋나긋하게 굴지 않았다. 자신을 단속하는 풍도가 늠름해 함부로 남을 추종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의 벼슬길은 유독 험난했다.

다행히 조정엔 이순신이 큰 그릇임을 알아본 재상이 몇 명 있었다. “유서애(柳西厓, 유성룡), 이완평(李完平, 이원익), 정상국(鄭相國, 정탁), 경림(慶林, 경림부원군 김명원), 오성(鰲城, 오성부원군 이항복) 등이 그를 전후좌우에서 발탁하고 지지했다. 그리하여 못난 사람들의 천대와 비웃음에 꺾이지 않고, 마침내 대업을 성취했다(통제사이충무공유사). 비록 소수이나마 그를 후원한 재상들이 있었기에 이순신은 좌절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순신을 제대로 알아본 이들은 백성이었다. 사후에도 그의 인기는 생전에 그가 활동한 서남해안 일대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백성들은 힘을 모아 사당을 세우고 철마다 그를 위해 제사를 지냈다. 장사꾼, 군인, 백성 할 것 없이 사당을 지나는 사람들은 누구나 한잔 술을 바쳤다. 백성들은 큰 돌을 다듬어 ‘이장군타루지비(李將軍墮淚之碑)’(전남 여수시)를 세워 기념하기도 했다.

이수광의 ‘지봉유설(芝峯類說)’엔 더 기막힌 이야기가 전한다. 순천의 옥형(玉浻)이란 노스님은 승병으로, 이순신을 모시고 왜적과 싸웠다. 이순신이 작고하자 그는 충민사(忠愍祠, 전남 여수시)에 눌러앉아 평생 동안 제사를 모셨다. 옥형 스님은 바다에 변고가 일어날 때마다 이순신이 미리 꿈에 나타난다고 증언했다. 남도 백성에게 이순신은 ‘바다의 신’이 된 것이다.



우울한 영웅

이순신은 탁월한 문장가였다. 18세기 북학파의 이름난 학자 이덕무는 그를 조선의 명문장가라고 했다. 임진왜란에 참전한 수백 명 장수 가운데서도 난중일기와 같은 기록물을 남긴 이는 이순신뿐이다. 난중일기는 국보 제76호이자 세계기록문화유산이기도 하다. 난중일기를 살펴보면, 고뇌하는 이순신의 모습이 도처에 역력하다. “혼자 다락 위에 기대 앉아 나라의 형편을 생각하니 아침 이슬처럼 위태롭기만 하다. 그러나 안으로는 정책을 결정할 인재가 없고, 밖으로 나라를 바로잡을 주춧돌 같은 인물이 없다. 사직이 장차 어찌 될는지 모르겠다.”(난중일기, 1595년 7월 1일)

이순신은 그저 용맹스럽기만 한 무사가 아니었다. 그는 예리한 판단력의 소유자요, 비판적 지식인이었다. 명망과 학식이 높다는 조정 대신들도 그의 눈엔 범부에 불과할 때가 대부분이었다. 나랏일을 생각할 때마다 이순신은 우울하고 고독했다. “촛불을 밝히고 홀로 앉아 나랏일을 생각하니, 나도 몰래 눈물이 흘렀다.”(난중일기, 1595년 1월 1일) 

“몸이 몹시 불편하여 홀로 봉창 아래 앉아 있었다. 온갖 회포가 다 일어난다. 이경복에게 장계를 지니고 가라고 보냈다. 경(庚)의 어미에게 줄 노자를 문서에 넣어 보냈다.”(난중일기, 1593년 8월 13일) 전쟁을 치르는 내내 그는 몸이 불편했다. 불면에 시달리는 밤도 많았다. 그가 마음을 기댈 곳은 별로 없었다.

그에게도 몇 사람의 든든한 후원자가 있긴 했다. 그러나 국왕 선조와 여러 대신은 그를 ‘사특하다’, ‘교활하다’, ‘게으르다’며 미워했다. 그런 사실을 알던 이순신인지라 홀로 깊은 외로움에 젖을 때가 많았다.

그는 가족이 그리웠다. ‘온갖 회포에 빠진’ 그는 장계(보고서)를 가지고 올라가는 이경복에게 ‘경의 어미’에게 들러 노자를 전해주라고 부탁할 정도였다. 그는 그녀가 그리웠다.



흠결도 지닌 남편

경의 어미는 이순신의 첩이었다. 경은 이순신이 정읍 현감을 지낼 때 낳은 서자 훈(薰)의 아명이다. 경이네는 부안에 살았다.

1593년 가을, 경의 어미 곧 부안댁은 노자를 전해 받고 이순신에게로 갔다. 한동안 그들은 함께 지냈고, 그러는 새 아이가 또 생겼다. 얼마 후 그녀는 부안으로 되돌아갔다. 이순신이 “꿈에 아들을 얻었다. 경의 어미가 아들을 낳을 징조다”(난중일기, 1594년 9월 16일)라고 쓴 것은 그 때문이다.

그 후로도 이순신은 그녀와 계속 소식을 주고받았다. “경의 어미가 보낸 편지 가운데 사정을 말하기가 매우 괴롭다 했고, 또 도둑이 일어났다고 했다.”(난중일기, 1597년 6월 11일) 이순신이 적탄에 숨지기 1년 전쯤의 기록이다. 이순신은 부안댁과의 사이에 2남2녀를 뒀다. 2남은 훈과 신(藎)으로 무과에 합격했는데,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 때 모두 전사했다.

이순신이 하필 부안댁을 진중으로 부른 까닭은 무엇인가. 아산에 두고 온 본댁, 즉 방씨가 함부로 움직일 수 없어서였다. 방씨는 사당과 묘소를 비롯한 집안 살림을 돌봐야 했다. 게다가 그녀는 쉰을 바라보는 나이였다.
“이순신은 여색을 멀리했다.” 윤휴의 평가는 그러했다. 당시 기준으로는 아마 그랬을 것이다. 한산도의 통제영이나 여수의 좌수영엔 따로 이순신의 첩이 없었다. 다른 장수들은 진중으로 아내를 불러들이거나 첩살림을 차렸다. 심한 경우 군함에도 몰래 여성을 태우고 다녔다. 이순신과는 거리가 먼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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