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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아버지들

예법보다 건강 강조 과거시험 ‘첨삭지도’

‘학문적 자유인’ 박세당의 극진한 아들 사랑

  • 백승종 |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chonmyongdo@naver.com

예법보다 건강 강조 과거시험 ‘첨삭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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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숨보다 예법(禮法)을 중시하던 성리학의 시대였지만, 박세당이 우선시한 건 자식이었다. 성현(聖賢)의 가르침과 예절도 그의 지극한 아들 사랑엔 미치지 못한 듯하다.
예법보다 건강 강조 과거시험 ‘첨삭지도’

사진제공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박세당(朴世堂·1629~1703)은 17세기의 학계를 뒤흔든 풍운아였다. 논란에 휩싸인 그의 저술은 훗날 ‘서계집(西溪集)’(16권 8책)으로 정리됐다. 그중에서도 특히 ‘사변록(思辨錄)’은 논자들의 뜨거운 관심거리였다.

그가 활동하던 시기엔 왜란과 호란의 후유증이 심했다. 그리하여 박세당은 현실 타개책을 심각히 고민했고, 그 과정에서 ‘사변록’이 탄생했다. 책의 내용은 참신했다. ‘놀고먹는 양반을 없애자’ ‘사회개혁을 가로막는 고답적 학문은 더 이상 추구할 가치가 없다’ ‘주자(朱子)도 틀린 점이 많다’…. ‘사변록’의 저변엔 이런 주장이 깔려 있었다.

박세당은 ‘학문적 우상’을 일체 부정했다. 학문적 금기도 거부했다. 당대 성리학자들이 송나라 주희(朱熹)를 신성시하는 분위기를 정면으로 돌파했다. 주희의 학설에 과감히 도전했고, 성리학자라면 누구나 비판하는 ‘노자’ ‘장자’와 ‘불경’도 진지한 학문적 검토 대상으로 삼았다. 결과적으로, ‘이단’의 학설로부터도 많은 가르침을 얻었다. 그야말로 학문적 자유를 실천한 선구자였다.



“仁과 義 끊어야 慈孝 회복”

17세기 한국 사회는 송시열(宋時烈·1607~1689)을 비롯한 정통 성리학자들의 세상이었다. 그들 노론은 성리학의 무오류를 고집하며 박세당의 진취적 학풍을 험하게 비판했다. 박세당과 그의 선배 윤휴(尹鑴·1617~1680) 등에게 그들은 ‘사문난적(斯文亂賊)’, 즉 유교의 가르침을 문란하게 만드는 죄인이라고 낙인을 찍었다.

자연히 박세당의 삶엔 영욕이 교차했다. 그가 세상의 인정을 받을 때도 있긴 했다. 그러나 영예는 짧고, 고통은 길게 이어졌다. 사후까지 심한 모욕이 뒤따랐다.

대학자 박세당. 아버지로서 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서계집’ 제17권엔 세 아들에게 보낸 그의 편지가 여러 장이다. 특히 둘째 아들 박태보(朴泰輔·1654~1689)에게 보낸 편지가 많지만, 일일이 소개하기엔 지면이 허락지 않는다. 이 글에선 박세당이 자식들에게 보낸 몇 통의 편지를 함께 읽으며, 아버지의 애틋하고 깊은 정을 엿볼 뿐이다.

‘도덕경’ 제19장에 따르면 “인(仁)과 의(義)를 끊어야 사람마다 효성[孝]과 사랑[慈]을 회복할 수 있다.” 자연의 이치는 본래 어버이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면 자식은 효성으로 보답하기 마련이다. 중국 고대엔 바로 이 ‘자효(慈孝)’를 인륜의 토대로 삼았다. 공자와 맹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유가들이 순(舜) 임금의 효성을 지나치게 강조하게 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부모가 자식을 진정으로 사랑하는가 하는 문제는 사회적 관심사에서 제외됐다. 고소설 ‘심청전’만 해도 그렇듯, 딸의 목숨을 앗아간 아버지 심 봉사의 욕심은 심판의 대상이 아니었다. 유교 사회는 자식의 행동만 감시했다. ‘효성을 다하는가’만 문제 삼았지, 자식에 대한 부모의 무관심과 무책임 따위는 사회적 이슈가 되지 못했다.

이러한 유교 사회엔 권위적이다 못해 폭력적인 가장이 많았다. ‘엄부(嚴父)’가 넘쳐났고, ‘자부(慈父)’는 드물었다. ‘도덕경’에서 “인(仁)과 의(義)를 끊어야”, 곧 유교를 물리칠 때 “효성[孝]과 사랑[慈]을 회복할 수 있다”고 말한 것은 그래서 일리가 있는 지적이었다.



곡하지 말라, 책 읽지 말라

도교에도 이해가 깊었던 박세당은 결코 엄한 아버지가 아니었다. 대다수 성리학자가 목숨보다 예법(禮法), 즉 크고 작은 예절을 중시하는 풍조가 만연하던 시대의 한복판에서 그는 예절보다 자식의 건강을 챙겼다. 자식의 목숨이 성현(聖賢)의 가르침보다 단연 우선이었다.

‘그런 생각쯤이야 누구나 할 수 있지 않았을까.’ 혹자는 이렇게 반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17세기 후반의 지체 높은 양반들이 박세당처럼 생각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설사 속생각이 그러했더라도 글로 적어 여보란 듯 후세에 전한다는 건 기대조차 할 수 없었다.

1666년 박세당이 상중(喪中)의 아들들에게 보낸 편지를 보자. 유교, 곧 ‘인의지학(仁義之學)’에 매이지 않는 그의 초연함이 뚜렷이 드러난다. 사랑이 넘치는 자애로운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태보(泰輔)는 두통으로 자주 고생하고, 너(큰아들, 박태유)는 또 목이 쉬는 실음증(失音症)과 숨이 가쁘고 헐떡거리는 데다 기침을 계속하는 천촉증(喘促症)에 시달린다 하니, 내 걱정이 끝도 없다. 실음증은 큰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천촉증은 상중인 네 건강을 몹시 걱정하게 하는 증세가 틀림없다. 무리하게 책을 읽지 마라. 그리고 네 원기가 부족하니, 아침저녁으로 소리 내어 울고 곡하는 것도 그만두어라. 자식이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은 곡하고 우는 데 달려 있지 않다. 너는 이 점을 꼭 명심하기 바란다.


그 무렵 박세당은 아내 의령 남씨를 잃고 슬픔에 젖어 있었다. 아들들은 어머니의 묘소를 지키며 남은 효성을 다하고 있었다. 박세당은 아들들이 지나치게 상심한 나머지 건강을 잃어버린 것을 크게 염려했다. 조선시대엔 상장(喪葬)의 예절을 지나치게 엄격히 고집하다가 목숨을 잃는 경우도 있었다. 인종(재위 1544~1545)만 해도 부왕의 상중에 사망했다. 그런 사실을 모를 리 없었던 박세당은 아들들에게 무슨 변고라도 일어날까봐 걱정이 태산 같았다. ‘예법도 무시하라’ ‘독서도 중지하라’는 아버지의 따뜻한 음성이 특별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숙명 같은 가난

세상과 뜻이 맞았더라면 이 한 가지 걱정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박세당은 주류가 아니었다. 학문의 자유를 지향하는 그의 사상적 취향으로 보나, 그의 집안이 속한 소론의 처지로 보나 벼슬과는 한참 멀었다.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전토가 없지 않았으나 전쟁의 참화를 겪은 지 오래지 않아 대체로 황폐했다. 게다가 그때는 기후마저 고르지 못해 소출이 적었다. 박세당은 자주 끼니를 염려하는 처지였다.


생계가 곤란해서 매우 염려스럽다. 하지만 걱정해도 소용없는 일인 줄 알고 있다. 더는 아무 생각도 않으려 한다.


박세당은 1666년 아들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가난의 고통을 털어놓으며 체념한 것 같은 태도를 보였다. 후대의 실학자 이익이었다면 황무지에 콩이라도 열심히 심고 가꿔 두부도 만들어 먹고 콩죽이라도 끓여 끼니를 해결할 방도를 찾았을 것이다. 정약용 같으면 텃밭에 과실나무도 심고 원예작물이라도 가꿀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박세당의 머리엔 그런 현실적 해결책이 좀체 떠오르지 않았다.

박세당은 가난을 벗어날 수 없는 숙명으로 여겼다. 굶주린 배를 끌어안고서도 이른바 탐심(貪心)에 휘둘리지 않고 참아가는 것, 그 밖의 뾰족한 방법을 알지 못했다. 그런 점에서 그는 빈곤에 시달리던 조선시대의 허다한 유생들과 전혀 다름이 없었다. 1677년 10월 12일, 49세의 박세당은 큰아들 박태유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다.
 

종이 돌아오는 편에 가져온 편지를 잘 받았다. 네가 (새어머니를) 시봉(侍奉)하며 잘 지내고 있는 줄 알게 되어 내 마음이 편해졌다. 그런데 생계의 곤란함은 너나 나나 마찬가지라서 몹시 걱정스럽고 걱정스럽구나. 이 세상의 이러한 근심거리가 과연 언제쯤이면 사라질까. 머나먼 상고시대, 평화롭게 살며 초가집 처마 밑에서 배를 두드리며 사시던 분들이야 우리처럼 쓸데없는 생각 때문에 마음을 어지럽히실 일이 없으셨으리라.


가을걷이가 끝난 지 얼마 안 된 시점이었다. 그런데 벌써 식량이 다 떨어졌는지 박세당의 입에서 가난 타령이 흘러나왔다. 그 무렵 그는 당쟁을 피해, 조상이 물려준 약간의 전답이 있는 양주 석천동으로 옮겨 살았다. 한때 지방관으로 다시 부임해 흉년으로 고생하는 백성들을 구휼하기도 했지만, 그는 석천동에 머물 때가 많았다. 종을 데리고 손수 농사지어 식량을 마련하고, 학문을 연구하는 것으로 그는 만족했다. 가난은 그의 일생을 끈질기게 따라다녔다. 1682년 2월 12일에도 아들에게 편지를 보내 춘궁기의 곤란을 호소했다.


이곳의 아비는 그럭저럭 지내고는 있다. 양식은 장작을 팔아서 겨우 마련하고 있다마는 과연 오래 버틸 수 있을는지 모르겠구나.


본래가 허세라곤 모르는 진솔한 사람, 박세당은 때로 장성한 아들들에게 자신의 경제적 무력감을 여과 없이 드러내며 고통을 말했다. 솔직한 한탄과 걱정이 더러는 최상의 위로가 될 수 있다는 점을 그는 알았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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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 |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chonmyongd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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