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9월호

<새 연재> 현직 외교관이 쓴 韓中 5000년

황허의 거센 물결 한족에 맞선 고조선

한(漢)·흉노 전쟁과 동아시아

  • 백범흠 | 駐프랑크푸르트 총영사, 정치학박사

    입력2016-08-23 13: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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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9년 건국한 중화인민공화국(People´s Republic of China)은 1982년 이래 영토 및 국민 통합을 위해 현재의 중국 영토 안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실을 모두 중국사로 간주하는 ‘통일적 다민족 국가론’을 채택했다. ‘중국’은 100여 년 전만 해도 ‘만주족을 멸망시키고 한족을 부흥시키자’는 멸만흥한(滅滿興漢)을 부르짖던 한족 유일주의 국가였다. 그런 나라가 국가적 필요에 따라 역사관을 하루아침에 뒤집어버린 것이다. 한국, 몽골 등을 겨냥해 동북공정(東北工程), 티베트를 겨냥해 서남공정(西南工程), 중국 안의 위구르를 겨냥해 서북공정(西北工程)이라는 역사전쟁을 벌인다.

    ‘통일적 다민족 국가론’과 역사공정은 공격적 현실주의가 발현한 것이다.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 역사는 물론 몽골, 베트남의 역사 일부가 중국사에 포함됐다. 한때 강력한 국가를 건설했으나 중국사의 일부로 편입된 티베트와 위구르의 역사도 같은 처지다.

    중국의 억지 논리대로라면 당나라 시기 위구르족의 뤄양(洛陽) 대학살이나 여진족 금(金), 몽골족 원(元)의 중원 침공전은 내전으로 성격이 바뀐다. 북송(北宋)의 악비(岳飛)나 남송(南宋)의 맹공(孟珙)은 각기 여진과 몽골의 침공에 저항한 한족의 민족 영웅이 아니라 통일을 방해한 장수로 설명돼야 한다. 몽골 고원에서 시작해 중앙아시아를 거쳐 소아시아와 발칸 반도로 이주해 중동-북아프리카 대제국을 건설한 터키의 역사도 산산조각이 난다.

    한국이 중국의 억지 논리를 차용하면 함경남·북도와 평안북도 대부분을 영토로 삼은 거란족의 요사(遼史), 여진족의 금사(金史)는 물론, 몽골족의 원사(元史)까지 한국사의 일부라고 주장할 수 있다. 더구나 거란, 여진, 몽골은 한족 계열이 아니라 우리와 같은 알타이 계열의 민족 아니던가. 특히 금나라는 황족 완안씨(完顔氏)의 핵심 세력이 한반도 출신 김씨이며, 발해 대씨(大氏)가 황비족이었다. 그렇지만 금사, 요사, 원사를 우리 역사에 포함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다. 금, 요, 원은 우리 민족의 원줄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중화문명의 팽창

    한족(漢族)은 인종적 개념이 아니다. 동일한 언어와 문자, 즉 한어(漢語)와 한자(漢字)를 사용하는 이들을 가리키는 문화적 개념이다. 보하이만(渤海灣) 유역의 랴오닝(遼寧)성, 허베이(河北)성, 산둥(山東)성 한족과 창장(長江) 이남 저장(浙江)성, 푸젠(福建)성, 광둥(廣東)성 한족은 혈연적으로는 거의 관계가 없다. 한족 숫자가 12억 명 넘게 늘어난 것은 4000년 중국 역사가 한족과 이민족 간 이질혼합을 통한 팽창의 연속이었기 때문이다.

    춘추전국시대 적족(원시 터키족)이 지금의 허베이성 성도 스자좡(石家莊)을 중심으로 중산(中山)이라는 나라를 세웠다가 전국시대이던 기원전 3세기 조(趙)나라의 공격을 받아 멸망했다. 기원전 12, 13세기에 시작된 주(周)나라 시기 황허(黃河) 이북 상당 부분은 적(狄), 융(戎), 맥(貊), 원시 선비족(鮮卑族) 등 북방민족이 거주하던 땅이었다. 즉, 적족이 조와 제(齊), 연(燕) 등 한족 국가 사이에 나라를 세운 게 아니라, 화하족(한족)이 북방민족이 살던 땅을 야금야금 침탈해 국가를 건설한 것이다. 중국, 즉 중화문명은 세 갈래 방법으로 팽창했다.

    첫째, 주(周) 이후 역대 왕조가 유력한 제후들을 변경에 분봉해 이민족을 정복하게 했다. 이민족 거주 지역에 성읍(城邑)이라는 거점을 마련하고 세력을 확장해간 것. 지배민족인 한족의 수가 상대적으로 적었으나 시간이 가면서 수적으로는 다수이나 경제·문화적으로 열등한 주변 민족이 한족에 동화했다. 산둥성의 제와 허베이성의 연이 황해 연안 래이(萊夷)와 원시 선비족 일부를 흡수하고, 산시성의 진(晉)이 적족을 흡수한 것이 이 같은 경우다. 스페인과 루마니아 등을 로마화(라틴화)한 로마인, 중동과 북아프리카 대부분을 아랍화한 메카-메디나의 아랍족도 한족의 경우와 행태가 유사하다.

    둘째, 진(秦)이나 초(楚), 오(吳)와 같은 창장 유역의 토착세력이 스스로 한족화했다.

    셋째, 진(晉)이나 연과 같이 문화적으로 우월한 한족이 원시 선비족이나 원시 터키족 등 이민족과 섞여 살면서 이들을 동화했다.



    國과 家의 탄생

    기원전 1052년 산시(陝西)성을 근거로 한 무왕(武王) 희발(姬發)과 군사(軍師) 강상(姜尙)이 지휘하는 주나라와 소방(召方), 강(羌), 촉(蜀), 용(庸), 팽(彭), 미(微) 등의 동맹군 40만 명이 황허의 흐름을 타고 내려가 황허 중류 나루터인 허난(河南)성  맹진(孟津)까지 진출했으나 상(商)나라 군에 패해 회군했다.

    소방은 상나라의 침략을 받아 영토의 일부를 빼앗긴 적이 있으며, 오늘날 쓰촨(四川)성과 칭하이(靑海)성 등에 잔존한 강족은 상나라에 노예로 잡혀 제물이 되곤 하던 부족으로 주나라의 외가였다. 희발의 증조모는 태강(太姜)이라 하는데 강족 출신이다. 시안(西安) 근교 풍(豊)을 수도로 한 주나라는 상나라가 산둥과 화이허(淮河) 유역 등 동방에만 관심을 쏟고 있는 점을 노렸다. 그러나 주나라 군은 고도로 발전한 청동 무기로 무장한 상나라군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주나라 군은 일단 후퇴했다가 2년 후인 기원전 1050년 오늘날의 후베이(湖北)성과 쓰촨성 지역에서 번성한 삼성퇴·금사(三星堆·金沙) 문화라는 고도의 청동기 문화를 배경으로 한 촉, 용, 팽 등 부족들과의 동맹을 강화해 다시 상나라 정복에 나섰다. 주나라 동맹군 50만은 이번엔 황허 도하에 성공했으며, 허난성 서북부에 자리한 상나라의 수도 은(殷)의 교외 목야(牧野)까지 진격했다.

    주나라 동맹군은 목야에서 상나라군 70만과 대회전을 벌여 상나라 군을 대파하고 은을 점령했다. 노예가 대부분이던 상나라 군이 창을 거꾸로 잡았기 때문이었다. 상나라 왕 주(紂)는 자결했으나, 그의 아들들인 녹보(祿父)와 개(開)는 살아남았으며, 상나라의 군사력이나 경제력도 큰 손실 없이 유지됐다.

    주나라는 유력한 동맹 부족들과 함께 상나라라는 대규모 영토를 갑작스럽게 획득했기 때문에 전후 처리를 일방적으로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친족이나 상(商)의 후예를 포함한 유력 부족들로 하여금 지방을 다스리게 하는 방식을 취했다. 이른바 봉건제도를 시행한 것이다. 최고통치자인 주나라 왕이 △왕가와의 친밀도 △군공(軍功) △봉지(封地)의 군사전략적 중요성 등을 고려해 공(公), 후(侯), 백(伯), 자(子), 남(男) 등 작위와 봉토를 나눠줬다. 그중 후작이 가장 많았던 까닭에 나중에 제후(諸侯)라는 말이 통용된다.



    양샤오문화보다 1000여 년이나 빠른 기원전 6000년경 내몽골 츠펑(赤峰) 일대에서 적석총(積石塚), 빗살무늬토기, 여신상 등 신석기 훙산(紅山)문화를 중심으로 한 랴오허 문명이 탄생, 확대됐다. 한반도에서 자주 발견되는 적석총이나 빗살무늬토기 같은 것은 황허 문명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랴오허 문명 고유의 유물이다. 기원전 2333년 건국됐다는 고조선도 랴오허 문명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측된다.

    하나라가 뤄양 지역을 통치할 때 상(商) 부족은 뤄양 동북지방에서 세력을 강화했다. 상 부족은 이주를 거듭하다가 허난성 상추(商邱), 즉 박(亳)에 정착한 이후 하나라에 대한 공납을 중지할 정도로 강대해졌다. 기원전 1751년 탕(湯)이 이윤(伊尹)의 도움을 받아 하나라의 마지막 왕 걸(傑)을 멸하고 상나라를 세웠다. 상나라가 하나라를 멸망시켰다는 사실은 화하족(한족)과는 다른 계통인 동이족이 점차 세력을 확장해 황허 중류까지 장악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상나라는 탕왕에서 주(紂)왕까지 32대나 이어졌다. 상나라가 하나라를 멸망시켰지만 체제 변혁은 일어나지 않았다. 따라서 하나라와 상나라는 유사한 계통의 문화를 가진 것으로 추정된다. ‘탕(湯)’은 음가(音價)로 볼 때 ‘양(陽)’과 동일하며, 태양신으로 해석된다. 탕은 수신(水神)으로 보이는 이윤의 지원을 받아 상나라를 건국했다.

    상나라 건국설화는 태양신의 아들 해모수(解慕漱)가 수신(水神) 하백(河伯)의 딸 유화(柳花)와 야합(野合)해 알(卵)의 형태로 추모(鄒牟)를 낳고, 추모가 고구려를 건국했다는 고구려 건국 설화와 유사한 점이 있다. 탕의 선조인 설(契)의 어머니 간적(簡狄)은 제비알을 삼키고 쇠를 나았다. 따라서 상나라는 새(鳥)를 토템으로 하는 부족이었음을 알 수 있다.

    새 토템은 태양 숭배사상과 통한다는 점에서 상나라 건국설화는 추모설화는 물론 혁거세 및 알지설화와 통하는 점이 있다. 또한 상나라는 태양빛과 통하는 흰색을 숭상했다. △태양 △흰색 △난생(卵生)설화가 모두 나타나는 점들로 비춰볼 때, 상나라는 동이족이 주체가 돼 건국한 나라가 확실해 보인다. 상나라가 한자의 기원이 된 갑골문자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동이족이 한자를 만들었다”라는 주장은 근거가 있다.



     고조선에 닥쳐온 시련

    시안 인근 호경(鎬京)을 수도로 하던 주나라(西周) 마지막 왕 유왕(幽王)은 총애하는 후궁 포사(褒姒)가 낳은 왕자 백복(伯服)으로 하여금 세자 의구(宜臼)를 대신하게 하려다 의구의 외가 신(申)나라의 저항에 직면했다. 기원전 771년 유왕이 의구를 세자 자리에서 폐하자 신후(申候)는 견융(犬戎), 서이(西夷), 증(繒)나라 등과 함께 거병해 유왕을 축출했다. 원시 티베트계(또는 원시 터키계)로 추정되는 견융의 군대가 수도 호경을 약탈했다. 견융군은 수도를 탈출한 유왕을 추격한 끝에 호경 근처의 여산(驪山)에서 붙잡아 그와 백복을 죽였다. 주나라는 이때 사실상 멸망했다.

    신후를 비롯한 여러 제후에 의해 옹립된 의구, 곧 평왕이 기원전 770년 낙읍(뤄양)으로 도피해 나라를 이어갔다. 낙읍(洛邑) 천도(遷都) 이후의 주나라(東周)는 제후들을 통제할 힘을 상실한 명목상의 종주국에 불과했다. 정(鄭), 위(衛), 노(魯), 채(蔡), 괵(虢) 등 중원의 제후국보다는 오히려 외곽인 동부 산둥의 제, 산시(山西)의 진(晉) 산시(陝西)의 진(秦) 등이 강화해갔다. 후베이의 초(楚), 충칭-쓰촨의 파(巴), 촉(蜀), 창장 하류의 오, 월(越) 등은 화하 문명 바깥에서 별도로 발전해가고 있었다.

    기원전 600년을 전후한 춘추시대 중기 이후 진(晉)과 제 등 제후국들은 군대를 동원해 인근 약소국을 멸망시킨 뒤 그곳에 군·현(郡縣)을 설치해 영역을 확대하기에 이르렀다. 진(晉), 진(秦), 제, 초 등의 대국들은 군현제를 도입하면서 영토국가로 발전했다. 성읍(城邑) 몇 개 정도가 아니라 수만~수십만㎢에 달하는 영토를 확보한 이들 대국은 지방을 군과 현으로 나눠 장악력을 높여나갔다. 새로 설치된 군·현은 유력한 가신들에게 분배됐다. 가신들은 새로 설치된 군·현을 거점으로 삼아 무력 기반을 갖췄기에 약소국의 멸망이 진행될수록 그들의 세력도 커져갔다. 특히, 진(晉)과 제, 노 등에서 이러한 현상이 두드러졌다.

    가신들은 잦은 전쟁을 계기로 군권을 장악하면서 권력의 전면에 등장했다. 권력과 경제력을 이용해 봉토를 확대하고, 봉토 내에서 토지제도, 조세제도, 군사제도를 개혁해 세력을 강화했다. 기원전 376년 산시성의 초강대국 진(晉)이 유력한 가신들인 조(趙), 위(魏), 한(韓) 3가(家)에 의해 분할돼 멸망하고 말았다.

    진(晉)이 멸망함으로써 중원 통일은 변경에 위치한 비화하적(非華夏的) 강대국 진(秦)과 초(楚)의 쟁패로 판가름 나게 됐다. 춘추전국시대 이후 한문명과 한족의 외연은 더욱 확장된다. 한문명과 한족은 황허 유역을 넘어 롼허(灤河), 다링허, 랴오허 유역으로 밀려들기 시작했다.

    허베이성 동북부 베이징 부근을 도읍으로 하는 연나라의 등장은 고조선에 큰 시련을 안겨줬다. 중국식 도씨검(桃氏劍)과는 다른 비파형 동검과 다뉴세문경(多紐細紋鏡) 등을 사용하던 고조선은 일단 롼허를 경계로 연나라에 맞섰다.    



    部와 落의 등장 

    춘추시대인 기원전 7세기, 동으로는 만주와 한반도 북부, 서로는 아랄해, 남으로는 산시성 중북부-오르도스-간쑤성을 경계로 하는 흉노(Xiongnu)가 유목 민족 스키타이로부터 철기를 받아들이면서 강력해졌다. 흉노는 하나의 종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몽골을 중심으로 건국된 알타이계 중심의 고대 유목국가를 말한다. 흉(匈)은 슝(Xiong)에서 따온 음차(音借)로 슝은 원시 터키어로 사람이란 뜻이며, 노(Nu)는 나(那), 내(內)와 같이 물가에 있는 땅을 의미한다. 흉노란 ‘물가에 사는 사람’이라는 뜻인데, 한족이 ‘슝누’를 음차하면서 나쁜 뜻을 가진 흉(匈)과 노(奴)를 갖다 붙인 것이다.

    한족은 이민족과 관련된 것에 의도적으로 나쁜 뜻의 문자를 음차했다. 개라는 뜻의 견융(犬戎), 벌레라는 뜻의 남만(南蠻)이 대표적이다. 흉노의 지도자인 선우(單于)의 정식 명칭은 탱리고도선우(撑犁孤塗單于)로 음차되는데, ‘하느님(tengri)의 아들(고도)인 지도자(선우)’ 즉, 천자(天子)라는 뜻이다. 텡그리(檀) 임금(君)이라는 뜻의 단군(檀君)도 선우와 같은 뜻이다.

    흉노는 물과 풀을 찾아 자주 옮겨 다녀야만 하는 유목생활의 특성상 가까운 혈연끼리 적당한 규모의 집단을 형성했다. 한족은 이것을 ‘부(部)’라고 불렀다. 1부는 5000~1만5000명 규모로 이뤄졌다. 부의 아래에는 조금 더 작은 규모인 ‘락(落)’이 있었다. 부와 락을 합해 오늘날에도 사용되는 ‘부락’이라는 말이 만들어졌다.

    황허를 중심으로 한 한족의 나라 한나라와 만주-몽골-중앙아시아를 중심으로 한 흉노 간 길고도 거대한 전쟁의 분위기가 무르익어가면서 고조선과 부여 등 우리 민족 국가에도 도전과 변화의 세찬 물결이 밀려들었다. 황허의 거센 물결을 맞은 고조선은 한족의 침공에 대비하기 시작했다.

    백 범 흠



    ● 1962년 경북 예천 출생
    ● 연세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정치학박사
    ● 駐중국대사관 총영사
    ● 現 駐프랑크푸르트총영사관 총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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