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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직 외교관이 쓴 韓中 5000년

행성<行星> 거느린 항성<恒星> 고구려 132만 수나라 대군 무찌르다

  • 백범흠|駐프랑크푸르트 총영사, 정치학박사

행성<行星> 거느린 항성<恒星> 고구려 132만 수나라 대군 무찌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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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궐의 동·서 분열

동돌궐 타파르 가한은 양견이 북주를 찬탈한 581년 사망했다. 가한의 자리를 두고 타파르의 동생 다로빈과 아들 안로가 분쟁을 벌였다. 타파르는 다로빈을 가한으로 지명했으나, 돌궐 의회(Toy)는 다로빈의 생모가 돌궐족이 아니라는 이유로 다로빈의 가한 계승을 거부했다. 장로들이 안로를 후계자로 지명하자 이번에는 다로빈이 안로의 가한 계승을 반대하고 나섰다. 결국 안로는 삼촌 이쉬바라(沙鉢略)에게 양보하고 제2 가한 칭호에 만족한 채 정치에서 물러났다. 가한이 된 이쉬바라는 다로빈에게도 아파 가한이라는 칭호를 줘 내정의 안정을 기하고자 했다.

양견은 강남의 진(陳)을 정벌하려면 먼저 북방의 돌궐 세력을 꺾어놓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양견은 서돌궐의 타르두에게 접근해 그를 돌궐 가한으로 칭하고 동돌궐 이쉬바라 가한에 대항하는 동맹을 모색했다. 이쉬바라를 고립시키는 데 성공한 양견은 583년 양상(楊爽)을 총관으로 하는 대군을 동원해 동돌궐군을 격파했다. 유주총관 음수(陰壽)는 보기(步騎) 수만을 이끌고 유주의 호용새(虎龍塞)로 나가 북제의 유장(遺將)으로 다링허 중류 유성(柳城)을 근거로 하던 고보녕을 격파했다.

장손성(長孫晟)은 이쉬바라 가한과 갈등하던 다로빈을 꾀어 수나라에 항복시켰다. 이쉬바라는 다로빈이 수나라에 항복하자 군대를 보내 다로빈의 근거지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그의 어머니를 죽였다. 다로빈은 서돌궐로 도망해 타르두와 함께 이쉬바라를 공격했다. 타르두는 582년 이쉬바라의 가한 지위를 더 이상 인정하지 않는다고 발표했으며, 이에 따라 돌궐은 동·서로 완전 분열했다. 내전 끝에 타르두에게 패한 이쉬바라는 584년 수나라에 항복하고, 칭신(稱臣·스스로 신하라고 자처함)했다.

수나라는 이로써 마음 놓고 진나라를 공격하게 됐다.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이후인 601년 서돌궐의 타르두가 대군을 이끌고 장안을 위협했으나, 장손성이 격퇴했다. 서돌궐은 603년 철륵부족의 반란을 계기로 분열했으며, 타르두는 근거지를 모두 잃고 칭하이(靑海) 지역으로 도주하다가 자결했다. 툴란(都藍)에 이어 동돌궐 가한이 된 계민(돌리)은 서돌궐의 공격이 계속되자 부족을 이끌고 수나라에 투항했다.





수-고구려-동돌궐 ‘힘의 균형’

당시 롼허-다링허-랴오허로 이어지는 랴오시-내몽골 동남부 일대는 수, 고구려, 거란·해(奚), 돌궐 등 여러 세력의 각축장이었다. 수나라는 거란족·해족을 영향권 내에 끌어들이는 등 랴오시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했다. 이에 따라 돌궐뿐 아니라 고구려도 위축됐다.

돌궐이 동·서로 분열(582년)된 후 동돌궐의 이쉬바라 가한은 고구려에 동맹을 요청했다. 고구려와 동돌궐은 이해관계가 일치하자 수나라를 공동의 적으로 삼고 협조 체제를 유지했다. 그 결과 수-고구려-동돌궐 간 ‘힘의 균형’이 어느 정도 유지돼 고구려에 대한 수나라의 위협도 줄어들었다.

고구려는 평원왕(559~589) 시기에 국내성, 평양성 세력 간 벌인 내전의 상처를 치유하고 국력을 회복했다. 중국이 북제·북주로 분열해 있던 때다. 평원왕을 계승한 영양왕(589~617)은 수나라에 공세적으로 대응했다. 양광, 즉 양제(煬帝·605~616)가 즉위한 다음에도 고구려와 수는 한 동안 우호관계를 유지했으나 607년 8월 양제가 계민 가한의 장막에서 고구려 사신과 조우한 것을 계기로 고구려와 수나라 간 갈등이 고조됐다.

고구려 사신과 조우한 양제는 우홍(牛弘)으로 하여금 고구려 사신에게 영양왕의 입조를 요구하고, 이를 거부할 경우 정벌도 불사하겠다고 위협케 했다. 고구려는 수나라의 협박을 무시하고 백제와 신라를 공격했다. 이를 전후해 속말 말갈 추장 돌지계(훗날 신라에 쳐들어온 이근행의 아버지)가 무리를 이끌고 수나라에 투항했다. 거란 출복 부족도 수나라에 투항했다. 고구려는 더 이상 수나라의 팽창을 바라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598년 2월 영양왕은 1만여 말갈 기병을 지휘해 요충지 영주(랴오닝성 차오양)를 공격했다. 

이에 맞서 수나라가 고구려 정벌에 나섰다. 수나라군 외에 돌궐, 거란·해, 물길, 고창(高昌) 등 외국군도 전쟁에 동원됐다. 양제가 군사적 모험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은 문제(양견) 이후 수나라의 경제력, 군사력이 급속히 팽창한 덕분이다. 인력을 효율적으로 활용, 투입할 행정 능력을 갖춘 게 국력 상승의 뒷배가 됐다. 호적에서 누락됐던 호구를 등재해 이전 통계로는 40만 명에 불과하던 장정 수가 200만 명까지 증가했다.

호구 수 증가에 따라 조세 수입도 급증세를 보였다. 호구 수는 문제 초기 400만 호에서 진나라의 64만 호를 흡수함으로써 464만 호에 이르렀다. 호구 수는 양제 즉위 초 다시 890만 호로 급증했다. 890만 호는 당 현종 시기 900만 호를 돌파하기까지 수-당대 최대 호구였다. 수나라는 진나라를 멸망시킴으로써 강력한 강남 해군도 손에 넣었다. 양제는 610년 해군력 증강의 성과를 시험해보고자 류큐(오키나와)를 침공해 7000명을 사로잡았다.

백제 무왕은 이 같은 대륙의 정세 변화를 읽고 사신 국지모(國智牟)를 파견해 수나라의 고구려 정벌에 협력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백제는 그간 고구려와 수나라를 놓고 끊임없이 저울질했다.



행성<行星> 거느린 항성<恒星> 고구려 132만 수나라 대군 무찌르다

을지문덕 장군 영정.[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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