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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오르는 한국경제 간판 CEO 열전|박인구 동원 F & B 사장

먹거리로 1조 매출 도전하는 맛의 전도사

  • 장인석 < CEO전문리포터 > jis1029@hanmail.net

먹거리로 1조 매출 도전하는 맛의 전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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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원F&B 박인구 사장은 전형적인 대기만성(大器晩成)형 CEO다. 고교 선생, 상공부 공무원을 거친 뒤 늦은 나이에 기업체로 자리를 옮겼음에도 내실경영으로 업계에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식품산업은 소비자의 혀끝을 만족시켜야 하는 첨단산업”이라는 박사장. 그래서 매출액 5000억원이 넘는 대기업의 CEO지만 잠시도 긴장을 늦출 수가 없다고 한다.
박인구(朴仁求·55) 사장은 별 특징이 없는 사람처럼 보인다. 작은 키에 평범한 얼굴, 조용한 목소리, CEO라면 으레 갖고 있을 법한 카리스마나 권위, 위엄도 별로 보이지 않는다. CEO로서의 대외활동이나 업적도 그리 화려하지는 않다. 그러다보니 그가 속한 회사에 견주어 그의 이름 석자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회사를 운영하는 평범한 사장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그가 동원F&B의 사장을 맡은 지 1년, 그간의 경영 성적표를 보면 그를 그저 조용하고 평범한 사장으로만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수출로 돌파구 열어

동원F&B는 모기업인 동원산업에서 분리해 나온 식품전문회사다. 동원산업은 참치잡이에 전념하고, 동원F&B는 식품을 생산 판매하는 회사로 지난해 분리됐다. 참치캔과 양반김 등을 생산 판매하는 회사라면 쉽게 이해가 된다.

“상호의존하는 경향에서 벗어나 핵심역량에 치중하는 것이 IMF를 겪고 난 후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는 길이라고 판단해서 분리한 것이죠. 아시다시피 동원산업은 수산업에 관한 한 세계 1, 2위를 다툴 정도의 기업이므로 큰 문제가 없지만 저희 회사는 이익이 박하고 경쟁이 치열한 식품전문회사라 분사할 때 잘될 수 있을까 하는 우려를 많이 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동원정밀이란 중소기업에서 CEO로서의 능력을 인정받아 동원F&B의 초대사장이 된 박인구 사장은 그러나 ‘다행히’ 직원들의 노력으로 분사 초기에 겪는 어려움을 극복하고 기반을 잡아가고 있다고 자신감을 표명한다. 시장점유율 70%인 동원참치 외에도 햄, 먹는 샘물, 김치, 김, 생면 등 주력사업 품목이 40여 종에 이르는 동원F&B의 올해 예상 매출액은 5500억원. 경기를 타지 않는 식품업이지만 내년에도 비슷한 규모의 매출목표를 잡을 정도로 그의 경영스타일은 ‘보수적’이다. 사람의 입은 정직해 함부로 속일 수 없으며 무리한 매출 확대보다는 소비자의 올바른 평가를 받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신조에서다.

동원F&B는 만성적자에서 벗어나 올해 200억원의 경상이익을 바라보고 있다. 적자에 시달린 것은 동원산업에 속해 있던 기간 설비투자가 많았던 탓도 있으나 식품산업이 갖는 저수익성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인구 사장은 ‘식품산업도 수출산업’이라는 지론으로 수출에 주력해 올 연말이면 5000만달러의 수출 목표를 달성할 계획이다. 중국시장에 내보낸 참치크래커의 인기가 좋고, 일본에선 고양이밥과 양반김, 유럽에선 게맛살이 선전하고 있기 때문. 박사장은 내년에는 7000만달러 수출을 예상하고 있는데, 아직 참치캔이 미답지역인 중국시장만 개척한다면 노다지를 캐는 땅이 될 것이고, 수출시장으로서 동북아의 전망은 밝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박사장은 수익을 올리고 수출상황이 호전된 것보다는 회사 내부의 달라진 모습을 가장 큰 성과로 꼽았다.

“사실 직원들이 많이 동요하고 걱정했어요. 동원이란 회사는 내실을 중요시하고 변화도 서서히 이루어나가는 견실한 기업입니다. 그런 동원에서 회사를 분사시키며 알아서 먹고 살라고 하자 잘할 수 있을까 하는 의심도 들었고, 이러다 회사에서 쫓겨나지 않을까 하는 의혹의 눈초리를 보내는 직원들이 많았죠.”

그러나 그는 선두에 서서 솔선수범하며 직원들을 다독거렸다. 처음에는 소극적이었던 직원들도 그가 묵묵히 뒤를 챙기자 신뢰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매출과 이익이 늘어 직원들은 600%의 정기보너스 외에 104%의 성과급을 이미 지급받았고, 이대로 간다면 내년 초에는 다시 100%를 더 받을 것으로 예상한다.

회사는 시스템으로 움직인다

그는 근면 성실하기로 소문난 사람이다. 가난한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나 32세에 행정고시에 합격해 상공부에 입사할 때까지 겪은 고난과 시련 탓에 그에게 성실과 근면함은 몸에 밴 습관과 같다. 그는 직원들에게는 강요하지 않지만 자신은 항상 이면지를 사용한다. 출장갈 때는 기름값을 아끼느라 반드시 카니발을 직접 몰고 간다. 집에선 항상 동원F&B에서 나온 제품을 소비하는데 단 한번도 공짜로 얻은 적이 없고 동네 슈퍼마켓에서 직접 산다. 아무리 할 일이 많아도 저녁 7시반에는 퇴근한다. 자신 때문에 직원들이 눈치보는 걸 꺼리기 때문인데, 일이 많으면 집에 가서 한다.

박사장은 지난 1년간 단 한번도 직원들을 나무라거나 화를 낸 적이 없다고 한다. 그는 김신조가 침투해 제대가 보류된 고참들을 모시고 힘겨운 군 생활을 했는데, 졸병 때 그렇게 맞았어도 고참이 돼서는 단 한번도 졸병을 때린 적이 없다고 한다.

“야단쳐서 회사가 잘된다면 그리 하겠지만 절대 효과가 없어요. 회사는 시스템으로 움직여야 효율이 높은데, 잘못이 생기지 않도록 시스템을 점검해야지 직원들을 꾸짖는다고 달라지지는 않지요.”

대신 그는 영속적인 개혁을 위해 잘못한 간부가 생기면 반드시 메모를 해둔다. 그의 노트에는 깨알 같은 글씨로 적은 잘못된 사례가 가득하다. 모두 시스템을 고치는 자료가 된다고 한다.

그는 비효율적인 조직을 뜯어고칠 때도 직원들을 대상으로 구조조정을 하지 않았다. 식품전문회사에는 판촉여사원이나 순회사원, 행사요원 같은 비정규직 사원이 많은데, 효율이 적은 매장과의 거래를 끊고 이런 사원들을 6개월 정도만 충원하지 않으면 500명 정도는 쉽게 줄어든다고 한다. 이직률이 높기 때문에 신규채용을 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구조조정의 효과가 충분하다는 것이다.

그는 직원들과의 거리를 없애기 위해 현재까지 직접 결재를 받고 있다고 한다. 한번이라도 얼굴을 보고 대화하기 위해서라는데 어느 정도 친해졌다고 생각하면 전자결재로 바꿀 생각이다. 그는 아랫사람과 대화할 때 항상 듣는 편이다. 자신의 생각을 먼저 말하면 아랫사람이 사장의 의견을 따르지 자신의 의견을 제대로 내놓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는 올바른 의견을 경청할 수 없다고 본다. 또한 매주 토요일 오후 직원들과 축구시합을 하는 것도 중요한 행사. 학창시절부터 축구 마니아인 그는 40년간을 한결같이 공을 차 아직도 젊은이 못지않은 체력과 기술을 과시한다. 오른쪽 미드필더로서 공격수의 득점을 어시스트하는 게 그의 몫.

이와 함께 과비용을 제거하고 제값 받기 운동을 벌인 것도 수익을 호전시킨 요인이라고 설명한다. 대형할인점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덤핑 등 저가정책이 도입된 것도 식품회사의 침체를 불러일으킨 요인인데 박사장은 제값을 받기 위해 품질향상에 심혈을 기울인다고 한다.

“예를 들어 ‘양반김’의 경우 한 포장용기에 50장씩 들어가는데 아무리 기계가 한다 해도 사람이 개입된 이상 수십만 개 중 하나꼴로 49장이 들어갈 수도 있지요. 그걸 일본 바이어는 끄집어내 클레임을 겁니다. 불량률 0, 이것이 저희의 모토지요.”

김치만 해도 담당직원이 고추를 직접 고르게 하고 빻는 현장을 감독하도록 한다. 그는 “규격이 없는 ‘생물’이 원자재라 원료 검수과정부터 신경을 쓰는 꼼꼼한 공정을 유지하는 게 ‘높은 질’의 핵심”이라며 “고추를 충북 음성에서 직구매하면서부터 김치 맛이 좋아졌다는 평을 받고 있다”고 자랑한다.

동원정밀에서 4년, 동원F&B에서 1년, CEO로서 그의 경력은 5년에 불과하다. 동원정밀이 중소기업에 불과한 점을 감안하면 대기업 사장으로서 그의 경력은 겨우 1년. 그런 사람이 어떻게 연 매출액이 5000억원이나 되는 기업을 경영할 수 있을까 의심을 품는 것도 그리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그가 겪은 삶의 이력을 짚어보면 그가 어떤 CEO 못지않은 자질을 갖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말단공무원으로 사회생활 시작

그는 성실하고 공부도 잘하는 학생이었다. 초등학교 졸업 후 광주서중에 합격했지만 입학금 1500원이 없어 포기하고 대신 장학생으로 조대부중에 입학했다. 6년간 장학생으로 조대부고를 졸업했지만, 대학 갈 형편이 못돼 9급 공무원이 됐다. 당시 전신전화국에서 전보 및 국제전화 업무를 맡은 것이 첫 사회생활이었다. 몇 개월 근무한 후 3년간 군 복무를 마치고 다시 공무원으로 복귀했지만 고민 끝에 공부를 하기로 하고 조선대 법대에 장학생으로 합격했다. 하지만 강의는 야간에 들었다. 낮에는 일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2년이 지나자 그는 말단공무원 생활이 자신의 인생목표가 아니라는 것을 절감하고 교사가 되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야간에는 교직과목을 이수할 수 없어 고교졸업자들이 응시하는 준교사 자격증 시험에 응시했다. 정치경제학과 교육학을 독학으로 공부해 전남에서 200대1이 넘는 경쟁을 뚫고 혼자 합격했다.

“합격하니까 여기저기서 선생으로 오라고 하대요. 당시 저는 사법고시 예비시험에도 합격한 상태였거든요. 당시에는 대학 3학년 이상이 돼야 사법고시를 볼 수 있고, 2학년까지는 예비시험을 봐서 합격해야 했지요. 동신여고 고3 정치경제과목을 맡았는데, 이 선생이라는 자리가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어요.”

야간대학을 다니던 그는 틈틈이 학원강사로도 활동해야 했다. 장남으로서 집안의 생계를 꾸리던 그는 서울에 유학간 열 살 아래인 남동생의 학비도 책임져야 했다. 4년간 동신여고에 근무하면서 그는 대학원까지 마쳤는데, 마침 조선대에서 조교를 선발하는 시험이 있어 응시, 또다시 수석합격했다. 그러자 총장 비서실로 발령이 났다. 2년만 고생하면 교수의 길이 열리는 기회를 잡은 것이다.

하지만 출근 3일 만에 다시 동신여고로 돌아왔다. 봉급도 박한 데다 당시 총장이 워낙 군대식 군기를 잡는 인물이어서 아침 6시부터 밤 10시까지 강행군의 연속이었기 때문이다. 교수의 길을 포기한 그는 대신 공직을 선택했다. 행정고시에 응시하기로 마음먹은 그는 공부를 위해 서울로 자리를 옮기기로 결심, 공립학교 순위고사에 응시해 또 수석합격했다. 그리하여 미아리 숭덕중학교 윤리선생이 됐고, 행정고시 준비를 위해 담임을 맡지 않았다.

“하하, 담임을 안 맡겠다고 하니까 교장선생님이 놀라더군요. 당시에는 모두 담임을 맡으려고 했으니까요. 담임을 안 맡으니까 오후 3시면 수업이 끝나요. 고려대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주말이면 광주로 내려가 아르바이트로 학원 강사를 했지요.”

그는 하루 서너 시간밖에 못잘 정도로 시간에 쫓기며 살았지만 한번도 고생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오히려 잡초 같은 인생에 재미를 느꼈고, 그 바쁜 와중에도 등산과 축구를 하는 등 여유를 즐겼다고 회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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