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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경 기자의 쇼퍼홀릭

낭만적 결혼과 그 적들

  • 주간동아 기자 ‘holden@donga.com’

낭만적 결혼과 그 적들

낭만적 결혼과 그 적들
대학 여자 후배 한 명이 가을에 결혼한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수많은 연애를 초인적인 이성으로 헤쳐 나오고, ‘보배로운’ 남친들을 떠나보냈으며, 적잖은 연적을 물리치며 살아온, 후회 없는 서른일곱 인생이었다. ‘알파걸’과 ‘골드 미스’가 한참 사회적 문제녀로 떠올랐을 땐-우리는 진정 그녀들을 저출산, 과소비의 주범으로 조명하지 않았나-방송사로부터 출연 제의를 받기도 한, 그 이름도 자랑스러운 전문직 ‘커리어우먼’이기도 했다. 그런 그녀가 어느 날 그녀의 초등학교 동창과 덥석 결혼한다고 말했을 때, 그녀가 ‘소울메이트’라고 말한 신랑이 ‘골드 미스터’는커녕 ‘스뎅’ 밥그릇만도 못해 보여서 솔직히 친정 엄마도 아닌 주제에 참 아까웠다.

하지만 말 그대로 친정 엄마도 아니기에, 청첩장 들고 가서 뷔페 음식이나 실컷 먹으리라 입맛을 다시던 중 후배의 전화를 받았다.

“오, 새 신부, 결혼을 빙자해 매일 쇼핑하겠구나? 부럽다!”

‘참을 수 없이 가벼운’ 나의 인사-이건 무거운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들 나름의 처세법이다-에 후배는 전화를 그냥 끊었나 싶게 말이 없어 당황스러웠다.

“사실은 신랑한테 꼭 받고 싶은 게 몇 가지 있는데, 못 사주겠다고 해서 너무 속상해요. 요즘은 같이 쇼핑 가서 싸우고 들어올 때가 많아요.”

21세기 한국에서 결혼하는 새 신부가 신랑으로부터 받고 싶은 건 동방박사의 선물이 변함없이 몰약과 유황과 황금이고, 어버이날 부모님이 꼭 받고 싶은 것이 늘 현금과 상품권인 것과 마찬가지로 뻔한 것이다.

다이아몬드 반지와 시계와 핸드백, 그리고 한 벌의 예복. 물론 결혼을 하면 신부들이 사야 할 것은 백만 가지가 넘는다. 새로운 가정을 이루는 것은 온전히 하나의 우주를 꾸미는 것과 같으니까. 그러나 이 시대의 신부가 꼭 갖고 싶은 건 네 가지 보물뿐이다.

네 가지 아이템은 훈수 놓는 사람이 많은 한국사회에서 구설을 방지하는 부적이자, ‘결혼 잘했다’는 일종의 ‘시위’이기 때문이다. 결혼에 대한 평가는 이 네 가지 물건으로 수렴된다. 그뿐만 아니라 성공한 결혼이라고 자기최면을 걸기 위해선 눈속임용 소도구도 필요한 것이다.

“일하는 여성에게 신혼여행에서 돌아와 다시 출근하는 날은 결혼식 당일만큼이나 중요한 것 같아요. 전업주부라면 결혼 후 처음 친구들 만나는 날이고요. 잘 테일러링된 슈트에 좋은 가방을 들고 가면 안정된 시작이라는 인상을 주니까요. 그래서 요즘 신부들은 공식적인 모임에서 돋보이게 입을 수 있는 좋은 슈트를 원하고, 가방도 실용적인 빅백으로 많이 받아요. 전에 액운을 막는다며 예물로 받던 빨간 사파이어 등 유색 보석은 하지 않고 다이아몬드 반지 하나에 집중하죠. 대신 평상시라면 가져보기 힘든 ‘꿈의 브랜드’를 선택하는 경향이 뚜렷해요. 샤넬과 까르티에, 티파니가 대표적이죠. 전형적인 예물이라며 싫어하는 사람도 있지만, 여전히 신부라면 받고 싶은 예물이죠.”

TST의 디자이너 오서형씨가 말하는 혼수 쇼핑 트렌드다.(그녀는 드라마 ‘내조의 여왕’에서 갤러리를 운영하는 젊은 사모님 옷을 디자인해 요즘 강남 신부들의 로망으로 떠올랐다.)

한 해 전 결혼한 한 여성은 “또래 동료들끼리 은근히 비교를 한다. 그래서 다른 혼수와 달리 착용이 가능한 반지, 시계, 백, 예복에 ‘올인’을 한다. 나도 신혼여행 비용을 아껴서 원하는 것을 샀다. 결혼이 아니라면 내가 다시 그런 명품을 살 수 있을까? 이것도 일생에 한 번”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사랑스러운 신부가 샤넬백을 사고 싶다고 말하면, 신랑은, 열이면 열, 미래의 마누라가 속물이 아닌지 의심하며, 열에 다섯은 이 여자가 쇼핑중독이 아닐까 끙끙 앓는다. 불행하게도, 그중 두세 명은 이런 소리를 입밖으로 꺼내고야 만다.

“네 허영심 만족시키는 데 그렇게 큰돈을 꼭 써야 해?”

모든 신부는 상처를 받는다. 결혼에 대한 환상은 동네 슈퍼에서 사은품으로 받은 싸구려 컵처럼 지저분하게 깨져버린다. 그러나 정작 신랑의 허영심을 채우기 위해 쓰는 돈도 ‘장난 아니다’. 신랑의 어머니에게는 명품백을 선물해주기를 바라고, 본 적도 없고 별로 고마워하지도 않을 일가친척들에게까지 예단을 돌려야 하며, 신랑 친구들이 2차, 3차 가는 비용까지 내줘야 하고, 그래도 남자 시계는 좋은 걸로 해야 한다고 하며, 어차피 신랑 출퇴근용으로 혼자 쓸 자동차까지 이 기회에 바꿨으면 하는 눈치를 보인다.

그러니, 가을에 결혼하는 신부가 네 가지 보물을 가져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그것들이 신부에게 자긍심이라는 보물의 가치를 갖는다면 말이다. 더구나 두 사람의 사적인 관계를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결혼이라는 사회제도에 맞춰가기로 한 것 아닌가.

아무리 크고 화려한 반지도 신부의 손가락에 끼워진 작은 다이아몬드 반지보다 반짝거리는 것을 보지 못했다. 또 어떤 톱스타가 든 초고가 리미티드 악어백도 신부가 조심스럽게 쥔 핸드백보다 럭셔리하고 의젓해 보이지 않는다. 어떤 아이템들은 가격과 상관없이 인생의 어느 짧은 순간에만 보석처럼 빛이 난다. 그때가 그것을 가져야만 하는 시간인 것이다.

신부에게 결혼식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예물쇼핑이다.

신동아 2009년 8월 호

주간동아 기자 ‘holde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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