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5월호

‘가나안’을 향한 대장정 워싱턴·애틀랜타

‘It’이던 그들, ‘He’가 되고‘She’가 되다

  • 신문수 서울대 교수·미국문학 mshin@snu.ac.kr

    입력2007-05-03 11: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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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국 역사에서 흑인에게 가장 추앙받는 두 명의 인물이 있다. 노예해방을 실질적으로 이끌고 흑인 참정권을 얻어낸 문학자이자 사회운동가인 프레더릭 더글러스, 그리고 ‘I have a dream’이란 명연설을 남긴 마틴 루터 킹 목사다. 노예해방을 넘어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를 외칠 때까지, 그 지난했던 시간들.
    ‘가나안’을 향한 대장정 워싱턴·애틀랜타

    1963년 워싱턴에서 ‘나에게는 꿈이 있다’는 명연설을 하고 있는 마틴 루터 킹 목사.

    2003년 7월 말, 워싱턴은 여름의 열기로 후끈했다. 그리스 신전 모양의 링컨 기념관도, 맞은편에 흡사 우주선처럼 우뚝 솟은 워싱턴 기념탑도, 그 너머 멀리 보이는 국회의사당 돔도 눈부신 햇살에 하얀 신기루처럼 비현실적인 정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포토맥 강변의 제퍼슨 기념관은 일렁이는 강물 덕분인지, 그래도 이들보다는 훨씬 구체적이고 생생한 느낌을 주었다. 제퍼슨 기념관 내벽에 새겨진 글귀를 읽으면서 나는 이 비현실적인 느낌이 작열하는 햇살 탓만은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신의 제단에 맹서컨대, 나는 인간의 정신을 억압하는 어떠한 폭정에도 영원히 적대적일 것이다.”

    이들은 모두 이념의 표상, 곧 상징이었던 것이다. 이들이 표상하는 바, 즉 자유 평등 혹은 민주주의는 미국의 국민적 이념일 뿐만 아니라 적어도 지난 300여 년 동안 근세사의 흐름을 선도해온 푯대였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모든 이념이 그렇듯 미국 사회를 떠받쳐온 이들 또한 역사적 현실에서 볼 때 자기모순이요, 영원한 미완의 추상태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최초의 성공적인 식민지 혁명의 지도자요 서구 민주주의 정치 실험의 주역이던 조지 워싱턴이나 미국 계몽주의 정신의 권화(權化)요 이성적 공화주의자인 토머스 제퍼슨이 노예 소유주였다는 사실이 새삼 그것을 말해준다.



    이런 이념과 현실의 괴리를 실상 수도 워싱턴이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으니, 국부(國父) 워싱턴이 터를 잡고 프랑스인 건축가 피에르 랑팡(Pierre L’Enfant)이 설계한 합중국의 수도가 오늘날 그 노예들의 후손인 흑인의 도시로 탈바꿈돼 있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 그들은 그 이념에 합치되는 민주적 평등 사회의 실현을 외쳐온 수없는 함성이 체화된 존재로서 오늘도 그것을 촉구하며 거기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내셔널 몰(National Mall)을 따라 산재한 이 상징적 기념물들을 돌아보면서 나는 비현실적이고 공허한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기념물의 거대함과 순백의 외양이 어쩐지 이념과 거리가 먼 현실의 실상을 은폐하고 호도하는 베일인 양 낯설어 보인다.

    실상 근래에 주로 흑인문학을 눈여겨보고 있는 나에게 워싱턴은 조지 워싱턴의 도시보다는 주민의 다수를 차지하는 흑인에게 오늘날 그들의 정신적 대부로서 추앙받고 있는 프레더릭 더글러스(Frederick Douglass)의 도시라는 의미가 더 컸다.

    링컨 기념관을 돌아 나와 전면의 워싱턴 기념탑을 바라보면서, 1963년 8월28일 바로 이 계단에서 여기 그들 사회의 심장부를 가득 메운 25만의 군중에게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고 외친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모습이 환각처럼 떠오르는 까닭도 그 때문이리라.

    노예제 폐지 운동가요, 언론인이며, 작가였던 불세출의 흑인 지도자 더글러스가 활동 주무대였던 뉴욕 북쪽 로체스터에서 이곳 워싱턴으로 거처를 옮긴 것은 1872년, 그의 나이 55세 때였다. 그는 1877년 지금은 사적지로 지정돼 있는 아나코스티아 언덕에 집을 사서 세다 힐(Cedar Hill)이라 명명하고, 1895년 사망할 때까지 이곳에서 살았다.

    이런 이유말고도 워싱턴은 더글러스에게 각별한 의미를 지닌 도시다. 만년에 그가 맡은 몇 가지 공직에 워싱턴 지역 연방 보안관과 워싱턴 지역 연방 기록관이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흑인의 대부, 더글러스

    ‘가나안’을 향한 대장정 워싱턴·애틀랜타

    미국 저항운동의 아버지이자 흑인 문학의 창시자인 프레더릭 더글러스.

    프레더릭 더글러스는 누구인가? 그는 무엇보다 ‘프레더릭 더글러스의 인생 이야기’(Narrative of the Life of Frederick Douglass, an American Slave, Written by Himself, 1845)의 저자다.

    더글러스는 적지 않은 분량의 저술을 남겼지만, 100여 쪽에 불과한 이 조그만 책자야말로 그를 무명의 탈주 노예에서 오늘날 미국 흑인문학 전통의 창시자요 저항운동의 아버지로서 흑인은 물론 백인에게도 존경받는 존재로서 우뚝 서게 만든 일등공신이다.

    노예제의 사슬에 묶여 있던 볼티모어에서 북부 뉴욕으로 탈출해 자유를 찾기까지 흑인 노예로서 자신의 고달픈 삶의 행로를 담은 이 자전적 이야기는 1845년 출간되자마자 즉각 베스트셀러가 됐고, 곧 불어, 독일어, 네덜란드어로 번역돼 유럽 세계에 미국 노예제도의 참혹한 실상을 알리는 기폭제가 됐다.

    잘 알려진 대로 더글러스가 이 책을 쓰게 된 것은 1831년 ‘해방자’를 창간해 북부 노예폐지 운동의 지도자로 나선 윌리엄 로이드 개리슨(William Lloyd Garrison)의 권면에 의해서였다.

    1838년 볼티모어를 탈출한 후 뉴욕을 경유해 뉴베드퍼드에 정착한 더글러스는 그곳 흑인 사회의 중심인물이 돼 노예제 폐지 운동에 앞장섰다. 1841년 고래잡이 전진기지로 유명한 낸터키트 반노예제 집회에서 더글러스의 연설을 우연히 듣게 된 개리슨은 그의 뛰어난 말솜씨에 매료돼 매사추세츠 주 반노예제협회의 순회 연사로 그를 초빙했다.

    더글러스는 그 제안을 받아들여 1841년부터 뉴잉글랜드와 뉴욕 주 일대를 돌며 노예제의 폐지를 역설해 큰 호응을 얻었다. 그러나 노예제를 지지하는 일부 인사들은 더글러스의 뛰어난 언변을 들어 탈주 노예로서의 그의 신분에 의문을 표했다. 노예는 말하자면 ‘말하는 주체(speaking subject)’로서의 삶이 철저히 억압됐는데, 어떻게 단시간 내에 그런 웅변 능력을 얻을 수 있겠는가라는 것이 그 의문의 핵심이었다. ‘인생 이야기’는 일차적으로 이 의문을 불식하기 위해 집필된 것이다. 19세기 미국 사회에서 노예는 어떤 존재로 인식됐는가. 더글러스 자신의 말을 들어보자.

    “나는 청중에게 대체로 ‘재산(chattel)’-‘물건(thing)’-남부의 ‘소유물(property)’로 소개됐고, 사회자는 그들에게 ‘그것(It)’이 말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말하곤 했다.”

    요컨대 노예는 백인의 소유물이요, 무인칭 대명사 ‘It’로 지칭되는 물건, 아리스토텔레스의 표현대로 ‘소리를 내는 도구’일 뿐이지 인간으로 여겨지지 않았던 것이다. 노예가 인간이라기보다는 물건 혹은 고작해야 동물과 진배없는 존재로 간주됐다는 것은 흑인 고유의 문학 양식인 노예 체험기(slave narratives)의 장르적 특징에서도 확인된다.

    탈주 노예들이 쓴 노예 체험기의 서두는 거의 한결같이 자신이 태어난 출생년도를 정확히 모른다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 점에서 더글러스의 ‘인생 이야기’ 역시 예외가 아님은 물론이다. 기실, 노예 체험기는 노예의 탈주 체험을 다룬 자전적 이야기라는 점에서 일종의 자서전이지만, 자신의 삶의 기원을 정확히 모르는 자의 자서전이라는 점에서 엄밀히 말해 자서전이라고 할 수 없다.

    노예제의 문제점을 심리학적으로 분석한 스탠리 엘킨스(Stanley Elkins)는 노예제는 나치의 수용소와 같이 억압적이고 폐쇄적인 제도로서 백인 주인에 대한 절대 복종이 요구됐기 때문에 남부의 노예는 온순하고 주인에게 충직하고 의존적이나, 무책임하고 속이기 잘하는 삼보(Sambo) 타입의 성격을 길러냈다고 지적한 바 있다.

    노예는 ‘it’ 일 뿐

    노예는 인간이라 하더라도 이처럼 미성숙한 ‘영원한 어린이(perpetual child)’이기 때문에 당연히 백인의 지도와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 노예제 옹호론자의 논리였다. 이런 시각의 연장선상에서 흑인 노예는 생리적으로 아둔하기 때문에 글을 읽고 쓰는 언어 능력과 사고 능력이 결여돼 있다는 것 또한 흑인에 대한 스테레오타입 이미지의 중요 항목 가운데 하나였다.

    더글러스를 가짜 탈주 노예라고 비난하고 나선 북부 백인들의 뇌리에는 말하자면 이런 인종주의적 고정관념이 박혀 있었던 것이다. 더글러스는 함께 일하는 백인 노예 폐지론자들 역시 예외 없이 이런 편견에 사로잡혀 있음을 발견하고, 흑인 노예가 메이슨 딕슨 라인을 넘어서 북부로 도망쳐온다고 해서 자유를 얻는 것이 아님을 점차 절감하게 된다.

    ‘가나안’을 향한 대장정 워싱턴·애틀랜타

    더글러스가 말년을 보낸 워싱턴의 집, ‘세다 힐’.

    예컨대 개리슨은 더글러스에게 그의 연설을 계도하면서 “자네는 사실만을 말하게, 철학은 우리가 맡을 것이네”라고 주문했다. 더글러스는 높아가는 그의 명성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개리슨의 하수인, 곧 반노예제집회에서 그의 주장을 예증하는 ‘텍스트’에 불과한 존재임을 깨달았다.

    더글러스에게 ‘인생 이야기’의 집필은 이처럼 흑인에 대한 백인의 고정관념에 맞서서 그것이 근거 없는 편견임을 백인 사회에 인식시키고, 아울러 명실상부하게 자기가 자신의 주인임을 확인하는 의식(ritual)과 같은 것이었다.

    그에게 글쓰기는 자아의 진정성을 확인하고 자유의지를 천명하는 행위였다. 그가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능력을 “노예 상태에서 자유에 이르는 도정”의 첫걸음으로 강조하면서 글을 깨우친 눈물겨운 과정을 ‘인생 이야기’에 소상히 기록해놓은 까닭이 여기에 있다.

    개리슨과 의견차이로 결별한 후 그는 로체스터로 옮겨가 흑인의 처지를 대변하는 ‘북극성(North Star)’이라는 신문을 창간해 독자적으로 노예제 폐지 운동의 전면에 나서는 한편, 탈주 노예의 도피를 돕는 지하조직(Underground Railroad)을 운영하기도 했다. 그의 도움으로 캐나다로 탈주한 흑인만도 수백명에 달했다.

    더글러스는 1848년에 수전 앤터니(Susan B. Anthony), 엘리자베스 스탠턴(Elizabeth Cady Stanton) 등이 주도해 세네카 폴스에서 열린 미국 첫 여성대회에 참석, 비판적인 여론에 밀려 머뭇거리는 여성 참석자들을 제치고 여성의 참정권 쟁취를 고취하는 연설을 하기도 했다. 그는 ‘생명, 자유, 행복의 추구’의 기치 아래 세워진 나라인 만큼 미국은 여성을 포함한 모든 억압받는 사람에게 민주적 평등과 자유가 보장되는 사회여야 함을 역설했다.

    백인들만의 독립기념일

    노예제를 둘러싼 남북의 긴장이 점점 고조돼가는 1850년대에 들어서면서 더글러스는 뛰어난 지성과 용기, 그리고 능변으로 이미 북부에서 가장 주목받는 흑인 지도자가 돼 있었다. 그는 각지에서 쇄도하는 강연 요청에 응해서 혹은 그 스스로 기획해 북부 각지를 순회하면서 수많은 강연을 했다.

    그는 재치와 유머로, 그 자신이 직접 체험한 예화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그를 19세기 미국의 가장 뛰어난 연설가로 만든 수사적 무기는 무엇보다도 독립이념이었다. 예컨대 명연설의 하나로 꼽히는 1852년 7월5일의 로체스터 연설에서 그는 백인 청중에게 7월4일의 의미를 되새기라고 요구했다.

    여러분의 조상들로부터 상속받은 그 풍요한 유산, 곧 정의, 자유, 번영, 독립 정신은 백인 여러분만의 것일 뿐, 나의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에게 생명과 치유력을 가져다주는 저 햇볕이 나에게는 채찍질과 죽음을 가져왔을 뿐입니다.

    이 7월4일은 여러분의 것이지 나의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환희에 젖을지 모르지만, 나는 애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슬에 묶인 사람을 이 장엄하게 빛나는 자유의 성전으로 끌어내 환희의 축가를 부르는 여러분에게 동참할 것을 요구하는 것은 비인도적인 조롱이요 신성 모독적인 아이러니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실로 신랄한 수사가 아닐 수 없다. 이 시기의 경험을 살려 ‘인생 이야기’를 개작한 그의 두 번째 자서전 ‘나의 예속과 나의 자유’(My Bondage and My Freedom, 1855)는 이런 식의 흑백을 대비시킨 대립적 수사로 채색돼 있다.

    어쨌든 백인 지배체제에 대한 그의 비판이 이처럼 미국적 이념에 근거해 있기에 그는 흑인 투사라기보다는 오히려 자유의 감시자요 민주주의의 전도사라고 불러 마땅한 것이다. 그가 19세기 중엽을 대표하는 중요 작가로 부상하게 된 궁극적 원인도 이처럼 인종의 경계를 넘어서서 더 넓은 지평에서 인간 해방을 꿈꾸었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출렁대는 강물에 드리운 포토맥 강변의 벚나무들이 피곤한 길손의 눈에도 싱그럽다. 잠시 강변을 따라 메인 가를 달리다가 아나코스티아 강을 가로지르는 프레더릭 더글러스 기념교를 건넜다. 강을 건너자 풍경이 달라진다. 건물도 허름하고 흑인이 눈에 많이 띈다. 안내서에 적힌 대로 마틴 루터 킹 거리를 찾아 차를 몰았다.

    ‘가나안’을 향한 대장정 워싱턴·애틀랜타

    1963년 8월 흑인의 공민권 보장을 촉구하기 위해 워싱턴에 운집한 군중.

    나는 흑인 지도자들의 이름을 딴 다리와 거리를 지나면서 그들과 연관된 백인 지도자를 생각해보았다. 더글러스의 경우 우선 링컨이 떠오른다. 링컨은 오늘날 노예해방자로 상찬되고 있지만 노예제 폐지론자는 결코 아니었다.

    대통령에 당선됐을 때 그의 생각은 아직 미개척지인 서부에 더 이상 노예제가 확산돼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지 남부의 노예제를 폐지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었다. 그의 당선으로 남부가 연방 탈퇴를 선언하자 링컨은 집권과 동시에 1850년에 제정된 도피노예법을 계속 유지하고 노예제에 대한 남부의 견해를 존중하겠다고 약속했다.

    더글러스는 당시의 정치 지도자 중에서 누구보다도 확고하게 노예제에 반대하는 링컨을 지지해 그의 대통령 당선을 도왔기 때문에 노예제에 대한 링컨의 이런 미온적인 반응에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곧 이어 남북전쟁이 발발하자 링컨을 비롯한 북부 정치지도자들의 우선적인 관심사는 분열된 연방을 어떻게 다시 하나로 복원할 것인지의 문제였지 노예제의 종식 그 자체는 아니었다.

    더글러스는 북부의 이런 태도를 비판하면서 전쟁의 목적을 노예제 폐지에 두라고 촉구했다. 1862년 12월31일 링컨은 마침내 노예해방령을 발표했다. 그러나 전면적 해방이 아니었다. 그 대상을 연방군이 아직 점령하지 않은 남부 땅에 속한 노예에 국한시켰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노예주로서 연방에 남아 있던 4개주와 북부가 이미 점령한 남부 지역의 노예들은 이 조치에서 제외됐다. 노예해방령이 교착 상태에 빠져 있던 남북전쟁을 타개하고자 하는 정치적·전략적 고려에서 나온 것이지 도덕적 결단의 결과가 아니었다는 역사가들의 비판은 이 점에서 정당하다.

    흑인에게도 참정권을!

    노예해방령 발표로 노예제 종식이 전쟁의 목적으로 부상하자 더글러스는 이 자유의 성전에 흑인도 참전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청원 운동을 주도했다. 이 요청이 받아들여져 흑인 모병이 시작되자 더글러스는 즉시 자신의 두 아들을 지원케 하고 흑인들에게 지원을 독려했다.

    이렇게 창설된 유명한 매사추세츠 주 54연대를 필두로 약 20만명의 흑인이 남북전쟁에 참전했고, 이 가운데 4만명 가량이 노예제의 사슬에 신음하는 동료 흑인들의 해방을 위한 밑거름으로 희생됐다. 1865년 전쟁이 종식되고 수정헌법 13조로 미국 사회에서 노예제가 공식적으로 폐지되자 더글러스는 곧 흑인 참정권 운동을 전개했다.

    1865년 미국 반노예제협회의 연차 총회에서 개리슨이 협회의 해체를 제안했을 때 더글러스는 흑인에게도 백인과 동등한 투표권이 주어지기 전까지는 노예제가 폐지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협회 해체를 반대했다. 그의 주장에 동의해 협회는 흑인 참정권 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했으나, 대부분의 백인은 그 후 협회를 떠나갔다.

    남북전쟁 직후 남부의 상황은 더글러스의 소망에 역행하는 방향으로 전개됐다. 암살당한 링컨의 뒤를 이은 앤드루 존슨의 보수적인 성향에 편승해 남부는 흑인을 자유민으로 대우하고 참정권을 부여하기는커녕, 오히려 과거의 노예법과 흡사한 흑인법(Black Codes)을 제정해 그들을 예속 상태에 묶어두려 했다.

    공화당이 지배하는 의회는 이에 맞서서 남부의 흑인을 보호하고 그들이 자유로운 시민으로 정착하는 것을 도울 목적으로 종전 직후 만들어진 해방흑인국(Freedmen’s Bureau)의 시한을 연장하고 그 권한을 강화하는 입법조치를 취했다. 이어 의회는 흑인에게 시민권과 동등한 법적 보호를 받을 권리를 부여하는 최초의 민권법안을 통과시켰다(이 법안은 2년 뒤인 1868년 수정헌법 14조로 확정됐다). 존슨 대통령은 이 두 법안에 모두 거부권을 행사했으나 의회는 이를 재의결했다.

    공화당의 급진파들은 또한 1866년 필라델피아에서 흑인 투표권을 촉구하는 결의대회를 열었다. 더글러스는 뉴욕을 대표해 이 회의에 참석해 연설했고, 그의 노력 덕분으로 대다수의 참석자가 흑인 참정권에 호의적인 태도를 갖게 됐다. 이 제안은 2년 뒤인 1868년 의회를 통과하고, 마침내 1870년 그랜트 대통령의 집권과 더불어 수정헌법 15조로 확정됐다. 마틴 루터 킹 거리로 들어서서 잠시 헤매다가 지나는 행인에게 길을 물으니 친절하게 그의 집 세다 힐로 가는 길을 안내해준다. 뜰의 잔디밭에서 흑인 아이 서너 명이 놀고 있었다.

    ‘가나안’을 향한 대장정 워싱턴·애틀랜타

    애틀랜타 킹센터의 간디 동상.

    본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남부 플랜테이션 농장의 흑인 숙사를 연상시키는 작은 오두막이 눈에 띄어 그곳을 들여다 보고 있는데, 한 흑인 아이가 다가와 작은 사과 하나를 내민다. 뜰 안의 사과나무에서 떨어진 풋사과였다. 아이의 따뜻한 마음을 간직하고 집을 나섰다. 언덕 너머 석양 하늘이 유난히 푸르러 보였다.

    킹 목사의 등장

    1895년 프레더릭 더글러스가 사망하던 무렵 흑인의 사회적 지위는 나락으로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남부 백인 보수주의자들은 흑인을 예전과 같은 종속적인 위치로 끌어내리기 위해 흑인의 투표권과 평등권 보장을 무력화하는 조치를 취했을 뿐만 아니라, 이른바 짐 크로법을 제정해 흑백분리를 영속화하고자 했다.

    백인들은 KKK단으로 알려진 큐클럭스클랜(Ku Klux Klan), 백동백기사단, 루이지애나 백인동맹(White League of Louisiana)과 같은 백인우월주의 단체를 조직해 흑인의 정치적 참여를 봉쇄하고, 백인의 우월성을 존중하지 않는 흑인을 무자비하게 폭행하고 살해했다. 흑인들은 1960년대 민권운동으로 공민권을 되찾게 될 때까지 이처럼 억압과 린치의 공포에 시달리며 인종분리와 차별을 감수하는 긴 암흑기를 보내야 했다.

    1964년의 민권법과 1965년의 투표권법 제정에서 절정을 이루는 1960년대 민권운동은 마틴 루터 킹이라는 뛰어난 지도자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 그는 불굴의 용기와 굳은 신념, 그리고 흔들림 없는 소명의식으로 흑인은 물론 백인들을 이 저항의 대열에 결집시켰다.

    재건시대 이후 처음으로 다수의 일반 대중이 참여함으로써 참다운 의미의 사회운동으로 발전한 이 저항의 외침은 애틀랜타 출신의 침례교 목사이던 킹의 리더십으로 독특한 종교적 울림과 윤리적 색채를 띠었다.

    특히 그 자신 29번이나 투옥되고 숱한 폭력과 협박에 시달리면서도 끝까지 견지한 비폭력적 저항은 운동의 정당성을 높임과 동시에 민주적 사회 개혁 운동의 모범으로 평가됐다. 1964년의 노벨 평화상 수상은 평등사회를 이루기 위한 그의 헌신적 노력과 이런 지도력을 전세계가 공인한 것을 의미한다.

    1968년 4월4일 테네시 주 멤피스에서 파업 노동자들을 위한 지원 모임을 마친 후 그는 한 인종주의자가 쏜 총에 맞아 사망했다. 전세계가 애도한 그의 비극적 죽음은 억압 없는 사회, 자유와 평등이 보장되는 사회 건설을 위한 순교로 간주돼왔다.

    그가 태어난 곳이면서 활동무대였고 죽은 뒤에도 영면의 장소가 된 애틀랜타는 오늘날 민권운동의 요람이요 메카로서 그가 간직했던 꿈을 기리는 수많은 추종자의 순례지가 되고 있다.

    2003년 5월의 어느 날,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가운데 나는 애틀랜타의 마틴 루터 킹 사적지(Martin Luther King, Jr. National Historic Site)를 찾았다. 오번가(Auburn Street)에 자리잡은 사적지는 시내 중심가에서 차로 10분 거리였다.

    이른바 심남부(Deep South)의 관문인 애틀랜타는 마거릿 미첼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무대로서 내 상상력을 자극했던 곳이다. 그러나 1996년 근대 올림픽 100주년을 기념하는 하계 올림픽이 열린 곳이자 CNN과 코카콜라의 본사가 있는 오늘의 애틀랜타는 고층건물이 즐비한 여느 대도시와 다를 바 없다.

    애틀랜타가 남부의 신흥 경제 중심지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역설적이지만 남북전쟁에서 셔먼 장군이 이끈 북군에 의해 깡그리 파괴됐기 때문이다. 이 철저한 파괴 덕분에 애틀랜타는 도시계획을 새로 해 신흥 산업도시로 거듭날 수 있었다.

    오번가는 한때 애틀랜타 흑인 사회의 활기찬 중심지로서 번성했으나 지금은 퇴락한 주거지역처럼 보였다. 안내 센터로 찾아드니 건물 초입에 서 있는 간디의 동상이 먼저 눈길을 끈다. 그것은 사회운동가로서 킹의 삶을 인도한 등불이 간디였음을 새삼 환기시킨다.

    간디에게 매료된 킹

    킹은 1959년 간디평화재단의 초청으로 인도를 방문해 당시 총리 네루를 만나고 간디의 비폭력주의 사상의 의미를 되새기는 기회를 가졌다. 킹은 이미 신학교 시절에 간디의 저서를 읽고 그가 주창한 ‘사티아그라하(satyagraha)’의 개념에 매료돼 있었다.

    비폭력적 저항이라는 개념은 간디에 앞서서 퀘이커 교도들이 생각했던 것이고 미국에서는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시민의 불복종’에 천명돼 있다. 이들을 제치고 간디 사상의 어떤 점이 킹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일까.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간디는 사랑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을 개인들 간의 단순한 상호관계를 넘어 강력하고 효과적인 대규모의 사회적 역량으로 승화시킨 최초의 인물이다. 간디에게 사회와 집단을 변모시킬 수 있는 강력한 도구는 바로 사랑이었다. 간디의 사랑과 비폭력에 대한 설득력 있는 이론 속에서 나는 지금껏 찾아 헤매던 사회개혁 방법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나는 간디의 비폭력저항운동에서 지적인 만족과 도덕적 만족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한 만족은 벤담과 밀의 공리주의나 마르크스와 레닌의 혁명적인 방법, 홉스의 사회계약론, 루소의 “자연으로 돌아가라”, 니체의 초인 철학 에서는 얻을 수 없었던 것이다.


    ‘가나안’을 향한 대장정 워싱턴·애틀랜타

    애틀랜타 킹 센터에 있는 마틴 루터 킹의 무덤.

    외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목사인 집안에서 태어난 킹의 신앙심은 어릴 적부터 가슴 깊이 새겨진 독실한 것이었으나, 인종차별이 극심했던 남부 사회는 신앙의 문제를 개인적인 차원에만 머무르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안내 센터 안쪽의 넓은 전시실에는 킹의 민권운동 활동상을 담은 각종 사진 자료와 유품들이 전시돼 있다. 킹의 유해를 묘지까지 끌었다는 소박한 모양의 마차가 특히 시선을 끈다. 그것은 만년에 그의 운동이 빈부의 격차를 심화하는 자본주의 체제의 비판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음을 상기시켰다.

    ‘지도자로 나선 용기(Courage to Lead)’란 주제 아래 1950년대와 1960년대의 민권운동을 시기별로 구획해 전시하고 있는 특별 프로그램은 곳곳에 킹의 연설 장면을 담은 비디오를 내보냈고, 이를 관람하는 학생들로 실내는 북적거렸다.

    킹이 사회운동가로 첫선을 보인 것은 1955년 앨라배마의 주도 몽고메리에서 일어난 버스 보이코트 운동에서다. 퇴근길 버스에서 백인들이 앉게 돼 있는 자리에 앉아 가던 로자 파크스(Rosa Parks)라는 흑인 여성이 백인에게 자리를 내주고 뒷자리로 가라는 운전사의 요구에 불응한 죄목으로 체포된 사건이 발단이 됐다. 이 운동은 버스의 흑백 분리를 규정한 앨라배마 주법이 위헌이라는 연방 대법원의 판결을 끌어냄으로써 민권운동에 불을 지핀 역사적 사건이다.

    보스턴대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고 그전 해에 몽고메리의 한 침례교회 목사로 부임한 킹은 무려 12개월 동안 지속된 이 항의운동을 성공적으로 주도함으로써 흑인 사회의 새로운 지도자로 떠올랐다.

    몽고메리 버스 사건이 남긴 것

    몽고메리 버스 보이코트 운동의 성공은 1954년 ‘브라운 대 교육위원회(Brown vs Board of Education)’의 역사적 판결에 이어 1896년의 ‘플래시 대 퍼거슨(Plessy vs Ferguson)’의 판결에 의해 ‘분리하되 평등’이라고 정당화되던 짐 크로 법이 위헌임을 재확인한 것이었다. 이 운동은 또한 이후 전개된 흑인 민권운동의 방향과 운동 방식의 전범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흑인 사회는 독립선언서에 천명된 이념에 반하거나 헌법에 보장된 당연한 권리를 짓밟는 사회 질서와 관습을 시정하는 저항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할 각오를 새롭게 하면서, 단발적이고 폭력적 대응보다는 비폭력적이고 조직적 저항 방식이 더 실효적임을 깨닫게 됐다.

    몽고메리 보이코트 운동을 통해 흑인들은 또한 일치단결해 억압적인 지배세력에 대항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됐는데, 흑인 사회의 이 같은 자기역량의 확인이야말로 그 후 전개된 민권운동의 진짜 원동력이었다.

    킹은 몽고메리 보이코트 운동을 시작으로 1963년의 버밍햄 운동과 워싱턴 행진, 투표권 쟁취를 위한 1965년의 셀마 투쟁을 비롯한 수많은 저항운동의 선봉에 섰다. 민권운동을 주도하면서 킹은 수없이 투옥당했고, 백인들의 끊임없는 회유와 협박, 음해에 시달렸다.

    ‘가나안’을 향한 대장정 워싱턴·애틀랜타

    흑인노예로서 고달픈 삶의 행로를 담은 더글러스의 저서 ‘인생이야기’.

    몽고메리에서는 누군가가 던진 폭탄으로 집이 폭파된 적이 있고, 뉴욕에서는 칼에 찔려 목숨을 잃을 뻔했고, 명성이 높아지면서 그는 연방수사국의 음해 공작에 시달려야 했다. 킹보다 한 세대 앞선 흑인 지도자 부커 T 워싱턴은 연설의 달인이었으면서도 연설 전 늘 불안에 떨었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킹에겐 이런 두려움이 없었을까? 그의 자서전은 그 역시 두려움과 불안 또는 절망으로 고통스러워한 순간이 많았음을 전하고 있다. 그때마다 그는 하나님이 자신을 지켜줄 것이라는 굳건한 믿음으로 이를 이겨냈노라고 적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또한 자신이 하나님의 도구라는 것,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펜티코스트의 혀라는 것, 따라서 자신의 일은 운명적이라는, 기독교적 소명의식을 표명하기도 했다. 그는 이런 점에서 자신을 철저히 무화함으로써 천상의 권능으로 빛난 구약의 선지자들과 흡사하다.

    “악법, 거역하고 따르겠다”

    몽고메리 버스 보이코트 운동 직후인 1957년, 킹은 남부 전역으로 민권운동을 확산시킬 목적으로 남부기독교지도자협의회(SCLC)를 조직했다. 이후 SCLC는 흑인 학생에게 점심을 팔지 않은 처사에 항의해 노스캐롤라이나의 그린스보로에서 일어난 학생들의 연좌시위를 계기로 조직된 학생비폭력조정위원회(SNCC)와 더불어 남부 민권운동의 주축이 됐다.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킹은 SCLC 의장으로서 남부 각지의 교회 지도자들과 긴밀한 협조 체제를 구축하고 한층 적극적으로 인종차별 철폐운동에 나섰다. 남부에서 가장 완고한 인종차별 도시로 악명 높았던 버밍햄을 타깃으로 한 1963년의 항쟁은 그중 가장 치열한 것이었다. 노예해방 선언 100주년을 맞았으나 별로 달라진 게 없는 억압적 현실로 고조된 흑인의 민권의식에 불을 지핀 이 사건은 남부 전역을 저항운동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었다.

    버밍햄에서 체포돼 투옥된 상황에서 쓴 유명한 ‘버밍햄 감옥에서의 편지’에서 킹은 기다리라는 백인들의 상투적인 약속에 흑인 사회는 지쳤다고 선언하고, 흑인들에게는 압제의 세력들이 자발적으로 자유를 베푼 적이 결코 없었음을 상기하면서 투쟁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불의가 자행되고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수수방관하는 백인들에게는 불의에 대한 침묵은 정의의 실현을 거부하는 것이나 다름없고 썼다.

    나는 극단적인 인종차별주의자들처럼 법률을 빠져나가거나 무시하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무정부상태가 될 것입니다. 부당한 법률을 위반하는 사람은 솔직하고 겸허한 태도를 가져야 하며 어떤 형벌도 달갑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양심적으로 볼 때 부당하다고 판단되는 법률을 위반하되 지역사회의 양심에 그 법률의 부당성을 호소하기 위해서 징역형도 불사하는 사람이야말로 법률을 지극히 존중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을 범법자요 선동가로 모는 백인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그는 이렇게 악법의 부당성에 항의하기 위해서 법을 어길 수밖에 없었지만, 악법도 법이기 때문에 겸허하게 그 법에 따를 것이라고 응수했던 것이다.

    인간이 성취한 바의 역사, 곧 보편사는 궁극적으로 위인의 역사다. 칼라일은 ‘영웅과 영웅숭배론’을 이렇게 시작한다. 시대를 이끄는 주역이 영웅이라고 하더라도 시대의 흐름을 그가 전적으로 혼자서 만드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칼라일은 영웅이 영웅일 수 있는 것은 동시대 사람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정확히 포착해 표명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킹이 1960년대 민권운동의 영웅일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그는 400년 동안 노역의 삶을 살아온 흑인과 모든 억압받는 민중의 억눌린 소망을 그 한 맺힌 가슴으로부터 터져 나오도록 그의 혀를 빌려주었다.

    나에게는 꿈이 있다

    그는 민중의 소리를 신의 음성으로 변환시켜 말할 수 있는 마술사였다. 벽에 설치된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1963년 8월의 워싱턴 대행진에서 행한 그의 감동적인 연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를 잠시 듣다가 기념관을 빠져나오면서 나는 이런 상념에 젖어 있었다.

    밖에는 그 사이 비가 그치고 구름 사이로 햇살이 내비치고 있었다. 평화 광장을 지나 오번가 건너편에 자리잡은 킹의 부인 코레타 스캇 킹이 세운 킹 센터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른편으로 유명한 에브니저 침례교회(Ebenezer Baptist Church)가 보인다.

    아버지의 교회였던 이곳에서 킹은 목사 서품을 받았고, 만년의 8년을 아버지와 함께 공동 사역자로서 교회를 이끌었다. 그가 조직한 SCLC의 본부이기도 한 이 역사적 교회는 킹 일가에게는 비운의 장소였다.

    아들의 장례식이 열렸던 이 교회에서 1974년 6월 그의 어머니는 일요 예배를 위한 오르간 연주를 하다가 총을 맞고 사망해 아들의 뒤를 따랐다. 킹 센터의 프리덤 홀에는 킹의 유품을 전시한 전시실이 있고 기념품 가게도 있다.

    킹 센터에서 무엇보다 방문자의 눈을 끄는 것은 킹의 무덤이다. 프리덤 홀의 전면으로 긴 수영장만한 분수 수조가 조성돼 있고 킹의 무덤은 하늘색으로 빛나는 그 수조의 한가운데에 있다.

    ‘가나안’을 향한 대장정 워싱턴·애틀랜타
    신문수

    1952년 출생

    서울대 영어교육과 졸업·동 대학원 석사, 미국 캘리포니아대(버클리) 석사(영문학)·하와이대 박사(영문학)

    現 서울대 영어교육과 교수·미국학연구소장, 한국영어영문학회 부회장

    저서 : ‘모비딕 읽기의 즐거움’, ‘현대영미소설의 이해’(공저), ‘자연’(역서), ‘미국의 노예제도 & 미국의 자유’(공역) 등


    1970년대 초에 사우스뷰 묘지에 묻혀 있던 그의 유해는 에브니저 교회 인근으로 옮겨졌다가 1977년 다시 이곳으로 옮겨졌다고 안내서는 적고 있다. 석관의 옆면에는 킹이 흑인 영가에서 인용해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의 연설 말미를 장식했던 구절이 새겨져 있었다.

    “드디어 자유구나, 드디어 자유구나 / 전능하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 저는 마침내 자유를 얻었습니다.”

    무덤 바로 옆에는 작은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킹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지속적인 노력의 상징으로서 ‘영원한 불꽃(Eternal Flame)’으로 명명된 이 불은, 그러나 그 자유가 미완의 자유임을, 그리하여 자유와 평등이 완벽하게 실현될 가나안을 향한 행진은 앞으로도 계속돼야 함을 말해주고 있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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