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5월호

당쟁, 强臣, 정통성 논란 만병 불러온 ‘임금 스트레스’

화병, 눈병, 종기로 괴로워한 현종

  • 이상곤 │갑산한의원 원장·한의학 박사

    입력2013-04-18 10:4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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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쟁, 强臣, 정통성 논란 만병 불러온 ‘임금 스트레스’

    드라마 ‘마의’의 현종과 백광현. 현종은 평생 종기로 고생했지만 당쟁으로 인한 스트레스성 대장질환으로 세상을 떠난다.

    완연한 봄, 전남 완도군 보길도엔 핏빛 동백꽃이 흐드러지게 피고 또 졌다. 보길도는 효종이 죽은 후 대비가 얼마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하는지를 두고 피터지게 싸운 두 인물의 악연이 얽힌 곳이다. 이른바 예송논쟁의 주역인 우암 송시열(1607~1689)과 고산 윤선도(1587~1671)가 그들이다.

    남인의 선봉장 윤선도는 송시열이 이끌던 서인세력에게 패해 유배됐다가 보길도에서 죽었고, 그를 유배 보낸 송시열은 꼭 18년 후 자신도 보길도로 유배된다. 보길도 바위 곳곳에는 송시열의 시가 남아 있다. 떨어져 잎으로 흩어지지 않고 붉은 꽃송이째 뚝뚝 떨어지는 보길도 동백꽃의 자태는 당시 조선 민초들이 겪은 아픔을 증언하는 듯하다.

    예송논쟁은 효종과 효종비 인선왕후 사후 효종의 계모이자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가 상복을 얼마동안 입을 것인가, 즉 복상(服喪) 문제 때문에 일어났다. 당시 예법은 임금의 상에 3년 동안 상복을 입도록 했지만 장자는 3년, 차자는 1년을 입도록 했다. 송시열을 위시한 서인들은 효종이 소현세자의 동생, 즉 차자이므로 1년상(기년설)을 주장한 반면 윤선도를 비롯한 남인들은 기년설이 현종의 정통성을 부정한다며 3년상을 주장했다.

    효종의 아들 현종(1641~1674)은 임금 자리(재위기간 1659~1674)에 오르자마자 일어난 1차 예송논쟁에서 서인의 뜻을 받아들이고 남인에게 철퇴를 내렸다. 하지만 15년 후인 1674년 자신의 어머니 인선왕후가 죽자 서인의 대공설(大功說·9개월)을 물리치고 남인의 기년설을 채택함으로써 서인들을 실각시켰다(2차 예송논쟁). 서인은 인조의 장자를 소현세자로 인정한 반면, 남인은 소현세자가 일찍 죽었으므로 효종이 실질적인 인조의 장자라고 봤다. 현종은 예송논쟁이 결국 자신과 아버지 효종의 왕위계승 정통성을 두고 벌어진 논쟁임을 뒤늦게 깨닫고 서인을 배격한 것이다.

    ‘걸어다니는 종합병원’



    현종 치세에 벌어진 남인과 서인 간의 예송논쟁은 사실 민생과는 아무 관계가 없었다. 현종 재위 15년에 걸쳐 권신들이 권력투쟁을 벌이는 동안 조선은 기근과 전염병으로 편안한 날이 없었고 백성의 삶은 도탄에 빠졌다. 현종은 당쟁이 이어진 재위기간 내내 신경병적 증상을 보였다. 극심한 가뭄으로 백성들이 농사일의 어려움을 호소하자 “차라리 (내가) 죽어버려 이런 말을 듣지 않았으면 한다”(재위 3년 3월 23일 조회)는 극단적인 말도 했다.

    이런 신경증적 태도는 건강도 악화시킨다. “직접 기도드리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다만, 다리의 병 때문에 걸음도 제대로 못 걷는 형편이다”라면서 기우제를 직접 올리지 못할 만큼 아픈 자기 신세를 한탄한다. 재위 14년 5월 1일, 가뭄이 더욱 심해지자 이번에는 지나친 자책으로 신하들을 놀라게 한다. 몸도 정치도 뜻대로 되지 않는 현종의 심경을 잘 보여준다.

    “오장이 불에 타는 듯해 차라리 죽고 싶다. 아! 무릇 백성은 먹을 것에 의지하고 나라는 백성에 의지해 존재하는 것인데, 백성에게 먹을 것이 없으면 나라가 무엇에 의지해 그 꼴을 유지하겠는가. 생각해보니 그 허물은 진실로 내게 있음에도 불쌍한 우리 백성이 대신 재앙을 받고 있도다.”

    기근의 기록들은 딱한 수준을 넘어 비참하기까지 하다. 현종 12년 5월 19일의 기록이다.

    “올해 굶주리거나 병을 앓아 죽은 참상은 실로 만고에 없던 것입니다. 경상도에는 굶어죽은 자가 590명이며 전라도는 2080명입니다. 시체를 땅에 묻도록 했지만 백성들이 굶어 지쳐 길에서 시체가 썩어나가고 있습니다. 흙을 덮어놓아도 소나기가 지나가면 곧 드러나니 참혹함을 이루 다 아뢸 수 없습니다.”

    현종은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이었다. 평생 동안 약을 달고 살았다. 기록상 가장 많이 처방된 탕제는 화병으로 가슴이 답답한 증상을 해소하는 가감양격산이다. 현종은 즉위 후 7년 동안 이 탕제를 63회나 먹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현종은 소현세자의 셋째 아들 경안군 석견(1644~1665)이 죽자(현종 7년) 이 약의 복용을 바로 중지한다. 예송논쟁과 정통성 시비가 그에게 심적으로 얼마나 큰 부담을 줬는지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가감양격산 처방은 동의보감 ‘화(火)’편에 나오는 양격산 처방을 변형한 것으로, 양격산은 스트레스가 쌓여 심장에 열이 나고 변이 잘 나오지 않는 데 쓰는 탕제다. 양격산에는 대황과 망초라는 약물이 들어 있는데, 대황은 마치 장군처럼 대장을 뻥 뚫어 변비를 해소하고 관장한다고 해 장군풀로도 불린다. 가감양격산은 양격산에서 대황과 망초를 빼고 연교(連翹)를 군약(君藥)으로 배치해 마음의 열을 없앤다. 연교 감초 길경 황금 치자 박하 죽엽 등의 약물이 포함돼 있다. 주로 상초(심장 아래 위장 윗부분) 열을 전문으로 없애는 데 쓰이는 처방이다. 동의보감은 “상초에 열이 있으면 눈에 핏발이 서며 몸이 붓고 머리와 목이 아프며, 입 안과 혀가 헌다”고 적고 있다.

    동의보감의 지적처럼 현종은 눈병, 목에 멍울이 생기는 나력(일종의 한센병) 질환, 심장의 열기가 전신으로 퍼져 생기는 종기를 평생 동안 달고 다녔다. 눈병은 즉위년 초부터 시작돼 현종을 끈질기게 괴롭혔다. 눈에 대한 침 처방이 이어진 것은 물론, 눈을 씻어주는 세안탕과 사물용담탕 속효산 자신명목탕 처방이 반복됐다. 얼마나 답답했던지 눈병에 좋은 광물성 약재인 공청(空靑)을 구하러 중국 서촉 지역(지금의 쓰촨성)에 사신을 보내는 문제를 의논할 정도였다.

    온천욕의 놀라운 효과

    즉위 2년에는 다래끼가 생기면서 옛 인경궁에 있는 초정(椒井)에서 눈을 씻었다. 인경궁은 광해군 때 인왕산 아래 지어진 궁궐로 그곳 초정의 물은 맛이 떫고 톡톡 쏘며 매우 찬 성질을 가진 냉천이었다. 물이 찬 것은 아래에 백반석(白礬石)이 깔려 있었기 때문인데, 백반은 화가 속으로 몰리면서 오한이 나거나 편두통이 있을 때 사용하는 약재이기도 하다. 초정의 물은 탄산수와 비슷한데, 너무 차가워 음력 7~8월에만 멱을 감을 수 있고 그때도 밤에 목욕하면 얼어 죽는다고 목욕을 막을 정도였다. 백반의 주성분은 알루미나이트라는 물질로, 위산과다 환자들이 먹는 겔 형태 약품의 원료이며 단백질을 침전시키는 능력이 강하다. 중국 청나라 말기에 편찬된 의약서 본경소증은 백반의 효능을 이렇게 분석한다.

    “돼지 창자를 백반으로 문지르면 끈적끈적한 액체가 없어지며 상치를 절일 때도 백반을 넣으면 점액이 없어진다. 조직 속의 물을 없애 단단하게 강화한다. 눈에 열이 나고 진물이 나 아픈 증상을 잘 고친다.”

    눈병과 피부병으로 고생하던 현종은 즉위 6년째 되던 해에 치료차 온천에 다녀올 것을 조심스럽게 타진한다. 신하들의 목소리가 크고 기근이 계속되는 상황이라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일찍이 내가 들으니 온천이 습열을 배설시키고 눈병에도 효험이 있다고 하니 지금 이 기회에 가서 목욕을 했으면 한다. 눈동자에 핏발이 서서 침침한데 그 고통이 이루 말할 수 없다. 거기다 습창이 도져 온몸에 퍼졌다.”

    현종이 이렇게까지 호소했지만 대신들은 “평상심을 가지고 궁내에서의 치료에 임하라”며 온천행을 반대한다. 현종은 이에 대해 “(내가) 평상심을 갖지 않을 무슨 일이 있겠는가”라며 불만을 토로한다. 결국 현종은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온천을 다녀오는데, 그 결과는 놀랍다. 실록은 이렇게 썼다.

    “상(上)이 서책의 획을 거의 구분하지 못했는데 문서의 작은 글자도 요연하게 읽을 수 있게 됐으며 수백 걸음이나 떨어져 있는 사람도 구별했다. 습창은 거의 사라졌다.”

    온천에는 유황이 들어 있다. 유황은 성질이 뜨거우며 독성이 있다. 약으로 사용할 때는 독성을 없애기 위해 특별한 방법으로 조제한다. 유황과 두부를 함께 달여 두부가 짙은 녹색으로 변하면 두부를 제거하고 남은 액을 그늘에 말려 사용한다. 유황 600g당 두부 1200g을 사용한다. 두부를 넣는 것은 유황의 약성이 워낙 뜨겁기 때문에 이를 중화하기 위한 것이다. 스트레스로 화가 많은 사람에게 유황을 그대로 쓰면 오히려 열을 올리고 땀을 흘리게 해 원기를 손상할 수 있다.

    신하들이 현종의 온천행에 반대한 것도 이런 우려 때문이었다. 그만큼 온천욕은 사람의 기를 데워주는 효과가 크다. 효과를 보는 질환은 피부나 근육, 관절이 차가워져 생긴 신경통이나 중풍 등이다.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낸 서종태는 “온천욕 하고 나면 원기가 손상되니 오래할 수는 없다. 하지만 온천욕은 손발이 오그라들고 손발을 못 쓰는 질환을 고치는 데 좋다”고 말했다.

    온천욕이 가장 효과적인 질환은 역시 피부병이다. 유황은 크게 더운 성질이 있어 한의학에선 화(火)로 규정한다. 피부는 내부를 보호하는 단단한 돌과 같은 성벽이므로 금(金)이라고 본다. 불과 쇠가 만나면 용광로와 같이 끓어오른다. 쇠는 불순물과 분리돼 순수해지며 내부는 더욱 치밀하고 단단해진다. 유황천은 피부의 각질층을 녹이고 피부에 불기운을 더해 탱탱하게 탄력성을 높이며 물질대사를 항진시켜 상피 형성을 빠르게 한다. 의서들은 유황천이 습창, 즉 진물이 나는 습진류의 질병을 잘 고친다고 설명한다.

    피부병 중에서도 나력(癩?)은 현종을 끈질기게 괴롭힌 질환이었다. 요즘의 경부임파선결핵쯤으로 추정된다. 옛날에는 많은 사람이 앓은 대중적 질병이었다. 조선시대 의사들의 전문과로 나력의와 치종의(治腫醫)가 따로 있을 정도였다. 나력을 치료하는 의생에게는 의서를 외우고 해석하는 고강(考講) 시험을 면제하고 특채해 양성했다는 기록(세종실록)도 있다. 동의보감도 나력의 원인과 치료법을 상세하게 설명한다.

    ‘나력은 멍울이라 한다. 목의 앞과 옆에 콩알이나 은행 씨만한 멍울이 생기는 것을 나력이라 하고, 가슴 옆구리 겨드랑이에 돌같이 단단하고 말조개만한 것이 생긴 것을 마도(馬刀)라고 한다. 성격이 급하고 우울해 심장에 열이 생긴 부인들에게 많이 생긴다. 목에 처음 생겼다가 터진 다음에는 팔다리로, 온몸으로 병독이 퍼진다. 생김새는 매화 열매 같은데 치료하지 않으면 저절로 터지면서 구멍이 생긴다. 오한과 신열이 나며 쑤시고 아프다.’

    현종의 나력 치료는 동의보감 나력문에 기재된 처방 위주로 진행됐다. 왕이 된 후 4년간은 치자청간탕과 연교산견탕을, 이후 4년간은 하고초환, 평혈음, 보중승독병, 산종궤견탕을 투여했다. 목의 종기를 치료하는 대표적인 약물에는 곤포, 하고초, 연교, 현삼 등이 있는데 현종에겐 ‘현삼주(玄蔘酒)’가 특히 효험이 있었다고 한다.

    갑상선종 다스리는 하고초

    당쟁, 强臣, 정통성 논란 만병 불러온 ‘임금 스트레스’

    현종의 목에 난 종기에 특효를 보였다는 현삼(玄蔘).

    한의학은 곤포의 약효를 이렇게 설명한다. 겨울이 되면 두꺼운 옷을 입지만 얼굴은 맨살인 채 내놓는다. 한의학은 이를 양적인 기가 얼굴에 집중되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반면에 몸통은 음적이다. 곤포는 다시마 종류로 바닷물에서 자라며 물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음적인 장소인 물속에서만 살아간다. 사람의 몸통과 같이 음적인 것이다. 우리 몸의 양기가 만들어내는 화(火)는 몸통 속의 음적인 물질을 부글부글 끓어올렸다가 몸통과 얼굴 사이인 목에서 식으면서 묵처럼 응결된다.

    지금으로 말하면 갑상선종의 형태인 나력 영류 핵환(核患)과 같은 종기 질환의 특성은 음적 영역의 끝부분인 목 위로는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곤포가 물 밖으로 못 나오는 것과 같은 이치다. 한의학은 이들 종기 질환의 원인을 응결한 기와 열이라고 본다. 열을 받아 삼겹살에서 나온 기름이 식으면서 뭉치고 굳는데, 그 굳은 형태가 바로 종기라는 것이다. 곤포는 차가운 기운으로 열을 배설하고 짠맛으로 딱딱한 종기를 무르게 연화시켜 뭉친 것을 풀어 주는 대표적 약물이다.

    하고초도 이런 질환에 사용되는데, 여름에 꽃이 피고 나면 곧 죽는다고 해 ‘夏枯草’란 이름이 붙여졌다. 채취 시기는 하지(夏至) 전. 하지가 되면 마르기 시작하므로 그전에 채취해야 한다. 꽃 이삭과 풀잎을 채취해 말린다. 한의학은 약물이 주변 환경에 적응하는 생명력을 응용해 질병을 치료하는데, 하고초의 특징적 생명력은 가장 더운 여름에 시든다는 데 있다. 인체에선 화병이 여름과 같은 상태로, 가만히 있어도 땀이 나고 열이 오르며 숨이 차오른다. 하고초는 여름의 무더위를 시들게 만든다. 그래서 하고초는 갑상선 기능 항진증이나 고혈압 증상에도 효능을 보인다. 필자는 이런 효능을 논문을 통해 증명했다. 약물을 민간에서 사용할 때는 차로 먹는 것이 좋다. 술에 담가 아홉 번 찌고 말리는 게 좋다.

    ‘정통성 스트레스 증후군’

    종기인 나력과 핵환은 조선시대 의관들에겐 공포의 대상이었다. 동의보감은 이들 질환을 ‘결핵’이라고 표현했으나 현재의 그것과는 다르다. 동의보감의 결핵은 화기와 열이 한곳으로 몰려 맺힌 작은 멍울을 가리키는데 과일의 씨와 비슷하다. 따라서 쨀 필요는 없고 열기만 흩뜨러지면 저절로 삭는다. 현종 10년 11월 16일 임금의 턱 밑에 핵환이 생기자 의관들은 혼란스러워한다. 효종이 종기를 치료하다 출혈로 죽은 트라우마가 짙게 깔려 있었다.

    “상의 오른쪽 턱 밑에 종기가 자리 잡고 있는데, 고름이 잡힌 지 오래됐다. 곧 터질 듯한 기세였는데 의관들은 영류인가 의심하고 있었다. 도제조가 큰 소리로 ‘의관이 의원이라는 이름만 지녔지 무슨 소견이 있겠는가’라고 탄식했다.”

    이튿날 다시 약의(藥醫)와 침의 제조들이 난상토론을 하자 현종은 “길가에 집을 지으면 3년이 지나도 완성되지 않는다”며 불만을 표시했다. 현종은 갈팡질팡하는 의관들을 보고 불안해했다. 실록은 “막상 침의들이 침으로 종기를 따려 하자 얼굴에 핏기가 사라졌다”고 기록했다.

    현종은 딸 명혜공주와 명선공주가 재위 14년 4월과 8월 잇따라 죽자 건강이 급격하게 나빠졌다. 그는 빈번하게 복통을 호소했다. 소변 보기가 곤란해지고 설사가 이어졌다. 스트레스로 인한 과민성대장증후군과 비슷한 증상이다. 생명력의 근원인 곡기를 보충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사람은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간다. 흙은 생명의 근원이다. 인체의 흙인 ‘土’ 기운은 소화기인 비위(脾胃)의 기능이다. 생명력은 따스한 온기인데, 온기가 떨어지면 배가 차가워지면서 복통과 설사가 이어진다. 그해 5월부터 설사 처방인 청서육화탕, 창늠산, 삼련탕, 반총산, 수자목향고 등을 복용했지만 멎지 않았다.

    최후의 일격은 정치적 스트레스였다. 현종 15년 초 인선대비(효종의 부인)가 죽고 2차 예송논쟁이 시작되자 1차 예송논쟁 후 겨우 사라졌던 가슴 답답증이나 불면의 증후가 다시 도졌다. 정통성 시비로 인한 스트레스 증후군이 재발한 것이다. 스트레스는 여러 단계로 나뉜다. 경고반응기, 저항기, 피로기로 나뉘어 생태 반응이 나타난다. 경고반응기는 스트레스를 받아도 자신의 저항력으로 극복해 원상태로 복귀하려고 애쓰는 상태고, 저항기는 스트레스를 받지만 아직 저항력이 있어 겨우 지탱하는 시기다. 하지만 만성적인 상태가 되면 저항력이 사라지면서 인체는 해삼 퍼진 것처럼 흐물흐물한 상태가 된다.

    일각에서는 독살설을 제기하지만 현종은 정통성 시비에서 비롯된 질병의 늪에서 끝내 헤어나오지 못하고 목숨을 잃었다. 현종은 그해 8월 18일까지 설사와 호흡곤란, 가슴의 답답증을 호소하다 세상을 떠났다.

    현종과 馬醫 백광현

    현종이 가장 많이 앓은 질환은 종기다. 최근 종영된 드라마 ‘마의’의 백광현(1625~1697 추정)은 현종 때 활약한 종기 치료 전문가다. 실제로 말을 치료하는 마의(馬醫) 출신이며 현종 4년 각종 기록에 처음 등장한다. 천한 신분인 마의로 출발해 현종의 종기를 치료함으로써 숙종 5년에 어의가 된 인물로, 종기 치료에 한 획을 그은 것만은 틀림없어 보인다. 종기 때문에 크게 고생한 현종이 ‘백태의(白太醫)’의 신화를 만든 셈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백광현이란 인물은 드라마처럼 현대 양방의 수술법을 쓰는 전설적 명의였을까. 숙종, 영조 때의 문장가였던 정내교(1681~1757)가 지은 ‘완암집(浣巖集)’ 4권 중 ‘백태의전(白太醫傳)’은 백광현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본디 말을 잘 치료했다. 오직 침을 써서 치료했는데 서책(의서)을 통해 배운 것이 아니고 오랫동안 익히다보니 솜씨가 숙련된 것이다. 말 치료하던 침술을 종창(腫瘡)을 앓는 사람에게 써봤더니 종종 탁월한 효험이 있기에 마침내 사람을 치료하는 데 전적으로 힘쓰게 됐다.”

    한국문집총간 ‘귀록집(歸鹿集)’ 14권의 ‘백지사묘표(白知事墓表)’에는 “젊은 시절 말 타기와 활쏘기를 익혀 우림군(羽林軍)에 배치되는데, 말에서 떨어져 다친 뒤 한동안 앓은 것을 계기로 의술에 뜻을 두게 됐다. 무릇 독소가 강하고 뿌리가 배긴 정저(?疽·헌 부위의 꼭대기가 검고 못같이 된 종기)는 예부터 내려오는 처방엔 치료법이 없었다. 그런데 백광현은 앓는 자를 만나면 반드시 대침(大鍼)을 써서 터뜨리고 찢어 독소를 빼내고 뿌리를 뽑음으로써 거의 죽어가던 자를 능히 살려냈다”고 전한다.

    승정원일기 숙종 16년 1월 14일 기사는 “오늘날 침의 중에 하침(下鍼·침놓기)과 파종(破腫·종기 제거)에서 백광현이 으뜸”이라고 썼다. 백지사묘표는 “백헌 이경석(1595~1671·영의정)의 천거로 내의원에 들어가게 됐으니, 이때가 현종 4년”이라고 적고 있다. 기록에 따르면 백광현은 30여 년 동안 현종과 숙종 두 조정을 대대로 섬기면서 여러 차례 신효(神效)의 공을 인정받았다. 그때마다 품계가 더해져 의성(醫聖) 허준과 같은 종1품 숭록대부(崇祿大夫)까지 올랐다. 승정원일기엔 백광현이 현종의 종기를 치료하는 상황이 상세히 묘사돼 있다.

    “상이 전날 치료한 종기에서 농이 잘 빠지지 않은 것 같다고 하자 백광현은 그의 장기인 침봉(鍼鋒)을 사용하면서 임금께 ‘종기의 구멍을 칼날처럼 뾰족한 침봉으로 뚫어 배농시키겠다’고 대답했다. 상은 혹시 구멍이 넓어지면 잘 아물지 않을까 걱정한다. 하지만 구멍이 얕게 잘 뚫리면서 많은 농이 배출됐다. 의관 중 김유현이 농이 배출될 종기 구멍이 다시 닫히지 않도록 종이를 말아 구멍 사이에 끼워놓았는데, 상은 종이를 끼워둔 통증이 한 식경까지 갈 정도로 심하다고 털어놓았다.”

    백광현의 종기 치료법은 100여 년 전에 나온 동의보감 옹저문의 치료방법과 유사했다.

    ‘옹저로 곪을 때는 말에 물리는 재갈로 부추 잎처럼 양쪽이 다 날이 서게 침을 만들어 열십자로 째고 고름을 짜낸다. 옹저가 생긴 곳의 피부가 두껍고 고름이 나오는 구멍이 작아서 잘 나오지 않을 때는 화침으로 째는 것이 좋다. 고름이 나오지 않으면 심지를 꽂아 넣어야 한다.’

    기록상의 백광현은 허준이나 조선 최고 침의 허임 등에 비교하면 별 볼일이 없었지만 그 후손들은 종기 치료로 일가를 이룬다. 숙종 10년에는 그의 아들 백흥령이 아버지의 후광을 입어 금위영 침의가 됐고, 박순이 백광현의 제자로 이름을 날렸다. 백흥성 백문창 백성오 등 그의 자손들은 영조에서부터 헌종 대에 이르기까지 승정원일기에 이름을 올린다.

    한방 외과학 선구자 임언국

    당쟁, 强臣, 정통성 논란 만병 불러온 ‘임금 스트레스’

    드라마 ‘마의’에서 백광현의 스승이자 한방 외과술의 선구자로 묘사된 사암도인. 사암도인은 사암침법으로 유명하지만 한방 외과술의 새 경지를 연 사람은 임언국이다.

    드라마 ‘마의’는 한방 외과술이 백광현과 그의 스승으로부터 시작되고 정착된 것처럼 그렸지만, 전통의학에서 외과술의 유래는 18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설적 명의로 ‘삼국지’에도 나오는 화타(145~208)가 원조 격이다. 삼국지에서 화타는 조조에게 거리낌 없이 외과적 치료법을 제안하다 죽임을 당한다.

    “대왕의 머리가 아픈 것은 머릿속에 바람이 일기 때문입니다. 병의 뿌리가 골을 싸고 있는 주머니 안에 있으니 약으로는 고칠 수 없습니다. 마비산(痲沸散)으로 만든 탕을 드시고 잠든 후에 머리를 쪼개 그 안의 바람기를 걷어내야 합니다.”

    화타가 말한 마비산은 대마와 만다라화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농본초경은 대마를 “많이 먹으면 사람이 귀신으로 보여 달아난다”고 했고, 명의별록은 “인삼에 섞어 먹으면 앞일을 미리 안다”라고 했다. 마취에 대한 설명은 없고 향정신성 약물이라고 규정한다. 중약대사전에서 기록한 만다라는 좀 더 구체적이다.

    “독이 있는데 종자의 독성이 특히 강하다. 가지과의 식물로 흰독말풀 종류다. 세 알만 씹어도 중독될 수 있으며 맥박이 빨라지고 동공이 확대된다. 다량으로 먹으면 혈압이 내려가고 혼수상태에 빠진다.”

    평생 암살의 공포에 떨었던 조조는 ‘머리를 쪼갠다’는 말을 듣고는 화타를 옥에 가둔 후 죽여버렸다. 화타의 외과적 치료는 인도 의학의 전래로 추정되지만 후세로 전수되지 못했고 이후 한의학에서 외과학은 사라졌다.

    종기가 흔했던 우리나라의 외과학은 피고름을 빼내는 종기 치료를 가리킨다.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인물은 이상로(李尙老)다. 아버지가 묘청과 잘 알고 지낸다는 이유로 권력에서 소외돼 방랑했지만 승려에게서 의학을 전수받고 의사가 됐다고 한다. 종기를 잘 치료해 권세가를 여럿 치료했는데 의종(毅宗)의 발에 난 종기도 치료했다고 전해온다.

    우리나라 최초의 외과전문서는 ‘치종비방’으로, 조선 명종 때 활약한 임언국(任彦國)이 쓴 책이다. ‘치종지남’이라는 책도 있는데 임언국과 그의 유파가 저술한 것으로 추정된다. 드라마에선 백광현의 외과술이 임언국보다 더 뛰어난 것으로 묘사되지만 확인할 길이 없다. 치종지남은 9장밖에 되지 않지만 나름대로 독창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13종으로 분류돼 있던 종기를 5가지로 새로 분류한 점, 직접 개발한 고약 ‘토란고’로 종기를 치료한 점, 천금루노탕이라는 처방을 재구성해 사용한 점 등이다. 특히 X자형 절개술은 침을 찔러 피고름을 터뜨리는 기존의 종기 치료 침법과는 차원이 달랐다. ‘농침’은 침이라는 명칭은 붙었지만 피부를 절개하기 위한 칼 모양으로 생겼으며 ‘곡침’은 끝이 갈고리 모양으로 무엇을 긁어내는 도구 형태를 띠고 있다.

    임언국은 양반가에서 태어나 유학을 공부하다 어머니가 종기를 앓아 낫지 않자 영은사의 노스님에게 침술을 전수받아 치료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은사는 임언국의 고향 정읍에 있는 내장산 내장사의 옛 이름이다. 당대의 학자이며 관리인 어숙권은 임언국의 치료 모습을 보고 그 외과술의 뿌리를 이렇게 설명했다.

    “임언국은 종기를 치료하고 난 뒤 반드시 앵무새 고기를 불에 태워 그 재를 종기 구멍에 발랐다. 그 이유를 묻자 한 동네에 살던 마의가 말의 종기를 치료한 뒤 늘 앵무새 고기를 태워 재를 발랐는데 효과가 좋아 자신이 사람에게 발라보니 역시 효과가 좋았다고 했다. 그 후에는 족제비를 불에 태워 그 재를 종기 구멍에 발라주며 치료했다고 한다.”

    백광현은 임언국의 후예?

    드라마에선 백광현 스승 고주만이 치종청을 만들고 이후 사암도인과 함께 이를 발전시킨다고 나오지만, 고주만은 실제 인물이 아니고 사암도인은 사암침법만 전해올 뿐 생몰연대도 알 수 없는 인물이다. 치종청은 조정이 종기를 전문적으로 치료해 백성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설치한 종기 전문 의료센터로 성종 때 만들어진 뒤 폐지와 복원을 반복했다. 조선 후기 학자 김려가 쓴 야담(野談) 총서 ‘한고관외사(翰皐觀外史)’는 ‘임언국이 종기를 잘 치료하는 것으로 유명해 영남에 있는 이이(李耳)라는 선비와 더불어 종기 치료 학교를 처음 설립했다’고 밝히고 있다. 임언국의 의료사적 위치를 짐작게 한다.

    선조 때 활약한 조선 최고의 침의 허임도 임언국의 영향으로 ‘치종교수’라는 공식 직함을 갖게 된다. 종기의 원인을 심경락에 두고 기죽마혈(騎竹馬穴)에 뜸을 뜬 점, 두꺼비 독과 태운 재를 종기 치료에 이용한 점 등은 임언국의 경험을 수용했거나 전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드라마는 백광현이 이런 치료법을 쓴 것으로 묘사했지만 사실 그 시초는 임언국이라 볼 수 있다. 임언국의 이런 외과적 치료방식의 뿌리가 마의로부터 비롯됐고, 백광현이 마의 출신인 점에서 차용된 드라마적 상상력일 뿐이다.

    당쟁, 强臣, 정통성 논란 만병 불러온 ‘임금 스트레스’
    이상곤

    1965년 경북 경주 출생

    前 대구한의대 안이비인후피부과 교수, 대한한의사협회 외관과학회 이사

    現 갑산한의원 원장, 한의학 박사, 동아일보·농민신문·프레시안 칼럼 진행

    저서 : ‘콧속에 건강이 보인다’ ‘코 박사의 코 이야기’ ‘낮은 한의학’ 등 다수


    임언국의 외과적 종기 치료술은 관념적, 유교적 치료 방식의 벽에 가로막힌 한의학에 새로운 길을 여는 전기를 마련했지만, 그 벽은 너무 높았고 한의학은 거대한 유학의 벽 앞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다. 따라서 ‘마의’나 ‘백광현’은 드라마처럼 현대 양방에서 이뤄지는 본격적 외과술을 몇 백 년 앞서 개발한, 전설적 능력을 지닌 과장된 존재가 아니라 한방 외과술의 막을 올린 임언국의 후예쯤으로 보는 게 맞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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