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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곤 박사의 ‘왕의 한의학’

게와 감, 상극 음식 먹고 절명

간질과 비만에 시달린 경종

  • 이상곤 │갑산한의원 원장·한의학 박사

게와 감, 상극 음식 먹고 절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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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와 감, 상극 음식 먹고 절명

2003년 방영된 TV 사극 ‘장희빈’에서 사약을 받고 죽은 어머니를 부여잡고 슬퍼하는 경종. 실제의 경종은 어릴 때부터 비만이었다.

조선의 제20대 왕 경종(景宗·1688~1724, 재위 1720∼1724). 숙종과 희빈 장옥정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세자 때부터 신변, 정치와 관련해 갖은 수난을 겪은 비운의 왕이었다. 32세에 왕위에 올라 재위 4년간 병치레만 하다 생을 마감했다. 그의 재임기는 소론과 노론이 세제(世弟·연잉군, 후일 영조) 책봉을 두고 피의 숙청(1,2차 신임사화)을 벌인 당쟁의 절정기였다. 자식이 없고 병약해 이복동생 연잉군을 세제로 책봉했지만 노론의 압박으로 세제에게 대리청정을 맡기고 물러날 위기에 몰리기도 했다. 하지만 소론의 지지로 다시 친정을 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실록에 따르면 경종은 ‘형용하기 어려운 질병’을 앓고 있었다. 실록 곳곳에 경종의 ‘이상한 질병’에 대해 언급하는 대목이 나온다. “내가 ‘이상한 병’이 있어 10여 년 이래로 조금도 회복될 기약이 없다.”(재위 1년 10월 10일) “도승지 김시환이 나랏일을 의논하기 위해 들어왔는데 의관들의 입진 후 화열이 오른 상의 심기가 대발(大發)했다. 여러 신하가 놀라 두려워하며 물러갔다.”(재위 2년 3월) “상이 동궁에 있을 때부터 쌓인 걱정과 두려움으로 마침내 형용하기 어려운 질병을 앓았다. 해가 지날수록 고질이 됐으며 더운 열기가 위로 올라와서 때로는 혼미한 증상도 있었다. (…) 곤담환과 우황육일산 등의 처방을 썼지만 효험이 없었다.”(재위 4년 8월 2일)

간질과 발작의 증거

경종이 말한 ‘이상한 병’‘형용하기 어려운 질병’의 정체는 무엇일까. 경종이 복용한 약물은 그의 질병을 알려주는 핵심이다. 그가 왕위에 오른 후 집중적으로 복용한 약물은 가미조중탕이었다. 경종 즉위 원년부터 재위 2년, 3년에 걸쳐 150첩 이상 복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어떤 일에도 잘 나서지 않고 적극성을 보이지 않던 경종은 이 약만큼은 작심한 듯 계속 지어 올릴 것을 의관들에게 주문한다. 그만큼 약효가 좋았다는 뜻이다.

가미조중탕은 일반적으로 대조중탕과 소조중탕으로 나누는데, 고종의 어의이자 국내 최초의 근대적 한의학 교육기관 동제의학교 교수를 역임한 청강(晴崗) 김영훈 선생(1882~1974)의 기록에 따르면 경종이 먹은 가미조중탕은 소조중탕으로 추정된다. 승정원일기 전체에 나타난 가미조중탕의 처방기록은 총 50회 정도로 정조와 순조에게도 투여한 기록이 나온다. 경종에게는 무려 42회가 처방됐다. 동의보감 열담(熱痰) 조문에 나온 소조중탕의 기록은 이렇다. ‘열담이란 곧 화담(火痰)이다. 번열이 몹시 나서 담이 말라 뭉치고 머리와 얼굴이 화끈화끈 달아오른다. 눈시울이 짓무르면서 목이 메어 전광증이 생기는 증상에는 대·소조중탕이 좋다.’

동의보감은 또한 경종에게 쓰인 또 다른 처방인 곤담환의 치료 목표에 대해 ‘습열과 담음이 몰려서 생긴 여러 가지 병을 치료한다. 속을 끓이고 소원이 풀리지 않아서 전광증(癲狂症)이 생기는데 하루 100알씩 먹는다’고 설명한다. 전광증은 현대의학으로 말하면 뇌 구조의 이상으로 발생하는 정신착란이나 정신분열증의 여러 증상을 가리키는 질병으로 때아닌 발작을 일으키는 게 특징이다.

동의보감에 나타나는 소조중탕과 곤담환의 공통적 치료 목표는 전간(癲癎)이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간질이다. 인현왕후(숙종의 계비)의 둘째 오빠 민진원은 영조 4년 궁중에서 일어난 사건을 초록한 책 ‘단암만록’에서 경종의 정신과적 증세에 대해 ‘숙종 승하 시 곡읍(곡하며 우는 행위)을 하는 대신 까닭 없이 웃으며 툭하면 오줌을 싸고 머리를 빗지 않아 머리카락에 때가 가득 끼어 있었다’고 썼다.

경종의 간질증상을 유추할 수 있는 또 다른 기록은 숙종 15년 11월 8일 실록에 쓰인 ‘경휵(警)’이란 단어다. ‘원자(경종)에게 경휵의 증세가 있어 약방의 여러 신하가 청대하여 조양하는 방법을 갖추어 진달하였다.’ 여기에서 ‘경(警)’은 ‘놀란다’는 뜻이고 ‘휵()’은 ‘경련’ ‘쥐가 나다’란 의미의 발작성 경련과 간질을 가리키는 말이다.

돌팔이 이공윤에 당하다

많은 드라마에서 경종의 모습은 마른 체형에 파리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비만 체형이었다. 승정원일기의 기록이 이를 뒷받침하는데, 26세 때인 1714년 기사에는 경종의 모습을 ‘비만태조(肥滿太早·아주 일찍부터 살이 찌다)’라고 했고 재위 2년 기사에는 ‘성체비만(成體肥滿·다 커서도 살이 쪘다)’으로 묘사돼 있다. 비만한 만큼 더위를 많이 느끼고 땀이 많이 나는 질환을 앓았다.

이런 경종의 비만병 치료에 이공윤이라는 사람이 나섰는데, 조선 후기의 유의(儒醫)로 알려져 있지만 언제 태어나고 죽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이공윤에 대한 평가를 담은 실록 기록은 이렇다.

‘경종 2년 천거된 후 약방에 들어가 임금의 병환을 모셨는데, 이공윤이 스스로 말하기를 도인승기탕을 자주 복용해 설사를 하고 나면 몸 내부가 깨끗이 청소되고 임금의 병환이 금방 나을 수 있다고 해 실제 시험해보았지만 효험이 없었다. 그런데도 이공윤은 오히려 방자하게 노기 띤 눈으로 스스로 의술을 자랑하며 시평탕에 대황, 지실 등 설사하는 약을 재료로 처방해 일백하고도 수십 첩을 임금에게 지어 올렸다. 그러자 임금의 살은 빠지지 않고 비위 등 내장만 허해졌고, 오히려 음식을 싫어해 물리는 날 수가 많아지면서 한열(寒熱·오한과 발열)의 증세까지 생겼다.’

이공윤이 의학과 관련해 기록에 등장한 것은 경종 이전 숙종 35년, 유천군 이정과 더불어 의약동참(議藥同參)에 뽑히면서부터였다. 의약동참이란 조선시대 내의원 소속의 의관으로 주로 임금이나 왕비, 세자 등의 병을 치료한 의관으로 정원은 12명이었고 모두 어의로 불렸다. 이후 춘천의 제방 쌓는 일에 개입해 부당하게 뇌물을 받은 일로 중죄인이 되어 양산에 유배됐지만 경종의 질병이 악화되면서 복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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