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1월호

여의(女醫) 파격 대우하고 장금에게 내밀한 치료 맡겨

산증(疝症)으로 대소변 제대로 못 본 중종

  • 이상곤 │갑산한의원 원장·한의학 박사

    입력2013-10-18 17:3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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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의(女醫) 파격 대우하고 장금에게 내밀한 치료 맡겨

    중종 초상.

    조선의 왕들에겐 각자 믿고 의지하는 의사들이 있었다. 선조 때는 허준이 있었고, 광해군은 허임을 총애했는가 하면 인조는 이형익을 믿고 자신의 몸을 맡겼다.

    임금의 신체와 관련한 여러 가지 정보는 나라의 극비 사항에 속하는 중요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왕의 건강을 챙기고 심기를 안정시키는 의약에 관한 일의 총책임은 당연히 유학자인 사대부의 몫이었다. 내의원 제조라는 직책은, 치료 기술은 의사에게 맡기지만 그 논리적 타당성과 검증은 유학자가 맡아야 한다는 당위성에서 출발했다.

    유학자 이이교(李利敎)는 이렇게 설명했다. “내가 일찍이 술수에 관한 책을 본 적이 있다. 점을 치거나 의술을 펴거나 관상을 보는 것, 풍수를 논하는 것은 각각 하나의 기능에 치우친 것일 뿐이어서 심신을 다 보충할 수 없다. 유학은 성현이 준행한 바이며 오직 의리로써 설하였기에 사람이 입문하기에 어렵다.” ‘세상의 중심은 유학’이라고 외친 것이다.

    ‘약방기생’ 전락한 女醫

    대장금(大長今)은 중종(中宗·1488~1544, 재위 1506∼1544)이 가장 신뢰하고 의지하면서 내밀한 문제까지 치료를 맡긴 여의(女醫)였다. 유학자의 세상, 그것도 남성 위주의 조선사회에서 여의 대장금은 어떻게 중종의 신뢰를 얻었을까. ‘조선왕조실록’은 치료에 관한 세세한 부분은 밝히지 않았으나 대장금이 중종과 얼마나 밀착해 그의 총애를 받았는지에 대해선 기록을 남겼다.



    여의가 처음 생겨난 때는 태종 6년. 허도(許)가 건의했다. “그윽이 생각건대, 부인이 병이 있는데 남자 의원으로 하여금 진맥하여 치료하게 하면, 혹 부끄러움을 머금고 나와서 그 병을 보이기를 즐겨 하지 아니하여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원하건대, 창고(倉庫)나 궁사(宮司)의 동녀(童女) 수십 명을 골라 ‘맥경(脈經)’과 침구(鍼灸)의 법을 가르쳐서 이들로 하여금 치료하게 하면, 거의 전하의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에 보탬이 될 것입니다.”

    태종이 제생원(濟生院)에 명해 동녀에게 의약을 가르치게 한 게 여의의 시작이다. 교육을 마쳐도 여의가 되는 건 극소수에 불과해 태종 18년 기록에 따르면 7명에 그쳤다. 의녀는 그 능력에 따라 내의녀, 간병의녀, 초학의녀 등 세 등급으로 나뉘었고, 수업 연한은 3년이었다. 내의녀는 진료와 치료를 전문으로 한 사람이다. 간병녀는 간병을 주로 담당했는데, 여기엔 조산의 역할이 포함됐다. 초학의녀는 간병하지 않고 학업에만 전념했다.

    여의의 지위는 역대 왕의 관심도에 따라 부침이 심했다. 전문성을 위주로 진료하는 여의들을 창기(娼妓)와 같은 자리로 끌어내린 건 연산군이다. 연회에 내의원 의녀를 부르면서 ‘약방기생’으로 만든 것이다. 이후 사대부의 잔치나 관원들의 유희 대상으로 전락하면서 여의의 제자리 찾기는 큰 어려움을 겪는다.

    그런데 의녀에 대한 중종의 대우는 파격적이다. 중종 5년엔 연산군 때 생긴 폐습을 없애려고 관원의 연회에 의녀를 부르는 것을 엄금하는 법을 만들었다. 이는 아마 중종과 밀접했던 장금의 건의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기강이 한번 무너지면 복구하기 힘든 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중종 30년엔 의녀를 희롱한 사건으로 대사헌 허항이 체직(遞職·벼슬이 갈리는 것)할 것을 왕에게 요청한다. 혜민서 훈도들이 돈을 받고 자신의 형인 제조 허흡이 통솔하는 여의들을 휴가를 보내는가 하면 술을 먹이고 희롱해 대사헌의 체면을 구겼다는 내용이고 보면 법을 시행한 이후에도 약방기생이란 오명은 계속된 듯하다.

    “내 증세는 장금이 안다”

    여의(女醫) 파격 대우하고 장금에게 내밀한 치료 맡겨

    드라마 ‘대장금’. 대장금은 중종이 총애한 여의였다.

    한류(韓流)의 중심 드라마 ‘대장금.’ 조선조 당시 여의에 대한 일반적 시각에서 보면 드라마 내용이 과장되지 않았느냐는 지적이 나왔다.

    중종과 장금에 대한 기록은 1515년 중종 10년 3월 8일에 처음 나타난다.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가 그해 2월 25일 원자인 인종을 생산하고 위독해졌다가 숨을 거둔다. 이때 장금은 인종마저 위독해지는 상황에서 그를 살리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다. 하지만 관례대로 대간은 장경왕후의 죽음에 대한 책임 소재를 밝히며 벌을 주라고 건의한다. “의녀 장금의 죄가 의원 하종해보다 더 심하다.” 하지만 중종은 그 건의를 물리친다.

    1533년 1월 9일 중종은 종기를 앓아 고생한다. 이때 내의원은 장금에게 치열한 ‘견제구’를 던진다. 내의원 장순손은 말한다. “대체로 종기를 앓을 때는 젊은 여자로 하여금 가까이 모시게 해서는 안 됩니다. 종기가 터진 후에도 더욱 부인들을 기피해야 미더운 일입니다”라면서 장금의 접근 자체를 막고 나선다. 그런 견제 때문이었는지 장금의 진료 기록은 중종의 죽음 문턱에서야 나타난다.

    실록에 장금에 대한 기록이 몇 차례 나타나지만 의료와 관련해 분명한 사실은 중종 39년 10월 26일의 기록이다. “상에게 병환이 있었다.” 중종이 미리 문안하지 말라고 한 탓인지 정원이 미안해하면서 문안하고 증세를 묻는다. 중종은 건조한 말투로 대변이 어려워서 처방을 의논하고 있다고만 말한다.

    이어서 나온 기록은 놀랍다. 다름 아니라 내의원 제조가 묻는 것이다. 내의원 제조는 알다시피 임금의 진료를 담당하는 자리다. 의료 총괄 책임자가 임금의 증세를 진료하는 게 아니라 되레 문안하는 자리로 역전되면서 장금에게 증세를 물어본 것이다. 중종은 답한다. “내 증세는 여의가 안다.” 여기서 여의는 장금이다.

    더욱 놀라운 기록이 이어진다. 당시 중종이 앓은 질병은 산증(疝症)이다. 산증은 하복의 통증이 위로 치받쳐 오르는 것이다. 중종은 자신의 병에 대해 설명한다. “요즈음 날씨가 갑자기 한랭해져서 많은 한기가 배로 들어가서 냉기가 쌓여 대소변이 편안하지 못하다.” “그날 밤 장금이 나와서 말하기를 지난밤 왕이 삼경에 잠이 들고 오경에 다시 잠이 들고 소변을 보았으나 대변은 삼일째 불통이다.” 밤을 새우며 진료한 사람은 바로 의녀 장금이었던 것이다.

    의관들은 증세에 맞춰 여러 날에 걸쳐 반총산이란 처방을 투여한다. 하지만 차도가 없자 극적인 처방을 구사한다. 밀정(蜜釘)을 사용한 것이다. 밀정은 밀전도법을 이야기한다. 관장법을 통해 대변을 배출하는 것이다. 피마자기름이나 통유탕 등 대변을 보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다 직접 관장을 하게 된 것은 임금과 장금의 관계를 잘 설명해준다. 10월 29일 실록은 임금이 대변을 통했다고 기록했다. 장금은 이렇게 가장 내밀한 부분까지 치료하면서 왕을 모신 유일한 의녀였지만, 이후 역사 어디에도 그에 관한 기록은 없다.

    찬 음식 즐긴 중종

    제주도 의녀들의 기록은 특별히 기록돼 있다. 세종 13년 제주 의녀 효덕은 안질과 치통을 잘 치료해 세종이 쌀과 장 등을 하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실록엔 성종 23년에 임금이 치통을 앓자 이비인후과의 유명한 의사를 초빙하라는 명을 내린다. 치통 치료에 일가견을 지닌 제주 의녀 장덕이 죽은 뒤라 그 제자인 귀금을 불러 자초지종을 물어본다. 제주도 의녀가 몇 대에 걸쳐 특별한 기술을 갖고 있었다는 얘기다.

    조선 왕의 평균수명을 보면 왕 노릇이 생명을 단축한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대체로 왕실에서 자란 사람들은 질병에 자주 걸리고 단명하며, 반정을 통해 왕이 되거나 외부에서 갑작스럽게 왕이 된 이들은 질병도 없고 장수하는 경향이 강하다. 중종은 반정으로 왕이 된 대표적인 경우다. 중종은 40세에 이르러서야 종기를 앓아 치료받은 기록이 처음 나타난다. 어깨 부위가 아프고 붓는 종기가 생긴 것이다.

    합병증으로 기침과 치통까지 생기면서 치료 순서를 고민하다 종기를 먼저 치료하기로 결정하고는 천금루노탕이란 처방을 복용하고 종기를 침으로 터뜨린다. 종기는 의외로 곪지 않아 태일고, 호박고, 구고고 등 고약을 붙인다. 거머리로 하여금 빨아먹게 하고서야 종기가 호전된다. 거의 6개월이 지나서야 종기가 나아지면서 의관들에게 상을 준다.

    이후 중종은 건강을 회복하고 임종을 맞는 재위 39년, 57세 되던 해에 다시 질병을 호소한다. 39년 1월 17일 기록을 보면, 치통은 나았지만 잇몸이 아직 아프고 기침병도 생겨 경연(經筵)을 열지 못했다. 기침병을 치료하는 처방은 삼소음이다. 삼소음은 기운을 북돋우는 사군자탕을 기본으로 감기약을 첨가해 위장의 온기를 북돋우면서 가슴을 시원하게 하고 기침을 진정시키는 처방이다. 몇 차례 복용 후 기침 증세가 호전되자 찬 음식을 피해야 재발이 없을 것이라는 건강 지침을 준다. 거꾸로 해석하면 중종은 찬 음식을 즐겼다는 얘기다.

    4월이 되면서 중종이 다시 호소한 증세는 어깨 통증이었다. 구고고 등 고약을 붙여보고 찜질도 하면서 치료하지만 신통찮은 효험으로 고민한다. 중종은 오목수(五木水)로 치료하고자 반문한다. 오목수는 5종류의 나무에서 나오는 물을 말한다. 곧 홰나무[槐], 뽕나무[桑], 복숭아나무[桃], 버드나무[柳], 느릅나무[楡] 혹은 닥나무[楮] 등에서 나오는 수액에 물을 타서 목욕하거나 오목을 끓여 목욕물로 사용하는 처방인데 효험이 좋았던 것 같다. 중종은 덧붙여 오목수로 목욕하면서 쉬고 싶다는 뜻을 은근히 피력한다.

    또 다른 기록은 오목수의 효능이 상당히 보편적이었음을 나타낸다. 숙용 김씨가 온천수로 목욕하러 가고자 청하자 “이제 과연 농사철인데 왕자군이 선왕의 후궁을 모시고 왕래하는 것은 옳지 않다. 오목수와 벽해수(碧海水·바닷물)로 목욕을 하면 병을 고칠 수 있으니, 내려가지 말라”고 이른다.

    똥, 오줌이 약재로

    10월 24일부터 중종은 대변이 막혀 곤욕을 치른다. 10월 29일 대변이 통하자 한숨을 돌렸지만 임종의 그림자가 다가온다. 11월이 되자 심열과 갈증을 호소한다. 혀가 갈라지고 입이 마르고 손바닥에도 번열이 있자 청심환, 생지황고, 소시호탕 등 다양한 처방을 통해 치료한다.

    재위 39년 11월 4일 의관들은 아주 특별한 약물을 처방한다. 야인건수(野人乾水)다. ‘동의보감’은 이 처방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성질이 차서 심한 열로 미쳐 날뛰는 것을 치료한다. 잘 마른 것을 가루로 만들어 끓는 물에 거품을 내어 먹는다. 남자 똥이 좋다.”

    여의(女醫) 파격 대우하고 장금에게 내밀한 치료 맡겨

    조선시대 왕의 배설물을 담았던 ‘매화틀’. 왕의 배설물은 나인이 궁중의 내의원에게 갖다줘 왕의 건강을 검진토록 했다.

    11월 8일 박세거가 들어가서 임금을 진찰하고 이렇게 적었다. “갈증이 줄어들고 열은 이미 줄었다.” 중종도 이런 효험을 인정했다. “전일 열이 올랐을 때 야인건수를 써서 열을 물리쳤다. 혹시 밤중에 열이 심하면 쓰려고 하니 미리 준비해서 들여오라 했다.”

    야인건수는 전염병에 열이 심할 때 먹으면 관 속에 든 사람도 살아 나온다고 해서 파관탕이라는 이름이 붙기도 했다. 판소리 명창들이 득음을 하기 위해 목에서 피가 나오고 열이 나면 절간의 똥물을 길어다 끓인 다음 마시고 치료했다는 이야기도 같은 논리선상에 있다.

    이 처방의 뿌리엔 쓸개즙이 있다. 음식을 먹으면 위장에선 갖가지 음식 색깔이 버무려지지만 대변을 보면 노란색이다. 노란색은 쓸개즙이 희석됐을 때 나타나는 색이다. 황달이 생겨 쓸개즙이 간으로 역류해 혈액 속에 퍼지면 노란색이 되는 것과 같다. 똥 속엔 분해된 쓸개즙의 일부가 포함돼 열을 식혀준다. 오월(吳越) 전쟁 때 월나라 왕 구천이 와신상담했다는 고사는 스트레스로 인한 열을 쓸개즙을 맛보면서 식혔다는 방증이다.

    오줌도 약으로 쓰였다. 환원탕이란 이름으로 처방됐다. 송시열 선생이 어린아이의 오줌을 받아 마셔 건강을 유지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오줌을 달여 만든 약을 추석(秋石)이라고 하는데 정력 보강에 좋은 약재다. 물론 추석도 음련추석과 양련추석으로 나뉘어 음기와 양기가 허약한 사람을 각각 보충한다. 특히 약효가 좋은 것은 7세 이전 어린아이의 오줌이다. 궁중 내의원에선 관상감, 봉상시, 사역원에서 교육받는 어린아이를 동변군으로 차출해 소변을 받아 한약재 가공 재료로 사용했다.

    중종은 8회에 걸쳐 야인건수를 복용한다. 그때마다 열이 잡히면서 치료 성과를 올린다. 죽기 전날까지도 야인건수와 청심원을 처방한다. 하지만 마지막 날은 열이 잡히지 않으면서 불알이 오그라졌다. 죽음을 앞두고 생명력이 다했음을 기록한다.

    치통엔 엽기적 처방

    치과가 없었던 옛날엔 치통을 어떤 시각에서 바라보고 치료했을까. 실록은 중종이 치통으로 고통받았음을 여러 차례 기록했다. 재위 34년 중종이 치통 때문에 영정을 맞는 일을 세자에게 하도록 맡긴다. 39년 다시 치통이 말썽을 부리자 의관과 치통에 대해 구체적으로 논의한다. “나에게 본디 이앓이 증세가 있는데 아픈 것은 빠졌으나, 지금 있는 이가 또 아프고 흔들린다. 이 이가 빠지면 음식을 먹기 어렵겠고 잇몸도 붓고 진물이 나오는데, 약으로 고칠 수 있는가?”

    중종은 원인도 스스로 분석했다. “감기엔 반드시 열기가 생기므로, 이가 움직일 때 잇몸도 헐고 열이 나니 감기 때문에 일어난 듯하다. 잇몸이 조금 붓고 진물이 나는데 어떻게 하면 이를 튼튼하게 할 수 있겠는가.” 강현이 대답한다. “먼저 옥지산으로 양치질한 다음에 청위산을 복용하고 뇌아산을 아픈 이 겉에 바르고, 또 피마자 줄기를 아픈 이에 눌러 무는데 뽕나무 가지를 써도 됩니다. 다만 뇌아산에는 양의 정강이뼈를 넣으므로 쉽게 지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잇몸엔 치조골 인대가 붙어 있다. 인대는 뜨거우면 늘어나 결합이 단단하지 못하게 되면서 구강의 노폐물이 이와 잇몸 사이를 채우면서 느슨해진다. 이런 상태가 지속되면 염증이 잘 생기는데, 이것이 풍치의 원인이다. 중종은 이런 원리에 대해 확실히 이해하고 있었다.

    ‘동의보감’은 잇몸이 패어 이뿌리가 드러나고 치아가 흔들리는 현상을 다시 튼튼하게 되돌리는 처방을 제시한다. 양의 정강이뼈와 몇 가지 약재를 조합한 ‘엽기적’ 처방이다. 그러나 ‘중약대사전’에 보면 양 정강이뼈의 화학적 성분은 인산칼슘이 절반이고 불소가 중요한 성분으로 포함돼 있다고 분석한다.

    치아를 구성하는 주요 성분이 인산칼슘이고 충치를 막고 보호하는 불소가 포함돼 있다는 사실은 현대과학으로 분석해도 근거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치아문’에는 버드나무 껍질로 치통을 치료하는 조문이 나온다. 버드나무 껍질이나 잎을 끓여서 머금었다 뱉으면 어금니의 아픈 통증을 치료할 수 있다고 적었다.

    아스피린의 원료는 살리실산인데, 이는 버드나무 껍질에서 추출해 얻을 수 있다. 진통제의 원조가 아스피린인 것을 보면, 조상의 지혜가 현대 과학과 맞닿아 있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이야 임플란트로 빠진 치아를 보강하겠지만 옛날엔 어떤 방식으로 치료했을까. 낙치중생방(落齒重生方)이란 조문에는 빠진 치아를 재생하는 엽기적인 처방이 등장한다. “치아를 다시 나오게 하는 데는 숫쥐뼈를 가루로 만들어 쓴다고 하며 뼈를 발라내는 방법까지 기재하고 있다(쥐를 잡아 껍질을 벗긴 다음 노사라는 약물을 문지르면 3일이 지나서 살은 다 헤어지고 뼈만 남는다).” 또 한 가지 처방이 기재돼 있다. “눈을 뜨지 못한 쥐새끼 3~4마리를 5가지 약재를 넣고 빚어서 사용한다.”

    쥐가 이빨에 특징을 지닌 설치류임을 감안한다면 한의학이 약물을 쓰는 원리, 즉 살아가는 생기를 빌려 약물로 쓴다는 원리가 반영된 처방인 셈이다.

    조광조를 賜死하다

    여의(女醫) 파격 대우하고 장금에게 내밀한 치료 맡겨

    중종에게서 사약을 받고 죽은 조광조 그림.

    중종의 총서는 중종 시대를 이렇게 평가했다. “중년에는 학문을 좋아하고 착한 일을 즐겨 하여 옛날 정치에 뜻을 집중하였으나, 신진(新進)만을 전임(專任)하였으므로 일이 과격한 것이 많아 뜻을 능히 성취하지 못하였다. 그 뒤에 비록 여러 차례 간사한 사람들에게 속임을 당하였으나, 능히 다시 개오(改悟)하였으니 학문의 힘에 힘입은 것이었다.”

    조광조는 중종 시대의 아이콘이다. 앞에서 언급한 신진의 대표주자는 조광조였다. 실록 14년 12월 16일 중종은 조광조를 사사(賜死)한다. 그 배경은 이러했다.

    “지난날 조광조, 김정, 김식, 김구, 윤자임, 기준, 박세희, 박훈 등이 모두 시종으로 있으면서 성리의 학문을 아침저녁으로 부지런히 진강하여, 내 그들의 사람됨이 나의 정치를 도와서 이루어줄 수 있으리라 여겼다. 그래서 좋은 관직을 가려서 임명하고 직급을 뛰어넘어 승진시켜서 몇 년 안 되는 사이에 모두 높은 자리에 발탁했으니, 내가 그들을 대우함에 부끄러움이 없다 할 만하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도 조광조 등이 서로 어울려 결탁해서 자기에게 붙는 자는 퇴출시키고 자기와 다른 자는 배척하며, 명성과 위세를 서로 의지하여 힘 있고 중요한 자리를 틀어잡았다. 조종의 법도는 지킬 것이 못 된다 하고 원로의 말씀은 쓸 가치가 없다고 하며, 후배들을 유인해서 과격한 언행이 버릇이 되도록 하고, 심지어 일을 의논할 때 조금이라도 다른 견해가 있으면 반드시 극구 배격하고 막아서 상대를 꺾고 자기를 따르게 하니, 국론이 뒤집히고 나라 정치가 날로 잘못되었다. 조정 신하가 가만히 분개하고 개탄하는 자가 많았다.”

    사관의 평가는 약간은 씁쓸한 어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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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과 독의 양면을 지닌 한약재 부자.

    “전일에 좌우에서 가까이 모시고 하루에 세 번씩 뵈었으니 정이 부자처럼 아주 가까울 터인데, 하루아침에 변이 일어나자 용서 없이 엄하게 다스렸고 이제 죽인 것도 임금의 결단에서 나왔다. 조금도 가엾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으니, 전일 도타이 사랑하던 일에 비하면 마치 두 임금에게서 나온 일 같다.”

    사약을 내리는 장면에 대해서도 상세히 기록했다. 압권은 역시 당시 38세였던 조광조의 사사 장면이다. 사약을 받자 자신의 사사가 진실인지를 알기 위해 의금부 도사 유엄에게 심정(沈貞)의 지위를 묻는다. 그러고는 거느린 사람에게 말한다. “내가 죽거든 관을 얇게 만들어라. 먼 길 가기 어렵다.” 실록엔 ‘거듭 독주를 가져다가 많이 마시고 죽었다’라고 적혀 있다. 거듭 마셨다는 것은 사약을 먹었는데 죽지 않은 것이다.

    다른 기록에 이 부분을 보충하는 이야기가 적혀 있다. 사약을 마셔도 숨이 끊어지지 않아 나졸들이 달려들어 목을 조르려고 했다. 그러자 “성상께서 이 머리를 보전하려 사약을 내렸는데 어찌 너희들이 감히 이러느냐”라고 소리 지르며 독한 술을 더 마시고 죽었다는 것이다.

    두 얼굴의 약재, 부자

    당나라 고종대인 653년에 제정된 당률에선 대표적인 독약으로 짐독, 오두, 부자, 치갈(治葛)을 손꼽았다. 오두와 부자는 같은 종류의 독성 식물이다. 오두는 같은 식물의 모근이고 부자는 그 곁가지인 자근에 속한다. 짐독은 무엇일까. 짐새의 독인데 중국 남해에 살고 있다고 한다. 그 새의 털을 술에 담가두면 독주가 되어 치명적인 독으로 사람을 죽인다고 했다. ‘본초강목’에는 꿩과에 속하고 형태는 공작과 비슷하며 목은 검고 부리는 붉으며 뱀을 통째로 삼키며 이 새가 물을 마신 곳에선 모든 벌레가 전멸한다고 적혀 있다. 오직 코뿔소의 뿔만이 이 짐독을 해소할 수 있다고 하나 그 실체는 전혀 알려지지 않아 다만 독살의 대표적인 이름으로 전해질 뿐이다.

    오두와 부자는 잘 알려져 있다. 부자의 맹독성은 예전부터 사냥에 이용돼왔다. 북반구의 원시민족은 부자 뿌리에서 독성을 추출해 화살독을 만들어 새나 짐승을 잡았다. 중국에선 그 즙을 달인 것을 사망(射罔)이라고 불렀는데, 재미있는 것은 이 독이 사냥한 새와 짐승에서 분해돼 저독성으로 바뀌며 조리하면 무독성이 된다는 것이다. 북반구에서 자라며 남방에선 자라지 않고 독성도 거의 없어진다. 남미 인디언은 화살독으로 큐라레를 사용했다. 방기과의 수지상 흑색 덩어리인데 약물로 개발돼 골격근 이완제와 전신 마취제의 보조제로 사용된다.

    부자는 그 독성으로 인해 ‘독의 꽃’ ‘악마의 뿌리’ ‘살인자’ 등 여러 명칭으로 불린다. ‘골짜기를 못 건넘’이라는 일본식 이름을 얻기도 했다. 서양에선 아코니틴으로 불리는데 그리스의 아코네라고 하는 마을에서 따온 이름이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아코니틴에 의해 사망했으며, 영웅 테세우스를 독살하기 위해 메디아가 사용한 약물도 이것이다.

    부자는 한방에서 쓰는 가장 힘 있는 처방인 팔미지황환에 들어가는 중요한 약재다. 나이 드신 어르신들이 양기가 부족해 야간에 소변을 자주 보는 증상에 좋은 처방이다.

    여의(女醫) 파격 대우하고 장금에게 내밀한 치료 맡겨
    이상곤

    1965년 경북 경주 출생

    前 대구한의대 안이비인후피부과 교수, 대한한의사협회 외관과학회 이사

    現 갑산한의원 원장, 한의학 박사, 동아일보·농민신문·프레시안 칼럼 진행

    저서 : ‘콧속에 건강이 보인다’ ‘코 박사의 코 이야기’ ‘낮은 한의학’ 등 다수


    조광조가 사약으로 먹은 부자나, 부자가 들어가는 팔미지황환이라는 보약 사이의 간극도 큰 것이 아니다. 똑같이 부자가 들어간다. 사약의 부자는 날것이고 팔미지황환에 들어가는 부자는 ‘포제’라고 해서 통째로 구워 오래 숙성한 것이다. 조광조에 대한 퇴계의 평가도 부자와 닮은 측면이 있다. “조광조의 타고난 성질은 신실하고 아름다우나 학문이 충실하지 못했다. 그래서 정치에서 시행한 것이 사리에 지나쳐 합당하지 못한 것이 있어 마침내 일이 실패했다. 만약에 학문이 충실하고 덕성과 재능이 성취된 이후에 정사를 담당하였으면 어디까지 갔을지 짐작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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