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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곤 박사의 ‘왕의 한의학’ <마지막 회>

공통점은 ‘의원들, 공부 좀 더 해라’

무소유적 인간 태종, 욕망적 인간 세조

  • 이상곤│갑산한의원 원장·한의학 박사

공통점은 ‘의원들, 공부 좀 더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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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은 풍질 증상이 여러 차례 반복되자 이를 구체적으로 호소한다. 같은 해 11월 16일 “임금의 손이 회복되지 않아 흘을 잡기가 어렵다고 하였다”거나 세종 1년 4월 29일 “오른팔이 시고 아리며 손가락을 펴고 구부리는 것에 차도가 있어 속히 돌아갈 것을 명했다”는 구절도 있다. 세종 1년 5월 5일엔 상왕이 목이 뻐근하고 아파서 돌아가는 길에 관원들이 나타나지 말 것을 부탁한다.

태종의 풍질 증상을 종합하면 지금의 목 디스크와 유사한 질환이다. 풍질에서 풍은 어떤 의미일까.

‘황제내경’ 태소(太素)의 28권 제풍수류에 보면 ‘바람은 기(氣)와 하나인데 빠르고 다급하면 풍이 되고 천천히 질서가 있을 때는 풍이 된다’고 했다. 여기서 기에는 두 가지가 있다. 자연에서의 대기와 인체 내부에서 흐르는 원기가 그것이다. 자연의 대기가 풍이 되면 감기 증상을 유발해 오한 발열하는 것이고, 내부의 원기가 풍이 되면 뇌혈관 질환이나 관절염 등 풍병을 발병케 한다. 예전엔 명의의 자질을 바람을 잘 관찰하는지를 기준으로 평가했다. 전설적 명의였던 편작(扁鵲)의 작(鵲)은 까치 작이다. 까치는 집을 지을 때 그해 불어올 바람을 예상해 짓기 때문에 나뭇가지 끝에 지어도 바람에 떨어지는 법이 없다. 편작은 바람을 잘 관찰하는 사람이고, 여기서 바람의 원형은 기로써 기의 흐름을 잘 아는 사람이 명의라는 뜻이고 보면 한의학의 본질과 잘 맞아떨어진다.

내부의 원기가 풍이 되어 풍질이 생겼다면 어떤 원인으로 풍이 생겼고, 어떤 장부와 관계가 있을까. 난경(難經)에선 풍은 간과 관계있으며 끈기 있게 일을 많이 하거나 화를 자주 내고 기가 흥분해 가라앉지 않으면 간의 혈이 허해지면서 신경통, 신경마비, 오십견 등의 절육통(節肉痛)이 생긴다고 경고했다. 애간장을 태우는 게 풍의 원인이 된다는 의미다.

풍질 다스리려 온천행



태종은 자신이 국가 이성으로서 국가의 생존 강화라는 큰 목적을 위해 형제, 처가, 사가(私家) 모두에게 피를 뿌린 인물이다. 이 때문에 개인이 겪어야 할 인간적 고통을 피할 수 없었다. 태종 16년 5월 19일, 극심한 가뭄 속에서 기우제를 준비하며 보낸 전지에는 “가뭄의 연고를 깊이 생각해보니 까닭은 다름이 아니라 다만 무인(戊寅)·경진(庚辰)·임오(壬午)의 사건이 부자·형제의 도리에 어긋남이 있었음이다. 그러나 하늘이 그렇게 한 것이지 내가 즐겨서 한 것은 아니다.” 가뭄을 하늘이 주는 벌로 생각한다는 말은 자신의 선택에 따른 부담감이 얼마나 심했는지를 보여주는 격정적 토로다.

태종은 풍질 치료를 위해 약물보다 온천행을 택했다. “나의 풍질에 약이(藥餌)의 효험이 없으니, 온천에서 목욕하여 병을 고치는 것이 비록 의서에는 보이지 않으나, 내 장차 이천(伊川) 온천에 가서 목욕하여 시험하려는데, 어떠하겠는가?” 이후 평산온천을 오가면서 태종의 풍질은 호전과 악화를 반복했다.

태종은 드라마 ‘용의 눈물’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권력쟁취 과정에서 골육을 제거하며 흘린 피눈물을 용의 눈물로 정의하겠지만, 진짜 용의 인간적 눈물은 막내아들인 성녕대군의 죽음 과정에서 흘렸다. 태종 12년 6월 23일 중궁인 원경왕후 민씨는 막둥이 아들을 낳았다. 출산 후 내의원에 근무한 어의들에게 상을 후하게 내린 건 물론이고 자신의 감정을 숨김없이 표현했다. “내가 심히 기뻐한다.”

태종 18년 성녕대군은 갑자기 전염병인 완두창에 걸려 위독해졌다. 흥미로운 것은 조선 전기 의료의 실상이다. 의학(醫學)의 한자인 ‘醫’는 본래 받침이 ‘酉’가 아니라 ‘巫’다. 의학의 기원을 무속으로 본 것이다. 고대에는 무당을 의사의 역할을 대행하는 치유자로 판단했다. 역사 기록도 이런 견해를 반영한다. “지금 세상은 병이 나면 점치고 기도를 드린다. 그러므로 질병이 더욱 심해진다. ‘여씨춘추’ 진수편(盡數篇)에서 무당인 무의는 황제에게도 접근했다. 한(漢) 무제가 병에 걸리자 무당을 불러 제사를 지내고 난 뒤 병이 나았다. 이후 무제는 무당의 권유에 따라 자신을 감추고 그림자 정치를 펼친다.

조선 전기만 해도 전염병은 무당과 의사의 치료가 공존하는 영역이었다. 완두창의 예후를 알아보는 방법은 의사가 아니라 무당과 점쟁이가 주도했다. 태종은 승정원에 명해 점을 잘 치는 사람을 모아 병의 예후를 알아봤다. 점치는 맹인들은 점을 보고 모두 길하다고 예측했다. 세종 임금이 되는 충녕대군도 여기서 등장한다. 정탁을 시켜 주역점을 쳐서 임금에게 올렸는데 충녕대군이 나와 주역점을 풀이하자 모두가 감탄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점의 결과와는 무관하게 성녕대군은 죽고 말았다. 태종은 성녕대군이 놀던 곳을 지켜보기 힘들어 개성 유후사로 이어(移御·임금이 거처하는 곳을 옮김)할 것을 의논하면서 속마음을 내비친다. “내가 옮겨 거동하고자 하는 것은 나의 애통하고 울울히 맺힌 정을 씻으려는 것이다.” 여러 날 동안 곡기를 끊자 수라 들기를 청하는 신하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대군이 병을 얻은 날부터 여러 날 옷을 벗고 자지 않았다. 더구나 지금 유명(幽明)의 길이 막혀 있으니 비록 수라를 들려 해도 얼굴 모습이 선하여 잊지 못한다.”

조선 전기에 완두창을 치료하던 방법은 의원들의 죄를 묻는 하교에서 드러난다. 꼼꼼하면서도 명철한 태종답게 경안공주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대해 분석한다. “을미년에 경안 궁주(慶安宮主)의 병 증세가 열이 나고 괴로움이 심하여 눈을 바로 뜨고 손이 뒤틀리니, 양홍달이 말하기를, ‘이와 같은 병의 증세는 의가에서 아직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라고 하고, 양위탕·평위산을 바쳤다. 내 마음에 보통 증세가 아니라고 생각하여 남에게 알려질까 부끄러워했으나, 졸(卒)한 뒤에 내가 방서를 보니, 눈을 바로 뜨고 손이 뒤틀리는 것은 바로 발열하는 증세에 있었다. 성녕군의 창진(瘡疹)이 발하던 처음에 허리와 등이 아팠는데, 조청·원학 등이 풍증(風症)이라고 아뢰어서 인삼순기산을 바쳐 땀을 흘리게 하였다. 뒤에 의서의 두진문(痘疹文)을 보니, 또한 허리와 등이 아픈 것이 실려 있었다. 또 병이 위독하던 날에 이미 증세가 변하게 되어 안색이 회백색이 되었는데, 박거가 말하기를, ‘이것은 바로 순조로운 증세입니다. 안색이 황랍색(黃蠟色)이 되면 최상의 증세입니다’라고 했다. 이 사람들이 비록 고의로 해치려는 생각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실로 이것은 마음을 쓰지 않아서 그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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