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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종주기②|성삼재에서 복성이재까지

“이보게! 산 잘 타는 놈은 숲에서 죽고, 헤엄 잘 치는 놈은 물에서 죽는다네”

  • 글: 육성철 국가인권위원회 공보담당 사무관 sixman@humanrights.go.kr

“이보게! 산 잘 타는 놈은 숲에서 죽고, 헤엄 잘 치는 놈은 물에서 죽는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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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게 젊은이. 산 잘 타는 놈은 숲에서 죽고, 글 잘 쓰는 놈은 필화로 죽고, 헤엄 잘 치는 놈은 물에서 죽는다네. 아무쪼록 조심해서 가게나.”

9시30분. 만복대에서 곧장 30분 동안을 내려와 정령치(鄭嶺峙·1172m)에 이르렀다. 서산대사의 ‘황령암기(黃嶺岩記)’에 따르면 정령치는 기원전 84년에 마한의 왕이 진한과 변한의 침략을 막기 위해 정씨 성을 가진 장군으로 하여금 성을 쌓고 지키게 한 데서 유래했다. 이렇듯 삼한시대부터 전략적 요충지였던 이곳에서 후일 신라의 화랑들이 무술을 연마하기도 했는데, 지금은 근방에 있는 개령암지마애여래불상군(보물 1123호)이 더 유명하다.

정령치에서 가파른 고갯길을 오르면 큰고리봉(1305m)이다. 이곳에서 계속 달리면 바래봉과 팔랑치가 나오는데, 백두대간은 여기서 잠시 숨을 고르고 하산을 시작한다.

주촌마을로 내려가는 경사가 급한 오솔길은 혼자 걷기에 호젓한 코스다. 가을 햇볕을 제대로 받지 못해 여름의 신록을 그대로 간직한 소나무와 황갈색 측백나무가 마주보고 서 있다. 좁은 길을 사이에 두고 두 종류의 나무가 서로 다른 삶을 살고 있지만, 머지않아 이들에겐 똑같이 겨울이 찾아들 것이다. 자연이나 인간이나 살아가는 이치는 다 같은 모양이다.

11시30분. 주촌리에 도착했다. 멀리 지리산 주능선을 바라보면서 한적한 아스팔트길을 걸었다. 백두대간이 다시 산과 만나는 노치마을은 노랗게 물들어 있었다. 집집마다 감나무에 감이 주렁주렁 매달렸고, 마당에서는 아주머니들이 곶감을 꿰느라 바쁜 손을 놀렸다. 필자가 허기를 달래려고 우물가에서 라면을 끓이자, 녹두를 털던 할머니는 슬며시 콩밥을 한 공기 내밀었다. 세상이 많이 달라졌다지만, 산골 인심은 여전히 후덕한 것 같다.



힘이 남아 있을 때 조금이라도 코스를 단축하기 위해 쉬지 않고 걸었다. 도중에 갈림길도 많았지만, 먼저 지나간 백두대간 종주자들의 표지 덕분에 길을 잃지는 않았다. 특히 ‘남원 뚜벅이’라고 적힌 리본의 도움이 컸다. 어떤 분인지는 모르지만 이 지면을 빌려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그냥 지나칠 여원재가 아니로다

수정봉에서 여원재로 가는 길은 잡목이 많고 탁 트인 전망도 없다. 마치 산 속에 갇혀 긴 터널을 지나는 느낌이다. 능선을 지나면서 오른쪽으로 보이는 곳이 바로 운봉면인데, 이곳은 판소리 동편제의 고향으로 알려져 있다. 동편제 창시자인 송흥록이 운봉 태생이고, 한 시대를 풍미한 그의 제자들이 모두 운봉 땅에서 득음했다.

운봉은 또한 수 년 전까지 양을 기르는 목장으로 유명했다. 때문에 여름철이면 유럽대륙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풍경이 펼쳐지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풍경을 볼 수가 없다. 양떼가 사라진 운봉목장에서는 요즘 소떼가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다.

수정봉에서 여원재까지는 천천히 걸어도 2시간 이내. 쉬운 길이지만 필자는 이상할 정도로 피로를 느꼈다. 급하게 먹은 점심이 얹히기라도 했는지 식은땀까지 흘렸다. 그러다 결국 탈이 나고 말았다. 여원재에 도착해서 배낭을 점검해 보니 방풍 파카가 없어진 것이다. 덥다고 벗어서 배낭 위에 얹은 것까지만 기억나고, 어디에서 떨어졌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필자는 파카를 찾으려 왔던 길을 다시 올라갔다. 1시간쯤 걸어가자 등산객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분들에게 파카에 대해 물었으나, 아무도 본 사람이 없었다.

허탈한 심정으로 다시 여원재로 돌아왔다. 파카 속에 들어 있을 비상금을 빼고 나니 서울까지 갈 교통비도 빠듯하다. 할 수 없이 근방에 사는 친구에게 SOS를 쳤다. ‘이쯤 되면 산행은 여기서 멈출 수밖에 없다는 판단에 남아 있는 비상식량으로 요기를 하고, ‘여원재’라는 지명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지금으로부터 100여년 전. 동학군의 접주 김개남이 영남지방으로 진격하기 위해 동학군 1만명을 이끌고 나섰다가 수많은 희생자만 남기고 남원으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던 비극의 땅. 여원재 전투의 충격 탓에 동학군은 결국 영남지방으로는 한 발짝도 들어가지 못했다. 또한 여원재에는 임진왜란 때 왜구에게 몸을 더럽히지 않으려던 조선여인이 이곳에서 스스로 젖가슴을 도려내고 죽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말 그대로 여원재의 여원(女院)이 ‘여원(女怨)’이라는 것이다. 아무튼 필자는 그 여원재에서 아내의 선물을 잃고 일찌감치 귀경길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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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육성철 국가인권위원회 공보담당 사무관 sixman@humanrights.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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