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7월호

‘여유 속 활기’로 생동감 넘치는 충남 서천

모시 입고, 아구 먹고, 오력도 마주보며 낚싯대 드리우고

  • 글: 이지은 기자 smiley@donga.com 사진: 김성남 차장 photo7@donga.com

    입력2004-07-02 16:4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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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신 카메라를 들이대도 농민은 무심히 모내기에만 열심이다.
    • 멀리 바다에 떠 있는 고깃배에선 어민들의 함성이 물결에 실려오고, 갈색 속살을 드러낸 갯벌에는 꽃게며 조개들이 제 세상 만난 듯 파닥인다. 모두가 그렇듯 자연스런 이곳에 오면 이방인조차 자연의 일부가 된다.
    ‘여유 속 활기’로 생동감 넘치는  충남 서천

    마량리 동백숲 아래서 한가로이 낚시를 즐기는 강태공들. 바다 너머 오력도의 자태가 아름답다.

    눈이 부시도록 푸르렀다. 서천을 향해 서해안고속도로를 내달리는 동안 창 밖의 하늘과 산천은 거추장스런 봄기운을 털어내고 짙푸른 여름옷으로 갈아입었다.

    초입으로 들어서자 밀짚모자를 쓰고 수건을 두른 농민들이 모내기에 분주하다. 일손은 바쁘지만 마음은 ‘충청도 양반’답게 여유롭다. 낯선 도시인이 불쑥 나타나 카메라를 들이대도 그저 무심한 낯빛으로 모만 옮겨 심을 따름이다.

    서천을 대표하는 특산물은 뭐니뭐니 해도 한산 모시다. 백옥같이 흰 데다 잠자리 날개처럼 짜임이 섬세해 여름철 최고의 옷감으로 꼽힌다. 삼국시대부터 만들어진 한산 모시는 고려시대에는 명나라 공물로, 조선시대에는 진상품으로 명성을 떨쳤고 지금도 한산면 소득원의 17%를 차지한다.

    한산면 대로변의 한산모시관(041-950-4226). ‘척척척척’ 베틀 돌아가는 소리를 따라가보니 새하얀 모시옷을 곱게 차려 입은 방연옥(58·중요무형문화재 제14호) 선생이 모시 짜기에 한창이다. 그의 재빠른 손길이 스쳐가자 촘촘하고 깔깔한 모시가 얼굴을 내민다.

    “나 어릴 적엔 동네 아낙들이 다 모시를 짰지만 요즘은…. 모시풀 껍질에서 모시를 짜내기까지 석 달쯤 걸리는데, 그게 다 수작업이라 무척 고되거든. 그나마 모시 짜기는 쉽지. 째기와 삼기는 너무 어려워서 요새 젊은이들은 엄두도 못 내요.”



    모시 직조는 모시풀 속껍질을 물에 적신 후 햇볕에 말려 물기와 불순물을 제거한 ‘태모시’에서 시작된다. 태모시를 이로 쪼개 가늘게 만드는 과정이 ‘모시 째기’다. 마른 모시에 적당히 침을 발라주면서 가늘게 찢어야 하는데, 얼마나 가늘게 찢었느냐에 따라 모시의 등급이 달라진다. ‘모시 삼기’는 이처럼 가늘게 찢은 짧은 모시실을 잇는 일이다. 그렇게 삼은 실을 베틀에 달아 짜면 모시가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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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령의 무창포해수욕장. 6월1일 저녁 7시30분경 이곳에서 석도대까지 1.5km에 이르는 바닷길이 열렸다(左). 배를 손질하며 출항 준비를 채근하는 어민들(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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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강을 따라 펼쳐진 갈대숲.

    한산모시관에서 차로 5분 거리에 있는 문촌리 마을회관에 들렀다. 60∼70대 할머니 몇 분이 째기와 삼기의 ‘숙달된 시범’을 보여주시는데, 입 안에서 갈라져 나온 얇디얇은 실을 이음새가 드러나지 않게 다시 입으로 잇는 현묘한 솜씨에 탄성이 절로 날 지경이다.

    한산에 모시풀만 자라는 것은 아니다. 이곳 신성리 갈대밭은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의 촬영지로 유명하다. 금강 언저리 6만여평에 펼쳐진 3m 높이의 갈대숲이 강바람에 쏴쏴 소리내며 일제히 흔들리는 광경은 그야말로 장관이다.

    갈대밭을 등지고 금강변을 달려 해 넘어 갈 녘에 장항선 종착지인 장항읍에 닿았다. 서천의 이름난 먹을거리 중 하나가 아구요리다. ‘아구’ 하면 흔히 경남 마산을 떠올리지만, 서천 아구는 마산 아구와는 다른 독특한 맛이 있다고 한다.

    “요즘은 아구 요리를 콩나물과 매운 고추장 맛으로 먹는 것 같습디다. 이곳 아구 요리는 자극적인 양념을 거의 쓰지 않고 야채도 미나리만 넣기 때문에 아구 자체의 맛을 즐길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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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산 모시장에 모인 사람들.

    아구 전문음식점인 온정집(041-956-4860) 강성국(47)씨의 얘기다. 그의 말마따나 이 집에서 맛본 아구탕은 담백한 장맛과 보들보들한 아구 육질이 일품이다.

    ‘가는 날이 장날’이란 말이 이렇게도 잘 들어맞을 수 있을까. 서천에 머물던 날 운 좋게도 모시장이 섰다. 모시장은 새벽 5시에 시작되는데, 이슬을 촘촘히 머금은 새벽녘에 촛불로 비춰봐야 모시를 제대로 살필 수 있기 때문이란다. 지금은 실내에서 백열등 불빛으로 비춰보기 때문에 새벽 장이 서야 할 까닭이 없는 데도 전통은 이어지고 있다.

    모시 1필은 20만∼30만원에 거래됐다. 모시 짜내는 고생에 비하면 값이 박하지 않나 싶다. 그러고 보니 모시를 팔러 나온 사람은 젊은 축이래야 50대다. 이러다간 ‘침체’가 아니라 명맥을 유지하기도 어렵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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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내는 농민은 카메라를 전혀 의식하지 않는 ‘일류배우’다.

    서천에서 바다 풍광이 가장 아름답다는 마량리로 발길을 옮겼다. 이곳에는 천연기념물 제169호로 지정된 수령 500년의 동백나무숲이 바다와 마주하고 있다. 3∼4월에는 만개한 선홍빛 꽃이 숲 전체를 덮어 황홀경을 그려 보인다고 한다. 아쉽게도 시기가 늦어 동백숲의 붉은 향연은 목도하지 못했다.

    마량리 동백숲 정상에는 동백정이라는 자그마한 누각이 있다. 이곳에 오르면 시린 햇살이 퍼져나가는 바다 위로 아름다운 오력도와 그 앞을 오가는 고깃배가 어우러진 또 한 폭의 그림이 기다리고 있다.

    서천 최대의 춘장대해수욕장과 때마침 바닷길이 열린 보령시 무창포해수욕장에서 노닐다 보니 어느 결에 어둠이 깔렸다. 서천까지 와서 주꾸미 맛을 안 보고 갈 수는 없는 법. 마량리 앞바다에서 잡히는 주꾸미는 다른 지역산보다 육질이 연하면서도 쫀득쫀득하다. 주꾸미가 가장 맛있을 때는 3∼4월이다. 그 후에는 알을 배 힘이 없고 쫀득한 맛도 떨어진다고 한다.

    하지만 10년 전부터 마량리 바닷가에서 주꾸미 전문음식점을 해온 서산회관(041-951-7677)의 김정님(52)씨는 “제철은 아니어도 주꾸미 속에 가득 찬 알이 제법 고소해 별미로 즐길 만하다”고 했다. 주꾸미 철판볶음에 한산소곡주를 곁들이니 썩 기분좋게 취기가 오른다.

    서천에서 돌아오는 길도 산천은 여전히 푸르렀다. 농부들은 여전히 모내느라 여념이 없고, 어민들은 따가운 햇살에 해산물을 말리고 배를 손질하며 출항 준비에 매달렸다. 여유 속의 활기, 그래서 더 생동감 넘치는 일상이 그곳에 있다.

    ‘여유 속 활기’로 생동감 넘치는  충남 서천

    마량리 앞바다에서 잡히는 주꾸미는 연하면서도 쫀득쫀득한 육질로 입맛을 돋운다(左). 서천의 대표적 먹을거리인 아구탕(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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