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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함께하는 우리 산하 기행

감잎처럼 은행잎처럼 느리게 떠나고 싶더라

경북 청도

  • 최학 │우송대 한국어학과 교수 hakbong5@hanmail.net

감잎처럼 은행잎처럼 느리게 떠나고 싶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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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상할 일이 있어 밀양 가는 길

기차가 마악 청도를 지나면서

창밖으로 펼쳐지는 감나무 숲

잘 익은 감들이 노을 젖어 한결 곱고

감나무 숲 속에는 몇 채의 집

집안에는 사람이 있는지

불빛이 흐릿한데, 스쳐 지나는

아아, 저 따뜻한 불빛 속에도 그늘이 있어

울 밖에 조등(弔燈)을 내다 걸었네

-정희성 시 ‘청도를 지나며’ 전문

맑은 가을볕 속에서 감나무를 우러러본 적이 있는가. 어느새 무성한 잎들은 지고 알알이 빨갛게 익은 열매가 그 숫자만큼 매달린 물든 이파리와 더불어 햇살을 받고 있는 모습을. 어쩌면 그 잎이 열매보다 더 곱고 안쓰럽다. 천 잎의 이파리가 천 가지 색깔로 물들면서도 화려함과 번쇄함만큼은 아득한 거리에 둘 줄 아는 겸허한 위의(威儀) 때문이다.

우리네 삶은 과실나무의 열매를 닮은 것일까, 아니면 이파리를 닮은 것일까. 부질없는 질문이다. 분명한 것은 생성과 소멸뿐. 그래도 바람이 있다면 소멸 직전에는 감잎처럼 적막하면서도 찬연한 어여쁨쯤은 지녀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해 질 녘, 터널을 빠져나온 열차는 감 익는 시골 마을을 통과한다. 집집의 감나무 가지마다 휘어지게 홍시가 달렸다. 놀빛 받아 더욱 고운 홍시와 감잎이 지붕을 가리고 있는 작은 시골집 울 밖에는 또 다른 홍시 한 알인 듯 조등(弔燈)이 걸려 있다. 아. 저 예쁜 마을에서도 누군가 세상을 떠나고 있구나! 홍시 떨어지듯이, 감잎 떨어지듯이….

발견의 놀람은 고운 풍경 속에서 더욱 확연하다. 찰나적인 이 발견과 인식은 놀빛 아래 마지막 예쁨을 현현하는 감나무에 의해 가능하며 그로 인해 삶과 죽음의 색깔까지 가늠케 한다. 그리고 그 구체적 지점으로 청도가 표시되는데, 감 하나에 대해서도 생명의 의미를 묻는 시인의 시선에 의해 경상도 내륙의 소도시 청도는 존재론의 한 좌표가 된다.

감나무 마을

소싸움의 고장으로 유명한 경북 청도는 전국 최고의 감 생산지다. 감나무 마을 중에서도 특히 소문난 곳이 송금리 마을인데 경부선 기차를 이용하는 승객들은 열차의 차창을 통해서도 이 마을 풍경을 쉽게 바라볼 수 있다. 하행 열차를 타면 기차가 대구와 경산을 지나고 남성현 터널을 통과해서 청도 땅에 들어서자마자 만나는 마을이기 때문이다. 150여 가구의 아담한 농가 저마다 키 낮은 돌담을 두르고 있고, 울안의 감나무들은 담장 밖에까지 가지를 내밀고 가을의 정체 같은 홍시와 감잎을 드리운다.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때 찾은 감나무 마을은 매미소리에 잠겨 있었다. 가지마다 밤톨만한 푸른 감이 매달려 여름 햇볕을 쬐고 있는 평화롭고도 넉넉한 풍경 속을 느린 걸음으로 걷는 일 자체가 가외의 복처럼 여겨진다.

영남 내지의 고을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청도 또한 유학(儒學) 문화가 꽃피었던 유림의 땅이다. 따라서 승지마다 옛 서원이 남아 있어서 지난 시대의 사연을 전해준다. 청도읍에서 서쪽으로 멀지 않은 곳, 이서면 서원리에 있는 자계서원부터 찾아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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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학 │우송대 한국어학과 교수 hakbong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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