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0월호

벼랑에 서서 깨닫다 아, 너도 나도 섬이었구나!

경남 남해

  • 최학 │우송대 한국어학과 교수 hakbong5@hanmail.net

    입력2013-09-23 15:42: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벼랑에 서서 깨닫다 아,  너도 나도  섬이었구나!

    남해 금산의 보리암에서 바라본 한려수도.

    수 년 전, 경남 사천과 남해 본섬 사이의 창선도를 디딤돌로 해서 뭍과 섬, 섬과 섬을 잇는 두 개의 교량, 즉 삼천포대교와 창선대교가 개통되면서부터 삼천포에서 남해로 건너가는 일이 이웃집 나들이처럼 쉬워졌다. 이들 교량은 건설 단계에서부터 교통의 편리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 볼거리를 준다는 의도를 다분히 담고 있었기에 개통과 동시에 빼어난 자연 풍광에 문명의 멋이 어우러진 새로운 명소가 되었다.

    아치 형태의 철 구조를 가진 삼천포대교는 주변을 압도하는 듯한 우람한 몸체, 바다 빛과 선명한 대비를 이루는 붉은 색채가 언뜻 위화감을 주기도 하지만, 비바람 부는 때 혹은 석양에 다시 다리를 건너다보면 이 모양새, 이 빛깔밖에 달리 없겠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이보다 훨씬 밋밋한 형태를 한 창선대교 주변에는 남해의 명물 죽방렴 멸치 어로장이 흩어져 있다. 물길 따라 떼 지어 온 멸치를 죽방에 가둬 잡는 전통 어로 방식을 그대로 보여주는 현장이다. 이렇게 잡은 싱싱한 멸치의 맛은 길 가는 나그네들도 쉽게 접할 수 있다. 다리 너머의 포구 마을에 미식가들이 찾아드는 소문난 멸치횟집이 여럿 있기 때문이다.

    남해 가는 길

    여기서 차로 10여 분 달리면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물건리 방조어부림에 닿는다. 아름드리 고목이 숲을 이뤄 병풍처럼 포구를 감싸 안은 곳이다. 태풍과 바닷물의 범람, 염분의 피해를 막기 위해 인위적으로 조성한 숲이 방조림이며, 은신처를 찾아 고기떼가 모여들게 하는 숲이 어부림이다. 유서 깊은 이곳의 숲은 이제 관광객을 끌어 모으는 역할까지 톡톡히 하고 있다.

    300여 년 전 이곳 주민들에 의해 일궈진 숲은 길이 1500m, 너비 30여m 규모다. 팽나무, 상수리나무, 느티나무, 이팝나무 등의 낙엽수와 상록수인 후박나무가 숲을 꾸미고 있고, 숲 가운데로는 산책로가 다듬어져 있다. 숲과 맞닿은 해변은 자갈로 채워졌다. 볕 좋은 날이면 주민들이 자갈밭에 멸치를 널어 말린다. 녹음의 숲길을 걷은 뒤 멸치 냄새가 풍기는 해변에 앉아 먼 데 고깃배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떠나온 세상의 시름과 고달픔쯤은 씻은 듯 가시기도 한다. 몇 해 전에는 삼천포에 사는 정삼조 시인이 이곳 물건중학교에서 근무했다. 그와 함께 방조림 끝의 선착장에서 고등어 몇 마리를 걸어 올리겠다고 낚싯대를 놀리던 때가 엊그제 같다.



    물건에서 남해 섬 끄트머리의 포구 미조에 이르는 도로를 물미해안도로로 부른다는 사실을 나는 최근에 알았다. 아무튼, 미조항은 남해에서뿐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항구 마을의 하나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해변에서 시작된 마을은 야트막한 산허리를 타고 건너편 바다로 넘어가면서 남, 북 두 개의 미조항을 만드는데, 마을을 품고 두른 산과 바다의 품새가 그렇게 넉넉하고 안온할 수 없다. 바다 저편에 한가롭게 앉은 섬들의 자태도 마찬가지다. 특히 화염이 번지듯 하늘이 붉게 물드는 저녁 무렵에 미조항을 내려다볼라치면 자못 가슴이 막혀오는 감동마저 느낄 수 있다.

    ‘송정솔바람해변’이며 ‘상주은모래비치’는 미조항에서 다시금 북쪽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해안도로에서 차례로 만날 수 있다. 예전에는 송정해수욕장. 상주해수욕장이라고 부르던 곳으로, 어느새 제법 감성적인 이런 이름으로 바뀌었다. 요즘 세대에게는 꽤 먹혀들 지명이지만 나로서는 왠지 살갗이 근질거리는 느낌이다.

    해수욕장이 구색을 갖추려면 우선 바닷물이 맑고 수온이 적당하며 수심이 완만해야 하고 깨끗하고 부드러운 모래밭을 곁들여야 한다. 게다가 그늘을 즐길 수 있는 나무숲이 모래밭을 두르고 있으면 금상첨화라고 했던가. 상주와 송정의 해변은 이 조건을 다 갖췄다. 해마다 여름 한철 100만 명 이상이 찾는다는 상주은모래비치는 남해를 대표하는 아름다운 해수욕장이다.

    서른 몇 해 전, 처음 이곳을 찾았던 이래 나는 남해를 여행할 때마다 이곳을 빠뜨리지 않는다. 생전 처음 만난 그 순결한 해변의 아름다움을 잊지 못한 까닭이라고 해도 괜찮다. 타원형으로 바다를 감싸 두른 드넓은 모래밭이 무엇보다도 인상적이었는데, 그때만 해도 인적이 드물어 사장은 마치 시베리아 벌판처럼 넓어 보이기까지 했다. 바다에는 그림처럼 섬들이 떠 있고, 짙푸른 솔숲이 장막처럼 모래밭을 둘렀고, 그 너머로는 훤칠한 돌산 하나가 의연히 창공에 키를 세우고 있기까지 했다. 풍경은 태곳적 적막에 잠겨 있었으며 쏟아지는 햇빛으로 인해 바다와 모래밭, 들판과 산이 저마다 눈부신 빛살을 튕겨냈다. 절망과도 같은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벼랑에 서서 깨닫다 아,  너도 나도  섬이었구나!

    남해 상주은모래비치(왼쪽)와 미조항.



    지난해 가을, 나는 중국 학생 100여 명을 데리고 다시 이 바닷가를 찾았다. 그새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모래밭이 꽤 좁아진 것 같은 느낌. 이곳에서도 모래가 해류에 쓸려나가는지 여기저기 거친 속살이 드러나 있기도 했다. 해변에서 마주 보이는 나무섬과 돌섬의 모습도 그대로인데 숲 너머 돌산이 그 사이 키를 많이 낮추었다. 사장을 뛰고 달리며 지르는 외국인 학생들의 환호성을 듣는 가운데 나는 풍경도 사람 따라 늙는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

    상주해수욕장에서 바로 쳐다보이는 돌산이 금산이다. 바다에서 도로를 따라 10km쯤 산으로 다가들면 주차장을 겸한 공터가 나오는데 이곳이 산행로 초입이다. 등산이 힘겨우면 산 뒤편의 복곡탐방지원센터까지 차편으로 오를 수도 있다. 바닷가에서 바라보면 산 전체가 하나의 커다란 돌덩이처럼 보이지만 등산로가 시작되는 산 아래에서 쳐다보면 기암괴석들은 산꼭대기에 도열해 있고 그 아래는 짙푸른 숲이다. 해발 705m의 금산을 오르는 산길은 크게 가파르지 않고 지루하게 길지도 않다. 한바탕 땀을 흘렸다 싶으면 곧 보리암으로 통하는 자연 석문 쌍홍문에 이르게 되는데 이 주변의 풍광이 금산에서도 압권이다. 거대한 바위들이 천연의 성벽인 양 주위를 옹위하고 있다. 산 아래로 눈길을 돌리면 남해의 티 없이 푸른 물결과 다도해의 섬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금산의 원래 이름은 보광산이었다. 신라 원효 스님이 이 산에 보광사라는 절을 지은 데서 그 이름이 유래했다고 한다. 금산이란 지금의 이름은 이성계가 조선 개국을 앞두고 보광사에서 백일기도를 올리는 가운데 제 뜻대로 새 나라를 세우게 되면 그 보답으로 산 하나를 온통 비단으로 덮겠다고 약조한 데서 비롯됐다는 전설이 있다. 정식으로 산 이름을 금산으로, 절간을 보리암으로 고친 것은 조선 현종 때의 일이다.

    풍경도 사람 따라 늙는가

    쌍홍문을 지나 돌층계를 오르면 이내 보리암의 안마당을 디딜 수 있다. 낙산사 홍연암, 강화도 보문사, 팔공산 갓바위 등과 더불어 나라 안에서도 가장 영험 있는 기도처로 알려진 이곳에는 원망이 큰 기도인들의 발걸음 또한 사시사철 끊이지 않는다.

    산 높은 곳에 위치한 절집들치고 빼어난 풍광을 지니지 않은 절집이 없지만, 나는 그중에서도 보리암의 경치가 으뜸이라는 생각을 오래전부터 해왔다. 가까운 곳은 기암괴석이요, 먼 데는 차마 눈길도 닿지 않는 수평선이다. 하늘과 구름, 바다와 섬들이 그 한 폭의 그림 속에 있으면서 시시때때로 형태와 색깔을 달리한다. 발아래의 산봉우리와 들판, 사람들의 거처도 마찬가지다. 무변의 엄숙과 변환의 무상성이 한데 어우러진 그림. 그것이 벼랑 위의 절집 보리암에서 마주하는 풍경이다.

    남도의 한려수도나 해남 땅끝에 사는

    또 남해의 보리암 밑 바다에 있는

    작고 많은 섬들이 대낮에도 부끄러워

    넓은 구름 안개에 아랫몸 감추고

    나무 고깔의 머리만 조금 내밀고 있다.



    이게 대체 몇 개나 되는 섬이냐 물으면

    나요, 나요 하는 메아리 숫자만큼 많겠지만

    낮은 소리로 네가 이쁘구나, 하면

    흩어져 있던 섬들 어느새 다 알아듣고

    안개 사이를 헤엄쳐 손잡기 시작하네.



    아껴주고 보듬어주면 금세 어깨 기대는 섬,

    더는 쓸쓸해하지 않는 섬이 손잡고 웃는다.

    누가 깨우기 전까지는 모두들 조용하고 깊었다.

    오늘에야 서로 껴안고 춤추며 만든

    온 바다 속을 채우는 해초와 물고기들,



    처음에는 너도 나도 섬이었구나.

    우리가 만나 서로 허물을 안아주면서

    말의 물길을 통해 경계가 무너지는 섬.

    모든 완성은 눈과 눈을 합친다.

    모든 완성은 멀고 막막한 하나다.

    - 마종기 시 ‘다도해를 보며’ 전문

    벼랑에 서서 깨닫다 아,  너도 나도  섬이었구나!

    남해 금산.

    섬과 섬들이 헤엄쳐 다가가 손잡고 웃는 풍경을 보면서 이윽고 너도 나도 당초에는 섬이었음을 알게 되는 발견의 자리가 바로 보리암이란 사실이 놀랍지 않다. 아껴주고 보듬어주고 서로 허물을 안아주면 세상의 경계가 모두 무너지는 화엄의 세상이 된다는 깨달음 또한 이 위태로운 벼랑 위에서 가능하다. 완성은 완미(完美)의 다른 표현, 그것이 마음의 눈과 눈이 합쳐지고 멀고 막막한 것까지 하나 될 때 이뤄짐을 알게 되는 경지는 원효가 관세음보살을 친견하는 지경과 근사하다 해도 지나칠 바는 아니다.

    금산 산행로 초입을 지나 고개 하나를 타 넘으면 다시 바다가 내려다보이고 길 아래로는 포구를 낀 마을이 나타난다. 벽련마을이다. 차를 버리고 포구 끝에 서면 바다 저만치에 외따로 떠 있는 삿갓 모양의 섬 하나가 눈에 잡힌다. 섬 기슭에 앉은 집채들도 선명하게 시야에 들어온다. 노도(櫓島). 예전에 배의 노를 많이 생산하던 섬이라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전한다.

    섬으로 가기 위해 낚싯배 한 척을 빌렸다. 머잖아 이곳에도 정기 도선이 운항하게 된다고 선장이 일러주었다. 단숨에 바다를 건넌 통통배는 우리 일행을 선착장에 떨궈놓곤 저 왔던 곳을 향해 뱃머리를 돌렸다.

    김만중이 귀양 살던 곳

    주민센터 건물을 지나 마을로 올라가는 입구에는 수령이 꽤 있어 보이는 팽나무 한 그루가 있고, 나무 그늘에 ‘서포김만중선생유허비’가 서 있다. 마침내 나 또한 책에서만 봤던 서포 김만중의 귀양처에 발을 디뎠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노도는 서포에게 생애 세 번째 유배지인 동시에 마지막 숨을 거둔 절명의 땅이기도 하다. 숙종 15년, 후궁 장 씨의 소생인 ‘균’의 원자 책봉을 반대하던 서인들이 한꺼번에 축출되는 기사환국이 있었다. 서인의 우두머리로서 결사코 반대에 나섰던 서포 또한 절도(絶島) 유배의 명을 받고 섬 중의 섬인 이곳으로 쫓겨났다. 죽는 날까지 서포가 이곳에 머문 기간은 3년 남짓이었다.

    선창 마을에서도 한참 떨어진 큰골에 그의 유배지가 있다는 얘기를 듣고 한창 공사 중인 서포기념문학관을 지나 바다가 보이는 언덕배기 길을 걸었다. 20여 분 걸으면 갈림길이 나오는데, 오르막 층계 길은 서포의 시신이 묻혀 있던 허묘(虛墓)로 가는 길이고 아래쪽은 서포가 머문 초막으로 가는 길이다. 꽤 가파른 층계 길 끝자락에 허묘 자리임을 알리는 표석이 놓여 있다. 혹독한 귀양살이에서 풍토병까지 앓았던 서포가 숨을 거둔 때는 숙종 18년 4월 그믐날이었다. 향년 쉰여섯. 혼령은 쉽사리 섬을 떠났겠지만 한 많은 육신은 몇 달간 더 이곳에 남아 있어야 했다.

    벼랑에 서서 깨닫다 아,  너도 나도  섬이었구나!
    최학

    1950년 경북 경산 출생

    고려대 국문과 및 대학원 졸업

    197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창작집 ‘잠시 머무는 땅’ ‘식구들의 세월’ 등

    장편소설 ‘서북풍’ ‘안개울음’ ‘미륵을 기다리며’ ‘화담명월’ 등


    그가 거처했다는 초막은 동백나무 숲 그늘에 고즈넉하게 서 있다. 몇 년 전 유배지 자리를 고증해서 새로 지은 집이라 세월의 흔적은 읽을 수 없지만 초막에서 마주하는 풍경은 참으로 빼어나다. 바다 한자락이 굳이 이편 골짝을 파고들면서 깎아지른 갯바위에 흰 포말을 일으키는가 하면, 금산 주봉에서 뻗어 내려온 본섬의 산봉들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다가든다. 바라보이는 바다는 넓지도 좁지도 않다. 귀양살이의 고단함을 풍경으로나마 달래라고 위리안치의 터를 이런 멋진 데다 정한지도 모를 일이다.

    숲에서 나는 새소리가 뜰의 적막을 더 깊게 하는 한낮. 문학적 감수성을 온전히 갖고 있으면서도 당파의 명분에 목숨까지 걸어야 했던 옛 시대 한 지식인의 고뇌와 갈등을 유추해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서포의 유배 터를 찾아온 보람을 가진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