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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함께하는 우리 산하 기행 <마지막회>

머나먼 방랑 끝에 돌아온 빛과 냄새의 항구

강원 주문진

  • 최학 │우송대 한국어학과 교수 hakbong5@hanmail.net

머나먼 방랑 끝에 돌아온 빛과 냄새의 항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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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나먼 방랑 끝에 돌아온 빛과 냄새의 항구

주문진 항.

주문진은 강릉 가는 김에 들르는 곳이며, 또 설악산 가는 길에 혹은 다녀오는 길에 잠시 거치는 선창 마을일 수 있지만, 막상 주문진에 발을 디디고 나면 ‘아, 어쩌면 애당초 내가 가고자 한 곳이 이곳인지도 모르겠다’는 묘한 느낌을 주는 그런 곳이다.

길가에 줄지어 선 대형 관광버스들을 보고 그 꽁무니쯤에 차를 세웠는데, 차문을 열자마자 코끝에 다가오는 냄새는 전혀 뜻밖의 것이다. 비릿한 바다 냄새, 생선 냄새가 아닌 고소하면서도 달짝지근한 포(脯) 냄새였기 때문이다. 황태포, 가자미포, 쥐치포… 큰길 이편저편에 끝없이 늘어선 건어물 가게들을 보고서야 냄새의 근원을 짐작할 수 있었다. 큰 차들이 왜 이렇게 줄 지어 서 있는지도 요량하게 된다.

대강 훑어보아도 바다에서 나는 모든 것이 죄 말려진 채 이곳으로 옮겨온 듯싶다. 오징어, 멸치, 양미리, 새우, 다시마, 미역, 김… 없는 것이 없다. 버스에서 내린 듯한 무리의 사람들이 가게들을 휘젓고 다니며 물건을 살피고 흥정하는가 하면 어느새 포장된 물품을 옮기는 이도 적지 않다. 진동하는 냄새와 상인들의 호객 소리, 흥정 소리로 거리는 흥성하기만 하다.

어시장을 찾기 전에 포구 구경부터 하기로 한다. 조그만 광장 하나를 지나자 금세 냄새가 달라졌는데 바다보다 먼저 긴 방파제가 눈에 들어온다. 늦은 가을날, 바닷가에 쏟아지는 햇살은 맑고 투명하며 예리하다. 머잖은 거리에서 바라보는 주문진 어항은 오로지 두 개의 색깔만 덮어쓴 듯하다. 짙은 남색과 눈부신 흰색. 바다는 푸른 하늘보다 더 푸른빛이며 정박한 배들과 배경의 건물들은 희디흰 빛의 폭격 속에 들어 있다. 강렬한 빛의 대비에 의해 풍경은 더없이 견고하며 또 고요하다. 소리가 빛에 압도됨을 이 바닷가에서 여실히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반반한 여인네 같은 등대

머나먼 방랑 끝에 돌아온 빛과 냄새의 항구

주문진 등대.

전혀 어울리지 않는 표현임을 알면서도 굳이 ‘배들은 발 디딜 틈 없이 물가에 붙어 있다’는 문장을 읊어봤는데, 수면 아래로 내리고 있는 배들의 발을 상상해보는 것만으로도 유쾌하다. 저마다 주렁주렁 집어등을 달고 있는 것으로 봐선 오징어잡이 배들인 것 같다. 해가 진 뒤에야 떼 지어 바다로 나설 모양이다. 바람에 나부끼는 무수한 깃발, 그 속에 낀 태극기들도 여기선 단순한 신호기에 지나지 않는다.

주문진항은 동해의 연안 항·포구들 중에서도 가장 많은 오징어를 잡아들이는 곳으로 이름이 나 있다. 오징어철만 되면 오징어 채낚기 배들이 밝히는 불빛으로 바다가 불야성을 이룬다는 말도 그래서 나왔다. 3월부터 6월까지 한 철은 꽁치잡이로 북적인다고 한다. 명태잡이로 호황을 누리던 때도 있었지만 이제 그것은 예전 이야기가 됐다.

어항을 지나 좀 더 걷다보면 방파제로 가는 길이 있고 그 초입에 수십 개의 횟집을 한군데 모아놓은 회 센터 건물이 있다. 손님들이 직접 횟감을 고른 뒤 탁 트인 바다가 보이는 창가에 앉아서 먹을 수 있는 곳이다. 그 언덕바지를 넘어 바닷길을 따라가면 곧 기다렸다는 듯 살갑게 모습을 드러내는 등대를 만난다. 주문진의 명물로 소문난 그 등대다.

가파른 길을 잠깐 올라서 마주한 등대, 생각보다 규모가 작지만 날렵한 모양새와 전신을 덮은 뽀얀 색채가 인상적이다. 누군들 등대의 기능을 모르랴마는 그 쓰임새와 무관하게 문득 낙산사의 해수관음상이며 사진첩에서나 본 저 먼 나라의 비너스 조각상을 떠올린 것은 분명 지나친 감상일 수 있다. 그러나 탑돌이 하듯이 내가 두세 차례나 등대를 돌면서 어떤 미색의 자태를 살피듯 아래위를 훑어본 까닭이 단출하면서도 어여쁜 그 형상 때문임은 분명하다. 좀 어설퍼 보이기도 하지만 등대로 올라가는 바깥 층계의 모양새도 나름 재미있다. 불국사의 청운교 백운교를 연상하는 것도 우스꽝스럽지만 아무튼 그런 투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반반한 여인네 같은 등대를 등 뒤에 세우고 바다를 마주하니 더할 수 없이 상쾌하다. 하도 크게 탁 트이고 하도 망망하니 되레 가슴이 답답할 지경이다. 크고 넓음뿐이랴, 내려다보이는 바닷가 암석에는 쉼 없이 파도가 밀려와 포말로 부서진다. 빨강과 초록으로 지붕을 단장한 집들과 휑한 해변도로가 무심히 바다를 지켜보고 있으며, 아득한 곳의 파도는 떼를 지어 달려가 해수욕장 모래밭을 못살게 군다. 군더더기 없는 풍경을 마주한 눈이 즐겁고 가슴이 벅차다. 등대가 왜 이 자리에 섰는지 까닭을 알 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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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학 │우송대 한국어학과 교수 hakbong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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