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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들의 요리

“며느리 사랑에 요리를 시작했어요”

전 서울대공원 김정만 동물부장의 도미 매운탕

  • 글·최영재 기자 / 사진·김용해 기자

“며느리 사랑에 요리를 시작했어요”

  • 《그는 원래 부엌 근처에도 가지 않던 사람이었다. 딸 없이 아들만 둘이던 그가 며느리 둘을 얻고부터는 태도가 달라졌다. 딸같이 사랑스러운 며느리와 손녀들이 먹을 음식을 요리하기 시작한 것이다.》
전 서울대공원 동물부장 김정만씨. 그는 95년에 37년6개월간의 공직생활을 마무리했으나, 요즘도 야생동물 관련 일을 계속하고 있다. 서울대학교와 강원대학교 수의학과에 강의도 나가고, 최근에는 어린이들이 볼 동물책을 쓰고 있다. 그는 곧 문을 열게 될 대전동물원의 상임고문직도 맡을 예정이다. 16만7000평에 이르는 대전동물원 야생동물 사파리는 국내에서는 최대 규모라고 한다. 은퇴 후에도 쉬지 않고 일하고 있는 것이다.

2남2녀 중 장남인 그는 1934년 인천 화평동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그의 집은 가난함 그 자체였다. 일곱살 되던 해에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가세가 기울기 시작한 것이다. 혼자 몸으로 자식 넷을 어렵사리 키우던 어머니는 장남인 그에게 많은 기대를 했다. 언제나 입버릇처럼 “은행원이 되거라. 그래야 직장도 안정되고 돈도 많이 번다”고 되뇌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어머니가 바라던 상과대를 지원하지 않고 수의사가 되기 위해 서울대 농대 수의학과에 입학했다. 어려서부터 끔찍이도 좋아했던 동물을 잊지 못한 것이다. 어린 시절 그가 처음으로 만난 동물은 돼지였다. 초등학교 시절, 마을 사람들은 그의 집 뒷산에서 돼지를 키웠다. 판자로 허름하게 지은 축사는 돼지가 조금만 힘을 쓰면 빠져나오기 쉽게 되어 있었다. 이렇게 돼지가 빠져나오면 아이들은 걸음아 날살려라 하고 도망치기 바빴다. 그러나 어린 김정만은 달랐다. 어른들과 함께 돼지를 우리에 집어넣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그는 돼지가 무섭지 않았고, 그 오물 냄새도 구수하게 느껴졌다고 한다. 오늘날의 동물박사 김정만은 이처럼 떡잎부터 남달랐던 것이다.

공직 생활을 끝낸 뒤, 그는 서울 생활을 접고, 집을 경기도 성남시 분당으로 옮겼다. 두 아들 직장이 모두 분당이라, 아들 집 근처에서 함께 살려는 마음에서다. 그래서 일요일에 별일이 없으면 두 아들네는 모두 그의 집에 모인다. 그는 원래 부엌 근처에도 안 가는 사람이었다. 일단 생활비를 아내에게 내놓으면, 집안 일에는 절대로 관여하지 않는 것이 일관된 원칙이었다.

그는 두 아들을 키울 때도 그저 어머니가 해주는 음식을 잘 먹고 반찬투정하지 말라고 가르쳤다. 이렇듯 확고한 원칙을 갖고 있던 그가 손수 음식을 만들게 된 것은 며느리 때문이었다. 딸 없이 아들만 둘인 그는 며느리 둘을 얻고부터 딸 대하듯 며느리를 사랑하기 시작했다. 딸 같은 며느리가 하도 귀여워서, 아들 내외가 집에 오는 날이면 평소 얼씬도 않던 부엌을 출입하며 음식을 요리하기 시작한 것이다.

일요일이던 8월6일은 분당 제생병원 의사인 큰아들의 생일이었다. 그래서 이 날 두 아들과 며느리, 손녀 네 명이 모두 그의 집에 모였다. 그는 해산물 요리를 좋아한다. 고향이 인천이라 생선을 많이 먹고 자란 탓이다. 그가 자랄 무렵 인천에는 부두가 두 군데였다고 한다. 하나는 인천항으로 철선 같은 큰배가 드나드는 항구였다. 태평양 전쟁 때 일제의 히타치 등 군수산업회사들은 이 곳에서 전함 같은 전쟁 무기를 만들었다. 인천항 부두가 일제와 관련된 항구였다면, 일반 서민이 먹는 생선이 들어오는 곳은 화수동 선창이었다. 그의 기억 한 켠에는 새우, 바지락, 갈치, 조개, 밴댕이 같은 해산물을 잔뜩 싣고 화수동 선창가로 들어오는 작은 목선들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그 시절 그는 학교만 끝나면 이 선창가에서 해수욕과 낚시질을 하며 놀았다. 그는 지금도 선창가의 퀴퀴한 생선 썩는 냄새를 맡으면 고향을 떠올린다. 고향 인천에서 나던 젓갈 또한 잊지 못하는 맛이다. 그는 지금도 인천 사람들이 먹던 밴댕이젓, 황석어젓, 조개젓 등 젓갈 세 가지는 밥상에 꼭 올린다.

그가 아들 생일날, 온 집안 식구들에게 선보인 요리는 도미 매운탕. 김정만식 매운탕의 특징은 조개로 밑국물을 낸다는 점이다. 생선매운탕은 바닷고기와 민물고기가 서로 끓이는 법이 다르다. 바닷고기 매운탕은 고추장을 푼 국물을 펄펄 끓이다가 생선 토막을 넣고 익을 정도만 끓인다. 너무 오래 끓이면 살이 뼈에서 떨어져 나와 부서져버리고 맛이 없다. 그러나 민물 생선은 살이 뭉그러지도록 오래 끓여야 흙내도 없고 제맛이 난다. 김정만씨는 이날 할인 매장을 찾아 수족관에서 바로 건진 싱싱한 도미를 사왔다. 이 생선은 먼저 비늘을 긁고 대가리를 자르고 배를 갈라 내장을 빼야 한다. 도미같이 큰 생선은 회 뜨듯이 살을 발라낸 뒤 적당한 크기로 잘라놓는 게 매운탕 끓이는 데 편하다. 채소는 무, 파, 쑥갓, 호박, 당근 붉은 고추, 양파, 미나리를 준비한다.

요리법은 간단하다. 밑국물인 조개국을 먼저 팔팔 끓인 뒤, 가장 먼저 무를 넣는다. 무가 적당히 익으면, 그 위에 생선과 호박, 당근을 넣고 끓인다. 이 때 고추장·마늘·생강·고춧가루· 참기름을 적당히 섞은 양념을 함께 넣는다. 생선을 넣어 한소끔 끓인 후에 미나리, 쑥갓, 파 같은 향내 나는 채소를 넣는다. 향내나는 채소는 처음부터 넣는 것보다 생선이 익은 후에 넣어야 비린내가 덜난다.

이 모든 과정을 아내 안정옥씨가 옆에서 거들었다. 며느리가 오는 날이면 앞치마를 두른다지만, 평생 주방에서 요리를 한 안정옥씨에게는 비길 바가 못된다. 그는 아내와 맞선을 보고 결혼했다. 서른살이 되던 해인 1963년 아는 분의 소개로 서울 종로 백합다방에서 맞선을 보았는데 첫인상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깔끔하게 차려입은 옷매무새며 말씨며 행동 하나하나가 바르고 예뻐서 놓치고 싶지 않았다는 것이다. 더욱이 입고 나온 옷도 직접 만들어 입었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는 더욱 마음이 끌렸다. 그는 서너번 데이트 끝에 결단을 내렸다. “나는 쌀밥은 못 먹여줘도 보리밥은 실컷 먹여줄 수 있소. 내 어머니가 배운 것 없는 분이지만 잘 공경해야 하오. 어떤 경우든 말대꾸하지 않을 자신 있소?”요즘 세상에는 맞지 않는 가부장적인 말이지만, 당시는 이런 말이 미덕으로 받아들여지던 시대였다. 아내 안정옥씨는 작은 소리로 “예”하고 대답했다. 그는 창경궁 가까운 가회동에 셋방을 얻어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할아버지 김정만이 요리하는 것을 가장 좋아하는 이는 그의 손녀들이다. 두 아들이 딸만 둘씩 낳아, 그는 손녀가 넷이다. 이 손녀들은 할아버지가 요리하는 내내, 옆에서 머리를 들이민 채 동그란 눈알을 이리저리 굴렸다. 이 어린 손녀들이 나이가 들어 어른이 되면 요리하던 할아버지를 어떻게 기억할까?

신동아 2000년 9월 호

글·최영재 기자 / 사진·김용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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