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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연재 | 신나는 막걸리 교실

내가 수확한 곡물이 내 몸으로 들어오는 짜릿함

이 남자들 뒤늦게 막걸리에 흠뻑 빠진 까닭은?

  • 허시명| 술 평론가 sultour@naver.com |

내가 수확한 곡물이 내 몸으로 들어오는 짜릿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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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막걸리는 사람을 부르는 술이다.
  • 푸성귀 안주로도 감칠맛이 난다.
  • 술 평론가면서 막걸리학교 교장인 필자가 이달부터 막걸리의 매력을 글로 전한다.
내가 수확한 곡물이 내 몸으로 들어오는 짜릿함

막걸리를 마시고 흥에 겨워 자리를 박차고 나섰다 .

내가 막걸리학교를 개교했을 때 가장 열정적으로 참여한 이들은 귀촌을 준비하거나 정년을 앞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은퇴를 준비하고 있다. 고향에 내려가 집과 정자를 지어 술과 벗하고 싶다” “시골 가서 전원생활하면서 친구 불러 함께 막걸리를 즐기고 싶다”고 말했다. 그리고 몇 명은 이미 귀촌해 농사를 지으면서, 구체적으로 막걸리 프로젝트를 실천하고 있었다. 함양에서 태평농법으로 농사짓는 이는 우리 밀 누룩을 만들겠다고 했고, 임실에서 매실농장을 하는 이는 매실 막걸리를 빚겠다고 했다.

막걸리학교를 찾아온 농부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이는 2기 강좌에 찾아온 황성현(41)씨다. 성현씨는 경북 청도군에서 복숭아 과수원을 운영하는 귀촌한 지 5년 된 농부다. 턱수염을 길러 성격이 깐깐해 보인다. 그는 농사용 물탱크를 실은 트럭을 동대구역 주차장에 세워놓고, KTX를 타고 서울역에 내려 명륜동 성균관대 앞의 교육장을 찾아왔다. 그는 두 차례 강의를 들은 뒤 다리가 부러지는 사고를 당해 목발을 짚고 청도와 서울을 오가야 했다.

그는 막걸리학교 10주 강의를 모두 들은 뒤, 함께 수업을 듣던 사람들을 ‘복숭아꽃 피는 날’ 청도로 초대하겠다고 했다. 복숭아꽃 살구꽃 피는 시골 마을 얘기를 동창들에게 전하면서 함께 막걸리 들이켤 날을 기약한 것이다. 복숭아꽃 피는 날 실제로 그의 집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그와 함께 막걸리학교 수업을 들은 수강생 40명 중 20명가량이 참여한 행사였다.

이서국의 왕궁터

성현씨가 사는 화양읍 백곡리는 지형이 예사롭지 않다. 청도의 옛 중심인 화양읍을 남쪽에 두고, 청도의 진산인 남산과 그 뒤편의 화악산을 바라보면서 들판에 접시처럼 앉아 있는 마을이다. 야트막하게 경사진 언덕을 넘어야 마을 들머리가 나오는데, 마을 바깥 들판에서는 마을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마을은 들판에서 건너오는 적을 기습하기 위해 쌓은 진지처럼 여겨졌다. 그 지형이 독특해 땅에 얽힌 얘기가 없느냐고 물었더니, 성현씨는 “이 마을이 이서국의 왕궁터로 추정되는 곳”이라고 했다. 이서국은 한때 신라를 공격해 위기에 빠뜨리기도 했던 삼한시대의 부족국가인데, 이 마을 안에 왕궁이 있었고 마을 둘레의 언덕이 백곡토성으로 불린다고 그는 전했다. 한번은 어떤 학자가 이 마을에 가짜 유물을 묻고, 수년 뒤 발굴 작업을 해 옛 이서국 유물이 나왔다고 호들갑을 떨었으나 마을 사람들의 증언으로 조작이 들통 나서 웃음거리가 된 일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마을과 인연을 맺은 인물로 무오사화 때 참화를 입은 김일손(1464~1498)이 있다. 김일손 고택이 마을 안에 있고 그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뤄 살고 있다.

성현씨가 막걸리의 참맛을 깨닫게 된 것은 귀촌한 첫해인 2006년이다. 그는 대학 다닐 적부터 술을 즐겼으나 막걸리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선배들이 냉면 사발에 막걸리를 가득 부어 ‘원샷’을 강요했고, 그렇게 마신 뒤에 속이 뒤틀린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그는 귀촌한 첫해, 농사일을 배우고자 뒷집 아저씨를 따라 모내기에 나섰다. 대학교 농활 때와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뒷집 아저씨가 모는 경운기를 타고 논으로 갔는데, 일꾼은 아저씨와 성현씨 둘뿐이었다. 그늘도 없고 눈에 띄는 사람도 없었다. 밀짚모자를 썼는데도 무논에 반사된 햇볕 때문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뒷집 아저씨가 소주를 한 잔 권했지만, 그는 마다했다. 미지근한 맹물만 마시며 힘겹게 하루 일을 마치고 지친 몸을 이끌고 경운기를 탔는데 마시다 남은 막걸리 반병이 눈에 띄었다. 뚜껑을 열고 냄새를 맡아보니 상하지 않은 것 같아서, 벌컥벌컥 마셨는데 그 맛이 환상적이었다. 그 순간 그는 불현듯 깨달음을 얻은 선승처럼, 막걸리 맛을 알게 됐다. 그 다음부터 그는 일할 때마다 막걸리를 챙겨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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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시명| 술 평론가 sultour@naver.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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