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6월호

CEO 인문학과 노숙자 인문학

  • 김현미│동아일보 출판팀장 khmzip@donga.com│

    입력2009-05-29 14: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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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EO 인문학과 노숙자 인문학

    CEO 인문학 고승철 지음/ 책만드는집/ 436쪽/ 1만5000원

    2007년 가을에 개설된 ‘서울대 최고지도자 인문학 과정(AFP)’은 출발 당시부터 화제였다. 40명을 선발한 1기에 이철우 롯데쇼핑 사장, 김인철 LG생명과학 사장, 최영한 KB국민은행 부행장, 손언승 삼영회계법인 대표, 한갑수 전 농림부 장관, 이계안 의원, 김병일 전 기획예산처 장관 등이 입학했다. 이후 지금까지 AFP과정은 3대 1이 넘는 높은 경쟁률을 유지하며 국내 CEO들 사이에 ‘인문학 열풍’을 일으키고 있다.

    2008년 봄 회사 선배 한 분이 AFP 2기에 들어가게 됐다는 낭보를 전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데이비드 덴비의 ‘Great Books’가 떠올랐다. 이 책은 10년 전쯤 ‘호메로스와 텔레비전-미디어 시대의 고전 읽기’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가 2008년 ‘위대한 책들의 만남 1,2’(씨앗을뿌리는사람 펴냄)로 완역 출간되었다. 덴비는 미국의 영화평론가이자 잡지 ‘뉴요커’의 칼럼니스트다. 그가 마흔여덟 나이에 모교인 컬럼비아대학을 찾아가 자식뻘인 학부생들 속에 섞여 교양필수과목인 ‘현대문명’과 ‘인문학과 문학’ 강좌를 1년 동안 청강한다. 그리고 ‘Great Books’를 쓴다. 여기서 Great Books란 서양문명의 정수가 담긴 고전들을 가리킨다.

    “덴비처럼 쓰세요! ” 나는 그 선배에게 27년 기자 감각을 발휘해서 강의 내용뿐만 아니라 교수들의 일거수일투족, 수강생들의 반응까지 놓치지 않고 기록해두면 한국판 ‘Great Books’가 나올 수 있지 않겠느냐고 귀띔했다. 그 원고는 해를 넘겨 2009년 봄 ‘CEO 인문학’이라는 제목으로 세상에 나왔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다

    이 책이 여타 ‘고전 읽기’와 다른 점은 정규 강의뿐만 아니라 가슴 설레는 입학식에서 기말리포트 제출과 수료식까지 AFP 강좌 전 과정을 시간의 흐름대로 보여준다는 것이다. 덕분에 독자는 저명인사들과 함께 ‘서울대 인문학 과정’을 청강하고 있는 기분이 든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인문학에 매료되었을까?



    “공학을 전공했기에 인간에 대해 좀 더 깊게 연구하고 싶었다”(김기열 KTF 부사장). “30여 년간 광고업에서 일했는데 아이디어가 고갈된 듯해서 인문학으로 상상력을 키우기 위해서 왔다”(김낙회 제일기획 대표이사). “집사람과 딸이 나를 빼고 다양한 주제로 대화하는 것을 듣고 퇴출되지 않는 남자가 되기 위해 왔다”(문재우 금융감독원 감사). “일본사, 중국사를 공부하고 일본인, 중국인과 상담(商談)을 벌이니 훨씬 심도 있는 대화가 진행됐다.”(윤동한 한국콜마 회장). 표현은 다르지만 수강생들은 모두 ‘인간에 대한 이해’와 ‘인문학적 상상력’을 기대하고 있었다. 입학특강을 맡은 이어령 교수는 다음과 같이 수강생들의 마음을 콕 짚어낸다.

    “…오늘 CEO들이 인문학 과정을 배우러 이 자리에 온 것은 그동안 반(反)인문학적 사고를 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CEO는 상품 개발, 조직 관리 등에 필요한 경제 경영 지식을 익히느라 바쁘지요. 이제는 그런 지식만으로는 안 됩니다. 오늘의 시장경쟁은 이종격투기 경기장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복싱, 레슬링, 유도 등 각종 격투기를 한데 묶은 경기를 진행하려면 룰을 완화해야 합니다. 한 종목의 룰에 얽매여서는 안 됩니다.”

    AFP 과정 부주임인 배철현 교수(서울대 종교학과)는 “인문학이란 인간을 인간답게 여기도록 하는 학문”이라고 정의한 뒤 인문학의 세 가지 목표를 제시했다. 첫째, 사회구성원으로서 인간을 둘러싼 문제에 대한 비판적인 사고 함양. 둘째, 우리 사회에서 위험에 처한 기본 가치에 대한 이성적 토의. 셋째, 다른 사람들 특히 다른 문화에서 경험된 소중한 유산에 대한 이해. 5개월 동안 진행되는 AFP 강좌는 말 그대로 ‘인문학의 뷔페’다. 저자는 31개 강좌를 역사, 문학, 철학·종교, 예술 그리고 현장답사 5개의 카테고리로 분류했다. 그리고 각 강좌마다 저자의 개인적 경험을 포함한 예습-강의-복습 및 심화학습 순서로 기술한 것도 특징이다.

    예를 들어 배철현 교수의 ‘중동의 뿌리를 통해 본 중동 분쟁과 세계 평화’ 강의가 시작되기 전 저자는 1990년 신문사의 파리특파원 시절을 떠올린다.

    오늘날 중동의 현실을 이해하려면 이슬람의 기원을 알아야 한다. 배 교수의 강의는 이슬람 종교와 오리엔트 문명, 일부 원리주의자들에 의한 이슬람 테러리즘의 뿌리로 이어진다. 강의를 메모하면서 저자는 왜 ‘세계사를 바꾼 사람들’(마이클 하트 지음, 에디터 펴냄)에서 세계 역사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 100명 가운데 무하마드가 1위였는지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저자는 ‘인문학의 뷔페’에서 중동 코너를 어슬렁거리다 예정에 없던 ‘고대문자’를 슬쩍 접시 위에 올려놓는다.

    AFP 과정을 마치면 수강생들은 기말보고서를 제출해야 한다. 저자는 ‘호연지기(浩然之氣)를 키우리라’라는 제목의 보고서에서 먼저 비즈니스에서 왜 인문학적 교양이 필요한지 사례를 들어 설명했다. 한국에서 명문대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한국인 지사장과 미국 유통업체 임원의 만남. 마침 미국인 임원도 영문학도였던지라 제임스 조이스와 밀턴과 존 업다이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했다. 하지만 한국인 지사장은 묵묵부답이었다. 상품과 골프 외에는 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그 자리에 배석했던 변호사의 탄식이 이어졌다.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만 읽었더라도 5000만달러어치를 수출할 수 있었을 텐데….”

    CEO 인문학과 노숙자 인문학

    행복한 인문학 임철우 외 12인 지음/ 이매진/ 272쪽/ 1만2000원

    그러나 무엇보다 저자가 생각하는 인문학은, 인간이란 무엇인가에서부터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에 이르기까지 온갖 궁금증을 풀어주는 학문이다. 그래서 생각을 크게 만들어주는 학문이다.

    “효율성을 핵심으로 하는 기업에 몸담은 남정네들은 점점 왜소해져간다. ‘호모 사피엔스’를 ‘인적 자원’이라 부르는 상황이니 그런 분위기가 당연하지 않으랴. 호걸을 만나기가 어렵지 않은가. 경영자는 단기 성과에 매달리다 보니 장기 비전을 세우지 못하는 것 아닌가.” 이것이 왜 ‘CEO 인문학인가’에 대한 답이 될지도 모르겠다.

    아름다운 배움

    노숙인들을 대상으로 문학·글쓰기 강의를 하고 있는 문학평론가 고영직씨에게 어느 노숙인이 밤중에 전화를 걸어왔다. “교수님, 제가 시를 썼는데요, 여기에 쉼표를 찍어야 할까요, 마침표를 찍어야 할까요?” 당시의 감정을 고씨는 이렇게 말한다.

    “아무도 울지 않는 밤은 없다고 했던가. 우리 영혼은 서로 연결되어 있을 뿐 아니라, 어쩌면 섞일 수도 있다는 시적 믿음을 갖게 하는 사례들은 인문학 코스에 참여한 분들이라면 한 번쯤 경험해보았을 것이라고 믿는다. 내 안의, 우리 안의 두꺼운 페르소나를 벗고, 화장발도 조명발도 없이 서로의 얼굴과 가슴을 마주할 때, 나와 너와 우리는 ‘참된 전체’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가능성 또한 점차 자라났음은 물론이다. 인문학으로 말 걸기는 인문학 코스의 경험을 통해 점점 인정과 지지를 받기 시작한 셈이다.”(행복한 인문학·이매진 펴냄)

    노숙인을 위한 인문학 강좌는 2005년 9월 노숙인다시서기지원센터가 삼성코닝의 지원을 받아 ‘성프란시스대학 인문학과정’을 열면서 시작되었다. 입학신청을 한 노숙인들 가운데 20여 명을 선발해 8개월간 철학, 역사, 예술사, 문학, 글쓰기 등 기초 인문학 교육을 한다. 이렇게 술병 대신 책을 든 노숙인의 상당수가 자립에 성공하자, 노숙인 인문학과정은 자활근로자, 교도소 수용자, 지역주민으로까지 대상을 넓혀갔고 ‘실천인문학’ ‘현장인문학’ ‘평화인문학’ ‘시민인문학’ 등 다양한 이름의 코스가 개설되었다.

    ‘행복한 인문학’은 여러 인문학 코스에 참여했던 강사진 13명이 함께 쓴 책이다. 이들에게 영감을 준 미국의 언론인 얼 쇼리스는 1995년 미국 뉴욕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한 인문학 코스(클레멘트 인문학 코스)를 처음 개설하면서 다음과 같은 의문을 품었다.

    “인문학은 가난한 사람들이 ‘정치적 삶’을 사는 데 있어서 필수단계인 ‘성찰적 사고’를 할 수 있도록 이끌 수 있는가?”

    한국의 상황도 비슷했다. 경기도에서 열린 ‘자활참여주민 인문학 교육’에서 문학을 강의한 임철우 한신대 교수는 이런 의문에 대해 “확신보다는 차라리 ‘그럴지도 모름’ 혹은 ‘그렇기를 바람’, 아니 ‘부디 그러면 얼마나 좋겠는가’ 정도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결과는 놀라움이었다. 매번 세 편의 시를 낭송하고 감상하는 수업에서 수강생 대부분이 너무나 정확하게 작품을 이해했다. 임 교수는 이 수업을 통해 “문학은 지식이 아니라 본디 현실의 삶 속에서, 그 생생한 육성 언어에서 피어나는 꽃”임을 확인했다.

    고영직씨도 노숙인, 자활근로자, 교도소 수용자를 대상으로 강의하면서 인문학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었다고 말한다.

    “나는 인문학 과정에서 다른 나를 발견하고 스스로를 표현하면서 다른 삶과 다른 사회를 꿈꾸려는 근원적인 충동이 누구에게나 있으며, 그렇게 살고자 하는 의지와 열정이 인문학 과정을 통해 무의식적으로 표출된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자기 회의 없는 확신과 신념이 갖는 위험성을 경계하면서 우리는 타인과 더불어 소통하고 대화하면서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은 아닐까. 나는 인문학 수업이 타인과 더불어 소통할 수 있는 저마다의 ‘사연’을 충분히 제공했다고 믿는다.”

    ‘행복한 인문학’에 대한 추천사에서 소설가 공선옥씨는 좀 더 명료하게 배움의 의미를 정리한다.

    “어떤 이유로든 배움의 기회를 놓쳐버린 사람들에게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온다는 것은 행운이다. 더구나 그 배움이 출세하기 위해 혹은 돈벌이를 더 잘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좀 더 고결한 영혼을 갖기 위한 것이라면, 가르치는 사람이나 배우는 사람이나 그보다 더 아름다운 사람들일 수 없을 것이다.”

    인문학은 CEO나 노숙인에게나 공평하게 ‘아름다운 배움을 통한 고결한 영혼’을 선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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