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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수, 우회라는 실존의 긴 여정

  • 함정임│소설가·동아대 문예창작과 교수 etrelajiham@empal.com

향수, 우회라는 실존의 긴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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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어로 귀환은 ‘노스토스(nostos)’이다. 그리스어로 ‘알고스(algos)’는 괴로움을 뜻한다. 노스토스와 알고스의 합성어인 ‘노스탈지’ 즉 향수란, 돌아가고자 하는 채워지지 않는 욕구에서 비롯된 괴로움이다. - 위의 책 중에서

‘향수’는 망명 작가 쿤데라가 작품을 통해 끊임없이 자신의 정체성을 타진하고 확인해온 정점에 위치하며, 죽기 전에 반드시 써야 하는 통과제의 같은 작품. 그는 1989년 동서장벽이 무너진 지 10년 후, 그의 나이 70세에 처음이자 마지막 귀향담인 ‘향수’를 써서 21세기 벽두 세상에 발표했다. 서사는 두 줄기 이레나와 조제프의 이야기. 처음엔 각자의 에피소드(支流)로 출발해서, 중간 중간 서로 섞이고, 후반부에 크게 합일점(카타르시스·大河)을 이룬 뒤 다시 각자의 흐름(길)을 여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마치 스메타나의 교향시 ‘나의 조국’처럼). 두 사람의 공유지점은 20여 년 전 공산 정권하의 고등학생 시절과 자유체제의 현재. 여자에 반했던 남자는 여자의 존재를 깡그리 잊은 상태이고, 한때 스쳤던 남자의 추억을 간직하고 있던 여자는 우연히 귀향길에 만난 남자를 한눈에 알아본다. 쿤데라의 여느 소설처럼 여성과 남성의 사랑관에 대한 아이러니의 묘미와 함께 한 편의 악곡 형식을 느낄 수 있으며, 작가의 방대하고도 깊이 있는 지식을 경험할 수 있다.

청춘의 기억

서방 세계로 망명한 그를 일약 세계적인 작가의 반열에 오르게 한 작품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비롯해 ‘농담’‘불멸’‘느림에 대하여’‘웃음과 망각의 책’ 등에서 음악·언어학·인류학·철학·문학적 담론들을 소설에 자유자재로 사용해온 작가인 쿤데라는 ‘향수’에서 인류 최초의 귀향담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모든 시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모험가인 율리시스는 가장 위대한 향수병자이기도 했다.”

쿤데라는 무라카미 하루키와 함께 1980년대 말 한국 시장에 소개돼 독서계를 강타한 베스트셀러 작가. 한번 읽으면 쉽게 벗어날 수 없을 정도로 감염력이 강한 이들의 문장은 집단적 광장의 구호로 격동의 시절을 통과하면서 황폐해질 대로 황폐해져 있던 1980년대 말 한국 문단에 거침없이 침투했고, 속삭이듯 감미롭고, 냉소하듯 차가우며, 신랄한 듯 현란한 문장을 탱크부대처럼 앞세워 단시간에 엄청난 세력을 확장했다. 프라하 중앙역에서 열차를 타고 브루노로 향하는 3시간 동안 나는 청춘시절부터 쫓아온 이들, 동시대인의 문학적 여정을 반추했고, 쿤데라가 ‘향수’의 또 다른 주인공 조제프를 통해 끊임없이 2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사색의 여정에 동참했다.



망명자가 이십 년간을 외국에서 살다가 고향에 돌아왔을 때 아직도 백년을 더 살아야 한다면 그는 위대한 귀향의 감동을 거의 느끼지 못할 것이며, 이는 그에게 귀향이 아니라 실존의 긴 여정 위의 수많은 우회들 가운데 하나일 따름일 것이다. - 위의 책 중에서



브루노 역에 내려 플랫폼을 빠져나가자 거미줄처럼 트램 레일이 뻗어 있었고, 노숙자들이 벤치와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프라하에 비해 관광객이 눈에 띄지 않았고, 그만큼 도로 표지판의 글자들은 내가 해독할 수 없는 기호로 와글거렸다. 정류장에서 3시간짜리 자유 승차 티켓을 사서 무조건 트램에 올라탔다. 세 정거장쯤 지나자 격조 있는 건축물로 둘러싸인 넓은 광장이 나왔다. 내리고 보니, 중심지였다. 광장을 빙 둘러 브루노 대학 건물들이 퍼져 있었다. 카프카와 릴케, 스메타나와 드보르작이 프라하 출신이라면, 20세기 현대음악의 거장 야나체크와 쿤데라는 이곳 모라비아 출신. 내가 모라비아에 온 것은 현란한 문장으로 내 청춘 시절을 감염시킨 쿤데라가 태어나고 어린 시절을 보낸 현장에 서보기 위해서였다. 왕복 6시간을 들여 얻고자 한 것은 파리에서 ‘향수’를 써야 했던 작가 쿤데라라는 한 인간에 대한 이해와 애정, 곧 작가라는 족속의 삶과 운명의 현재적 표정이었다.

프라하행 열차는 한 시간 후, 나는 브루노 중심의 자유광장가 파라솔 아래 앉아 브루노 전통맥주인 스타로브루노를 홀짝이며 ‘향수’를 쓰기까지 노년의 쿤데라가 사로잡혀 있던 조국의 의미에 대해 생각했다. 저녁 6시에 가까웠으나, 여름 해는 서쪽 하늘에 아직 쩡쩡했다.



체코인들이 조국을 사랑했던 것은 … 작고 끊임없이 위험에 처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애국심은 조국에 대한 커다란 연민이다. 덴마크인들도 이와 유사하다. 조제프가 이 작은 나라를 망명지로 택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 과거는 오늘날 그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는 더 이상 과거에 살고 있지 않았다. … 인간은 현재의 순간만을 확신할 수 있다. - 위의 책 중에서

신동아 2012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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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정임│소설가·동아대 문예창작과 교수 etrelajiham@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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