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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어떤 무용(無用)의 세계

  • 함정임│소설가·동아대 문예창작과 교수 etrelajiham@empal.com

소설, 어떤 무용(無用)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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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어떤 무용(無用)의 세계

어떤 작위의 세계
정영문 지음, 문학과지성사, 294쪽, 1만1000원

벌써 10년 전이다. 펜으로 정영문의 작가 초상을 그린 적이 있다. 제목을 얹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던가, 아니면 다 그리고 제목을 얹었던가. 기억이 확실하지 않다. 어쨌든 그때 공식적으로 발표된 그 작가 초상의 제목은 ‘이것은 정영문이 아니다’이다. ‘깃털의 현상학’이란 부제를 곁들였는데, 뭔가 그럴듯한 가필이 필요했던 모양이다. 초상화의 첫 획은 이렇게 출발한다.

101) 초현실주의 화가 마그리트 식으로 표현하자면, 아니 후기구조주의자 푸코 식으로 주석을 달자면, 이것은 정영문의 초상(肖像)이 아니다. 나는 다만 느리게 공중을 유영하는 어느 날개 큰 새의 깃털을 눈으로 따라갈 뿐이다. 100) 깃털로 보아 그는 전생에 시조새[始祖鳥]였거나 후생에 알바트로스(信天翁)와 연결되지 않을까. 조류 최고(最古)이나 화석동물이고 이가 있으며 날개에 발톱이 달린 시조조보다는 그는 어쩌면 보들레르의 애조(愛鳥) 신천옹에 가까울지 모른다. … 98) 가벼움으로, 혹은 어렴풋함으로 존재감이 몹시 불안정해도 나는 이 글을 마칠 때까지 깃털의 흐름을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할 것이다. 피카소처럼 ‘새’를 극단순하게 스케치하려면, 프레베르처럼 ‘새의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서’는 얼마나 오랜 시선을 대상을 향해 유지해야 하는가. - ‘이것은 정영문이 아니다-깃털의 현상학’(‘문학동네’ 2002년 봄호) 중에서

‘이것은 정영문이 아니다’라고 깃발처럼 내건 이 제목은 사실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 ‘파이프’에서 제목을 차용한 것이다. 그림에는 파이프가 큼직하게 그려져 있다. 그런데 파이프 아래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Ce n‘est pas une pipe).’ 분명 눈에 보이는 것은 파이프 ‘형상(이미지)’이나, 눈으로 읽는 것은 파이프가 아니라는 ‘텍스트(문자)’다. 이 그림을 놓고 후기구조주의 철학자인 미셸 푸코는 장문의 철학적 분석을 했는데, 해석의 요지는 ‘이미지의 반역’, 문학용어로는 모순(Ironie) 어법이다. 곧 관습적으로 보고 읽는 행위에 대한 충격과 배반을 통해 새로운 의미, 새로운 해석을 유도하고, 창출하는 것. 정영문은 누구, 아니 무엇인가? 그가 누구인지 알아내는 방법은 철저히 그가 누구인지 모른다는 것을 전제로 할 때 가능하다. 그래서 동원된 것이 시조새이며 알바트로스다.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도무지 없으며 기껏해야 깃털 수준, 그것도 언뜻 보였다 사라지는 신기루 같은 수준, 곧 현상일 뿐이라는 것. 정영문이라는 작가에 대한 초상은 그대로 그가 지어낸 텍스트(문자행위)로 이행된다.

서사의 흐름 뒤엎는 모순 어법

이 글에는 샌프란시스코에 관한 이야기도 있지만 이 도시에 관한 이야기는 아니다. 나는 이 도시에 머물면서 되도록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느끼고 경험하려 하지 않았는데 특별히 보고 듣고 느끼고 경험하고 싶은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글은 그냥 보이는 대로 들리는 대로 듣고 느껴지는 대로 느끼고 어쩔 수 없이 경험되는 대로 경험한 것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아니, 그보다는 보이는 대로 보지 않고 들리는 대로 듣지 않고 느껴지는 대로 느끼지 않고 경험한 대로 받아들이지 않은 것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 정영문,‘어떤 작위의 세계’ 중에서

한 편의 소설을 창작하는 것은 한 채의 집을 짓는 것과 유사하다. 모순 어법이란 이런 집짓기에서 한 단어 한 단어 연결해 문장을 만들고, 한 문장 한 문장 축조해가다가, 문득 지금까지 진행된 과정(길)을 전면 부인하거나 싹둑 잘라버림으로써 무효로 돌리는 서사법이다. 이러한 모순 어법을 소설에 끌어들인 작가는 프란츠 카프카다. 정영문이 한 단락, 또는 한 장면 끝에 이르러 매번 서사의 흐름을 뒤엎는 전복의 방식이라면, 카프카는 한 문장 안에 배치된 어휘의 차원에서 작동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이러한 특징으로 인해 카프카의 문장은 매끄러운 번역이 불가능한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아무리 유능한 독일어 번역자라도 카프카의 문장만은 읽어내기 쉽지 않은 어색한 문장으로 옮겨놓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번역자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카프카의 문장을 제대로 옮기는 것이야말로 가장 읽기 곤란한 상태라고 토로하기도 한다.

“너는 이제 더 이상 무엇을 알고 싶은가?”라고 문지기가 묻는다. “네 욕망은 채워질 줄 모르는구나.” “하지만 모든 사람들은 법을 절실히 바랍니다” 하고 그 남자는 말한다. “지난 수년 동안 나 이외에는 아무도 입장을 허락해줄 것을 요구하지 않았는데, 어째서 그런가요?” 문지기는 그 시골 사람이 이미 임종에 다가와 있다는 것을 알고, 희미해져가는 그의 청각에 들리도록 하기 위해서 소리쳤다. “이곳에서는 너 이외에는 아무도 입장을 허락받을 수 없어. 왜냐하면 이 입구는 단지 너만을 위해서 정해진 곳이기 때문이야. 나는 이제 가서 그 문을 닫아야겠네.” - 프란츠 카프카 지음, 이주동 옮김, 솔출판사, ‘법 앞에서’(‘카프카 단편전집 변신’ 수록) 중에서

소설의 근간은 스토리다. 스토리는 진행되면서 문맥을 형성하고, 그 문맥에 따라 독자는 내용을 파악한다. 그런데 ‘법 앞에서’를 비롯한 카프카의 소설들은 스토리를 따라 읽되, 마치 비밀을 내장한 암호문처럼 문맥은 쉽게 간파되지 않는다. 프라하의 독일계 유대인 출신이라는 카프카의 특수한 정체성이 그의 언어(소수 민족의 언어), 곧 어휘의 이면에 스며들어 있기에 어휘들의 합성인 텍스트의 표면을 이루는 스토리만으로 그 속뜻을 꿰뚫어보는 것이 쉽지 않다. 꿰뚫기는커녕 작품 속으로 들어가는 방법(입구)조차 찾아내지 못해서 전전긍긍한다.

수많은 리좀(뿌리줄기), 또는 굴(窟)을 거느린 소설로 부각되기도 한다(들뢰즈·가타리 지음, ‘카프카-소수 민족의 언어’ 중에서).

카프카의 작품 속으로 들어가는데 애를 먹는 만큼 빠져나오는 데도 마찬가지다. 어디서 시작됐는지, 또 어디에서 끝날지 알 수 없는 꿈속에 느닷없이 끌려들어와 있는 듯한 느낌과 흡사하다.

정영문의 소설은 카프카의 그것처럼 거대한 꿈의 파편들로 이루어진 형국이다. 어떤 소설을 써도 결국은 꿈이라는 제국으로 귀속될 뿐이다. 때로 꿈은 성(城)으로 대체되거나, 굴(窟) 또는 리좀으로 대체 가능하다. 입구를 찾지만 결국 찾지 못하는 꿈(악몽)이 카프카 소설의 본질에 해당된다면, 정영문의 꿈은 카프카적이지만 리좀이나 굴, 성을 향한 강박이 제거돼 있고, 대신 ‘지극히 사소하고 무용’한 말놀이가 서사의 동력을 형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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