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2월호

힙한 천국 망한 청춘의 우울한 비망록

  • 함정임 │소설가·동아대 문예창작과 교수 etrelajiham@empal.com

    입력2014-01-22 14: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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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힙한 천국 망한 청춘의 우울한 비망록

    천국에서<br>김사과 지음, 창비

    새해 벽두 김사과의 소설을 읽는다. 이 말은 21세기 한국 젊은 소설의 최전선과 만나는 것, 동시에 10대와 20대의 일상과 세계 인식을 가장 깊숙이 들여다보는 것을 뜻한다. 또한 21세기 소설이란 무엇인가라는 원론적인 질문을 새삼, 다시 던지는 것과 같다. 각설하고, 스물한 살 김사과의 데뷔 단편 첫 장면을 보자.

    영이야. 아이들이 영이를 불렀다. 영이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니까 영이까지 합쳐서 다섯 명의 영이가 뒤를 돌아보았다. 먼저 은영이의 영이가 명랑하게 뛰어갔다. 정현이의 영이도 은영이에게 달려갔다. 주희의 영이는 예쁜 레이스 치마를 입었다. (…) 놀란 눈으로 영이는 달려가는 영이들을 바라보았다. 방금 전까지 영이는 영이 하나뿐이었는데 아이들이 부르자 하나의 영이와 네 개의 영이들이 된 것이다. -김사과, ‘영이’, 창비

    언뜻 이상의 시 ‘오감도’를 연상시킨다. 동시에 초현실주의 화가가 불러낸 무한 증식의 장면들을 보는 듯하다. ‘영이’를 앞세운 김사과의 등장은 그동안 한국의 실험 소설들이 너무 소극적이고 관념적이었음을 반증했다. 첫 장편 ‘미나’ 이후 지속적으로 발표한 ‘풀이 눕는다’, 그리고 ‘테러의 시’는 ‘앙팡 테리블’이라는 수사가 옹색하게 느껴질 정도로 이질적이고 파괴적이었다. 혹자는 그것을 단박에 혁명으로 알아보았다.

    시적 문장, 참혹한 서사

    “민호.” 수정이 인사한다. 문틈으로 수정의 뺨이 약간, 직삼각형 모양으로 드러난다. “수정.” 민호가 인사한다. 수정이 열린 문틈으로 폴짝 뛰어 들어온다. 수정이 빠져나온 틈새가 신속하게 메워지며 현관문 잠금장치가 세 음절로 노래한다.



    수정은 천천히 거실을 향해 걷는다. 하늘. 수정이 고개를 꺾고 천장을 바라본다. 샹들리에. 거기 빛이 있다. 수정은 눈을 가늘게 뜨고 미소 짓는다.“미나.” -김사과, ‘미나’, 창비

    김사과 소설의 출발은 매우 시적이다. 한눈에 훅 빠져들 정도로 시적인 문장과 이어지는 행간의 흐름은 경쾌하기도 하고 서정적이다. 그런데 서정적이고 경쾌한 시적인 문장 이면에 도사린 서사의 내용은 참혹하다. 마치 세이렌의 유혹처럼 거부할 수 없는 매력에 홀려 소설의 함정에 쑥 빠져들지만, 거기에서 빠져나올 때는 끝을 본 자의 공허에 질려 있을 뿐이다. 그가 다루는 내용은 하나같이 한국 사회가 은폐하거나 방기한 최악의 장면, 최악의 사태이기 때문이다. 폭력으로 점철된 가족의 일상을 그린 단편 ‘영이’, 죽여서라도 친구의 마음을 느껴보고자 살인을 저지른 10대 소녀의 극단적인 욕망을 그린 ‘미나’, 조선족 제니와 영국인 불법체류자 리를 통해 서울과 한국의 총체적인 파국을 테러의 시간으로 접근한 ‘테러의 시’들이 그것이다.

    길은 하늘과 구별되지 않는다. 하늘은 모래와 구별되지 않는다. 모래는 도시와 구별되지 않는다. 노란 꿈이 절정에 닿아 있다. 차가 모래 속에서 전진한다. 모래가 차 위로 전진한다. 커튼 속 여자들이 어둠 속에서 꿈틀거린다. 갑자기, 굉음과 함께 차가 살짝 흔들린다. 여자가 뒤를 돌아본다. 그들이 방금 빠져나온 집이 무너져 내린 것이 보인다.

    무너져 내린 집에서 동물의 커다란 비명 소리가 들려온다. (…) 제니가 웃는다. 찢어진 커튼 속에서 제니가 웃는다.

    -김사과, ‘테러의 시’, 민음사

    소설이라는 종자의 기원은 재미, 그러니까 오락의 기능에 있다. 소설이 많은 독자를 거느릴수록 오락성에 뿌리를 두고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순수 문학, 곧 작품으로서의 소설은 예술과 사상, 둘 중 하나에 무게 중심을 둔다. 오락의 세계는 이 둘 중 어느 것과도 결합 가능하다. 작품성과 재미를 두루 갖춘 소설이 그것이다. 거꾸로 재미만으로 작품성을 갖춘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작품성이 높다고 해서 재미가 있는 것만은 아니다.

    ‘힙스터’ 여대생 케이의 방랑기

    특정한 부류의 독자, 소수의 독자에게 (재미보다는) 의미가 있는 소설들이 있다. 충격을 통해 불편한 진실을 조명하는 김사과의 경우, 후자에 해당될 것이다. 충격은 새로움을 갱신하는 가장 효과적인 미학 기법이다. 단편 ‘영이’에서부터 ‘테러의 시’까지 경쾌한 스타카토 문장과 잔혹한 영상으로 충격파의 수위를 높여갔다면, 이번에 발표한 ‘천국에서’는 충격파를 완화시키며 그동안 의도적으로 단절했던 서사를 복원하고 있다.

    케이는 원하고 있었다. 흥미진진한 뭔가를. 삶의 지루함을 날려버려 줄. 그런 걸 얻을 수 있다면 뭐든 하겠다. 어떤 위험이든 상관하지 않겠다. (…) 케이가 원하는 건 그저 사람들이 우화, 하고 부러워할 만한 것들, 근사해 보이는 사람들 틈에 끼어서 보란 듯이 젊음을 과시하는 것이었다. (…) 약간의 용기는 필요했다. 가끔 늦은 새벽 혼자서 불 꺼진 거리를 가로질러야 했고, 파티에서 만난 모르는 사람이 준 뭔가를 삼켜야 하기도 했다. 하지만 뭐 어때, 어차피 잠깐이잖아. 결국은 돌아가야 할 테니까. 그리고, 그러고 나면, (…) 어쩌면 이게 내가 가진 운의 전부다.

    -김사과, ‘천국에서’

    ‘천국에서’는 김사과가 즐겨 사용한 핫한 충격 대신 힙한 현장을 제시한다. 한국의 속성 자본주의 시스템의 산물인 속물 중산층 출신 여대생 케이의 방랑기로 요약할 수 있는 이 소설은 힙스터들의 일상과 의식을 바닥까지 보여준다. 힙스터(hipster)란 사전적인 의미로 대중의 큰 흐름을 따르지 않고 자신들만의 고유한 패션과 음악 문화를 좇는 부류를 뜻한다. 처음엔 패션용어였으나 2000년대 뉴욕과 전 세계 대도시로 급속도로 퍼져나가면서 사회적인 용어로 자리 잡은 상태다. 뉴욕 맨해튼, 서울의 홍대 앞과 신사동 가로수길이 힙스터들의 무대로 꼽히는데, 소설에도 그대로 등장한다.

    케이가 약속 장소인 가로수길의 까페에 도착했을 때 재영은 이미 그곳에 와 있었다. 창가에 앉아 커피잔을 내려다보고 있는 재영은 언제나처럼 완벽했다. 숱이 많은 짙은 갈색 머리는 어깨 너머로 가지런히 넘겨져 있었고, 살굿빛 블라우스 위로는 값이 많이 나가 보이는 가느다란 금 목걸이가 드리워져 있었다. 의자 아래로 보이는 신발 위에는 토리 버치의 금색 로고가 반짝거렸다. 케이가 손을 흔들며 재영에게 다가갔다. (…) 케이는 자리에 앉으며 재영의 옆에 놓인, 이제는 꽤 낡은 티가 나는 발렌시아가의 모터백을 흘끗 본 다음 뉴욕에서 사온 자신의 알렉산더 왕 숄더백을 탁자에 올려놓았다.

    “가방 샀어? 예쁘다.” 재영이 말했다.

    “응, 뉴욕에서. 쎄일하길래 샀어.”

    -김사과, 위의 책

    ‘천국에서’의 중심 인물인 케이는 영어 연수를 위해 뉴욕에서 여름을 보내고 돌아온 참이다. 본명은 한경희. 케이는 어설프게 뉴욕물을 먹은 힙스터로서의 현재 이름을, 한경희는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3년 동안 옮겨가 살았던 초등학교 시절 인천의 과거 이름을 지칭한다. 한 인물이 어떻게 불리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양상을 띠는데, 둘의 길항작용에 따라 서사적 긴장력이 팽팽하게 형성된다. 힙스터들의 천국 뉴욕에서 여름 한 철을 보내고 돌아온 케이에게 서울의 모든 것은 시시하게 비친다. 이후 케이의 동선(動線)은 이 시시함의 지옥에서 벗어나려는 안간힘, 곧 통과제의에 해당된다.

    케이는 모든 것이 시시하게 느껴졌다. 그것은 뉴욕에 갔다 온 뒤로 시작된 증세였다. 돌아온 뒤 서울의 모든 것이 하나같이 어딘가 모르게 덜떨어지게 느껴졌다. 특히나 사람들이 그랬다. 세련되게 젊음을 탕진하는 귀여운 백인 여자애나 3개 국어를 할 줄 아는 어딘가 천재 같은 유대인은 서울에서는 기대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서울에서 만난 사람들도 좋은 점은 있었다. 하지만 나쁜 점도 그만큼 있었다. 한마디로 어정쩡했다. (…) 케이는 이 어정쩡한 상황에서 자신을 꺼내줄 뭔가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김사과, 위의 책

    마지막 한 조각 케이크

    케이는 다가오거나 우연히 만난 남자들을 통해 저쪽(뉴욕)과 이쪽(한국), 케이와 한경희의 간극을 직시한다. 뭘 해보기도 전에 망해버린 세상, 망해버린 청춘. 이런 케이의 심리 상태와 외부 환경을 독자가 마치 자기 일인 양 겪을 수 있는 것은 중간중간 장치한 작가의 코멘트(부연설명, 혹은 추신, 혹은 여담, 혹은 이중 서술) 효과가 크다. 새로움이란 작가의 타고난 감각과 사회학적 내공의 산물임을 여실히 보여주는 예다. 그것이 새해 벽두 김사과를 읽는 이유다.

    그 여름 케이가 뉴욕에서 경험한 것은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경제적 자유주의의 확산과 인터넷의 발달로 서양과 일부 아시아 국가의 중산층 젊은이들 사이에 퍼져나간 삶의 양식으로, 전후 부흥기가 남긴 마지막 한 조각 케이크였다. 즉, 케이크를 포함한 이 젊은이들은 20세기에 대량생산된 중산층의 마지막 세대, 혹은 몰락하는 중산층의 가장 첫 번째 세대였다.(…) 우리는 어떤 것도 소유할 수 없다. 우리가 소유하게 되는 것은 소유했다는 환상뿐이다. (…) 마지막에 남는 것은 탕진의 기술뿐이다. (…) 좋은 날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하나의 세계가 몰락하는 중이었고, 케이는 바로 그 안에 속해 있었다.

    -김사과, 위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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