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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힘’은 어디까지 퍼져나갈 수 있는가

  • 정여울 │문학평론가 suburbs@daum.net

‘한 사람의 힘’은 어디까지 퍼져나갈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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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힘’은 어디까지 퍼져나갈 수 있는가

척하는 삶
이창래 지음, 알에이치케이

최근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 출신의 전범이 위안부 납치와 중국인 양민학살은 물론 일본군의 각종 악행을 고백해 화제가 된 바 있다. 스즈키 게이쿠라는 일본 전범은 1934년 6월 중국인 농민 두 명을 살해했으며, 1945년 7월까지 5000명이 넘는 중국인을 살해했다고 진술해 충격을 주었다. 1941년 안후이성 차오현에 위안소를 설치해 20여 명의 중국인 부녀자와 조선인 부녀자를 유괴해 위안부로 삼았다는 내용도 그의 ‘자백서’(‘日전범, 조선부녀자 등 20명 유괴, 군위안부 삼았다’, 연합뉴스, 2014.7.3.)에 포함돼 있다.

아시아는 물론 전 세계의 패권을 노리는 중국의 외교적 책략의 일환으로서 일본에 대한 역사적 심판이 일종의 정치적 도구가 된다는 점도 간과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 기사를 보면서 내 마음속에서 피어나는 화두는 바로 이것이었다. 어쩌면 한 사람의 힘으로도 역사는 바뀔 수 있다는 것. 이 고백이 정말 사실이라면, 그리고 그 고백의 진정성이 참으로 어떤 외압도 아닌 순수한 양심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라면, 바로 그런 한 사람의 힘이야말로 역사를 바꾸는 희망이 아닐까.

자신의 행동을 뉘우치는 한 사람의 꾸밈없는 양심이야말로 우리 시대에 진정 필요한 한 사람의 힘이다. 그리고 누군가의 뜨거운 질문이 뿜어내는 사회적 파장도 바로 우리 시대가 반드시 요구하는 한 사람의 힘이다.

이창래의 ‘척하는 삶’을 읽으면서 나는 바로 그 뜨거운 한 사람의 힘을 느꼈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1인 시위나 일본정치가들의 망언 관련 뉴스가 나올 때마다 나는 심각하게 고민했다. 과연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낼 수가 있을까. 이제는 당시 상황을 증언할 수 있는 생존자마저 하루하루 줄어가는 상황에서 이 문제를 과연 어떻게 사회적 의제로 바꿀 수 있을까. 이 작품은 일본군의 위안부 문제는 숨기고 감추고 떠밀어야 할 문제가 아니라 반드시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풀어내야 할 숙제임을 일깨운다.

‘타인의 시선’이 만들어낸 감옥

조선인 위안부를 착취하고 살해하기까지 했던 버마의 한 일본군 부대에서 군의관으로 일한 하타는 끔찍한 기억을 가슴에 묻은 채 미국으로 이주했다. 한창 전쟁 중일 때 20대 청년이던 그가 이제는 70대 노인이 되어 ‘훌륭한 미국 시민’으로 살아간다. ‘제스처 라이프(gesture life)’라는 상징적인 원제(原題)는 바로 이런 참혹한 역사적 상처를 끌어안고 사는 사람이 아무런 문제도 없는 ‘모범적인 시민인 척’ 살아가는 아이러니를 꼬집는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하타에 대한 풍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척하는 삶’을 유지하느라 버려야만 했던 수많은 인생의 가치를 환기하는 제목이기도 하다.

그는 자신이 조선인 위안부 끝애의 집단 강간과 학살의 현장을 목격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는다. 작품이 끝나는 순간까지도. 작가 이창래는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진실을 끝까지 마음속에만 품고 사는 사람’의 이야기를, 타인에 대한 지극한 속죄의식과 모범시민의 완벽한 제스처라는 이중의 잠금장치로 봉인한다. 하타는 위안부 끝애를 사랑했던 과거를 잊지 않은 채, 누구도 끝애만큼 마음을 다해 사랑하지 못한 채, 한국인 소녀 서니를 입양해 자기보다 훌륭한 미국 시민으로 키워내는 것을 목표로 삼아 살아가고 있었다.

이 인물의 내면은 실로 복잡미묘하다. 끝애에 대한 사랑과 죄책감이 그를 평생 혼자 살아가게 만들었으며, 끝애에 대한 연민을 서니에게 투사하면서도 서니를 모범적인 미국 시민으로 키워내려 하며, 서니에 대한 지극한 부성애를 느끼면서도 서니가 가출해 흑인 남자의 아기를 가졌을 때 딸을 완전히 ‘진짜 아버지’처럼 품어주지는 못한다.

그는 어떤 순간에도 ‘타인의 시선’이 만들어낸 감옥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그는 스무 살도 안 된 서니가 만삭의 몸으로 나타나자 딸에 대한 걱정보다도 우선 ‘남들이 볼까봐’ 전전긍긍한다. 이런 태도는 서니를 덜 사랑해서가 아니라 서니를 자신처럼 ‘불안한 정체성의 감옥’에 가두지 않기 위한 안간힘이다. 그러나 일본인도 한국인도 아니며, 끝내 진정한 미국인도 될 수 없었던 그의 불안한 정체성이야말로 그가 이 소설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최적의 자격요건이기도 했다. 그는 그렇게 그 누구에게도, 그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사람이었기에 그 모든 이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존재로 성장해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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