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5월호

가족, 상처의 근원이지만 희망의 근원

  • 강유정│영화평론가 noxkang@hanmail.net│

    입력2009-05-06 18: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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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족에 대해 낱낱이 고해하는 것, 그 상처를 드러내는 것은 곧 나의 내밀한 상처를 감싸고 있던 붕대를 벗겨내는 것과 같다. 가족에 대한 비밀, 상처는 자존심의 근원이자 영원한 비밀이기도 하다. 예민한 영혼을 가진, 누구에게나 가족은 고통과 행복의 양가적 역설이다.
    가족, 상처의 근원이지만            희망의 근원

    ‘길버트 그레이프’

    2007년 세상을 떠난 작가 시드니 셀던은 이런 말을 남겼다. “비정상적인 가족이 있다면 누구나 작가가 될 수 있다.” 이 말을 다시 생각해보면, 누구나 작가가 될 수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누구에게나 가족은 버거운 짐일 수밖에 없다. 우리들은 어린 시절 한 번쯤 차라리 자신이 주어온 아이였으면 하고 바라는 시기를 겪는다. 만석꾼에게는 만 가지 고민이 있다는 말처럼 겉보기에 완벽해 보이는 가정일지라도 고민과 문제가 있을 수밖에 없다. 프로이트가 모든 이야기를 업둥이의 서사 혹은 오이디푸스의 살부(殺父)의식으로 해석한 까닭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원초적 갈등의 원인이 바로 가족이라고 말했다.

    공익광고에서는 가족이야말로 힘의 근원, 행복의 원천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가족만큼 개인의 인생에 큰 상처를 주는 집단도 없다. 가장 행복한 순간도 가족에게서 비롯되지만 도저히 아무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깊은 상처도 가족에게서 기인하곤 한다. 어린 시절 무심했던 아버지나 폭력적인 어머니, 다정다감했지만 경제적으로 무능한 부모처럼 가족의 모습은 그 경우의 수가 너무도 다종다양하다. 가족의 모습이 각기 다르다는 것은 원체험의 순간, 그리고 1차적 사회집단으로서 최초의 경험이 각기 다를 수밖에 없음을 의미한다. 늘 비교될 수밖에 없는 형제이기 때문에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가 있었고 유산 상속이나 왕위 계승과 맞물려 가족사가 피로 얼룩지기도 한다. 자신이 낳은 자식을 죽여 남편에게 복수하는 어머니도 있고 자식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이야기도 존재한다. 가족은 인류의 영원한 이야깃거리이자 숙제이며 또 짐인 셈이다.

    사람들은 5월을 가족의 달, 가정의 달이라고 표현한다. 5월5일 어린이날, 5월8일 어버이날 등 유독 5월에는 가족을 챙길 행사가 많다. 하지만 궁핍한 아이에게 크리스마스가 가장 슬픈 날이 될 수 있듯이 5월은 넘쳐나는 ‘가족’ 때문에 우울할 수 있는 달이기도 하다. 5월5일 어린이날을 맞아 하루쯤 멋진 아빠가 되려던 남자가 붐비는 놀이공원에 가서 겪는 당혹감은 아마도 가족의 달의 숨겨진 이면을 잘 설명해줄 것이다. 가족은 일회성 이벤트로 복구되고 회복되는 그런 단순한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가족영화의 가장 큰 효용성은 이런 것이 아닐까? 우리 집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집안이 다 거기서 똑같은 고민을 하면서 산다는 것. 불화와 갈등으로 얼룩진 가정사가 비단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 말이다. 5월 가정의 달에 가족영화를 되살펴 보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여신 헤라는 질투의 화신이다. 남편 제우스가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뭇 여성을 유혹하고 겁탈할 때 헤라는 무서운 질투로 그 여성들을 단죄한다. 간혹 헤라의 질투는 비이성적이며, 지나쳐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바로 헤라가 가정의 여신이라는 것이다. 이는 돌려 말하자면 여성의 질투 없이 가정의 화목이 유지되기 어렵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아내의 질투가 없다면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자식들로 이뤄진 단란한 핵가족의 모습은 상상할 수 없다. 남편은 끊임없이 가정 바깥의 여자를 넘실대는데, 그 넘실대는 욕망에 울타리를 쳐주는 것이 바로 아내의 질투다. 하지만 때로 아내 혹은 남편에 대한 의혹과 질투는 걷잡을 수 없는 파국을 불러오기도 한다. 질투와 단란한 가족, 그 가운데에는 인류가 오랜 시절 시행착오를 겪으며 찾아온 균형의 중점이 놓여 있다.

    여동생 약혼자와 사랑에 빠지다



    배우 이미숙의 복귀작으로도 유명했던 영화 ‘정사’는 결혼과 가정, 행복의 의미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다. 대학교 때 사귄 첫 번째 남자친구와 결혼해서 살고 있는 서현은 청결하게 가꿔진 어항 속 열대어 같은 여자다. 정갈한 식기에 식사를 준비하고 단정하게 단발머리를 유지하는 여자. 중산층 이상의 생활을 제공하는 남편의 경제력과 깔끔한 인테리어. 서현의 주변을 수식하는, 그녀가 누리는 삶의 풍경은 그녀가 바로 행복의 대명사임을 짐작케 해준다. “여자라서 행복해요”라며 냉장고 앞에서 웃고 있는 광고모델처럼 그녀는 그렇게 완벽하게 갖춰진 가정 안에서 화룡점정(畵龍點睛)처럼 자리 잡고 있다. 문제는 그녀의 완벽함이 가꿔진 어항, 잘 관리된 청정지역처럼 인공적이라는 데에 있다. 인공 수목림처럼 그녀가 머무는 삶의 공간은 완벽하지만 어딘가 불안정해 보인다. 그녀의 행복조차 인위적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가족, 상처의 근원이지만            희망의 근원

    ‘파리-텍사스’

    이재용 감독의 ‘정사’는 가정의 행복에 대해 도발적으로 되묻는다. 이 도발적 질문은 행복한 가정의 대명사였던 서현이 다른 이도 아닌 동생의 약혼자와 사랑에 빠진다는 것으로 구체화된다. 서현은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와 섹스를 나눴다는 점에서 남편을 배신하고 그녀가 이루고 있는 가정에 균열을 불러온다. 한편 자신의 여동생이 사랑하고 또 결혼을 약속한 대상과 욕망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혈육으로 이뤄진 가족에 또 한 번 흠집을 낸다. 행복한 가정의 표본과도 같았던 서현이 이 모든 것을 근본적으로 흔드는 혼돈의 핵심으로 바뀌어버린 것이다. 결국 이 모든 사실을 알아버린 여동생은 언니 서현이 선물한 화석을 들고 와 서현의 집 한켠에 자리 잡은 어항을 향해 던져버린다. 화석으로 상징되던 서현의 침전된 욕망과 예쁘고 깔끔하지만 숨 막혔던 서현의 가정은 어항이라는 상징을 통해 무너진다. 화석에 어항이 깨지듯 서현이 유지해왔던 완벽한 가정의 허상은 산산이 부서지고 만다.

    그럼 이쯤에서 다시 한 번 물어보자. 동생에게 불온한 관계를 들키고 남편에게 불륜을 고백한 서현, 그렇다면 그녀의 그 후 삶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영화는 이 질문에 대해 아주 먼 곳으로의 이동이라는 추상적 답을 제시한다. 이혼한 서현, 동생과 화해할 수 없는 지점에 가버린 언니는 비행기를 타고 이름도 낯선 지구본의 반대쪽을 향해 떠난다. 사실, 목적지는 그녀가 살던 이곳, 한국과 그녀의 가정에서 멀다는 것 그 자체를 충족시키는 것이지 구체적 지명으로서의 장소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재용 감독은 완벽해 보이는 중산층 중년 여성의 일탈을 통해 우리가 이른바 행복이라고 부르는 것의 연약함을 드러낸다. 행복한 가정이라는 균형감각이 얼마나 쉽게 깨질 수 있는 것인지 보여준다. 가정의 행복은 부부로부터 시작된다고 해도 무방하다. 남편과 아내 사이에 남자와 여자의 욕망이 개입될 때 부부의 가정은 두 남녀의 오월동주(吳越同舟)로 뒤바뀐다. 부부는 가정의 근본적 단위이기도 하지만 영원히 결합할 수 없는 이질적 욕망의 결합이기 때문이다.

    빔 벤더스 감독의 영화 ‘파리-텍사스’는 그런 점에서 행복의 정점을 나누었음에도 그 하강과 파멸을 함께할 수 없었던 두 남녀를 헤어진 부부의 모습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행복했던 두 남녀, 부부가 서로에게서 도망쳐 영원한 타인이 되어야만 할 때, 그들이 낳은 사랑의 산물이었던 아이가 전리품처럼 남아 사랑의 흔적을 환기하는 순간, 가정은 고통의 기록으로 다가온다. 사막을 헤매는 트레비스의 모습에서 시작된 영화는 그가 아들을 되찾고 마침내 아내를 찾아 나서는 과정으로 진행된다. 트레비스는 퍼즐조각처럼 흩어진 가족을 재구성하기 위해 길을 나선다. 아내 제인이 꼬박꼬박 돈을 보내는 은행을 찾아 휴스턴으로 간 트레비스, 그런데 트레비스는 그곳에서 핍쇼(peep show)로 생계를 유지해나가는 아내와 마주치게 된다. 보이지 않는 반투명 유리 건너에 앉아 있는 그녀, 제인은 이미 그의 아내가 아니다. 트레비스는 전화기 너머 아내, 제인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트레비스가 들려주는 ‘그들의 이야기’는 지독한 사랑과 집착의 이야기다. 젊고 아름다운 아내를 미치도록 사랑했던 트레비스는 그녀를 냉장고에 묶어 때리고 감금하기까지 한다. 잘못된 사랑과 소유욕은 그녀를 영영 다른 곳으로 떠나게 만든다.

    과거 속에만 있는 행복

    영화 ‘파리-텍사스’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트레비스와 제인 부부가 신혼시절 바닷가에서 찍은 캠코더 영상물을 보는 장면이다. 트레비스는 자신의 기억 속 가장 선명하고 아름다웠던 순간을 영상으로 보며 후회와 그리움의 눈물을 쏟아낸다. 영상물 속에 남겨진 그들의 가정은 ‘행복’의 사전적 정의처럼 보일 정도다. 그토록 행복했던 그들의 가정이 지금, 이 순간 유리벽과 전화기 너머에 있는 타인의 관계로 바뀌어 있다. 추억 속에서 행복은 더 완전해지고, 늘 같은 순간만을 반복재생해서 보여주는 영상물 속에 행복은 박제돼 있다. 남편에게 신물 난 아내가 결혼식 비디오테이프를 보면서, 아이의 울음에 지치고 아내의 무관심에 상처 받은 남편이 신혼여행 사진을 보며 위안을 받는 우리의 일상처럼 트레비스의 행복도 언제나 ‘과거’ 속에 있다. 그에게 행복은 ‘과거 완료형’이다. 추억이 된 사진의 프레임 속에서 행복은 그렇게 완전해진다. 서로 지나치게 사랑하는 남녀가 다정한 부부가 될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완전한 연인과 행복한 부부가 꼭 동의어일 수만은 없는 셈이다.

    부부가 서로 멀어질 때 그렇다면 그들 가운데의 아이, 아이에게 불화는 무엇으로 기억될까? 공지영의 베스트셀러를 원작으로 한 영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는 가족으로부터 치명적 상처를 입은 두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사형수 정윤수는 어머니에게 버림받고 아버지의 폭력에 시달린 기억을 지니고 있다. 한편 정윤수와 전혀 다른 환경에서 성장한 문유정은 지나치게 가식적이며 허영에 찬 어머니에게 받은 상처를 가지고 있다. 정윤수의 어머니는 “나도 좀 살자”라며 아이를 거리로 내몰고, 문유정의 어머니는 강간당한 딸을 “수치스러운 것”이라며 비난한다. 어머니, 모성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한 두 영혼은 사형수와 상습 자살미수자로 성장한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은 사회부적응자로 성장한 두 명의 인물을 통해 불온한 가정이 불안한 성장의 원인임을 역설한다.

    트라우마가 된 가족

    흉포한 연쇄살인범이나 범죄자를 다룬 심리극은 프로이트의 이론처럼 성장 환경에서 그 원인을 찾는 경우가 많다. 부모와의 관계가 잘못 정립됐을 때 나타나는 무의식의 고장과 곤란함이 성격 결함과 대사회적 문제행동으로 나타난다는 식으로 말이다. 많은 영화가 개인이 겪는 고통의 원인으로 가족사를 제시한다. 물론 영화들이 골칫덩어리 가족을 대하는 방식은 가지각색이다.

    불온한 가족사와 불행한 개인사는 선후관계는 있지만 반드시 인과관계가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불행을 받아들이는 개인의 스펙트럼은 인과관계의 획일성을 벗어나 있다. 오히려 어떤 작품들은 불온한 가정을 통해 성숙한 개인이 탄생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간혹 가족이란 원래 그런 것이라는 태도로 관조적이고 성숙한 시선을 제공하기도 한다. 조니 뎁이 주연을 맡고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지체장애아를 연기했던 영화 ‘길버트 그레이프’는 바로 후자의 태도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길버트 그레이프의 가족은 말 그대로 골칫덩어리 집안이다. 아버지는 집안에서 목을 매 자살했고 어머니는 그 충격으로 몸무게가 230㎏이 될 때까지 먹는 것에만 열중한다. 엄마는 이제 혼자 힘으로 일어설 수도, 문밖을 나갈 수도 없을 지경에 이른다. 문제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동생 어니는 정신연령이 7세 어린아이에 불과하다. 아이처럼 착하고 순수하지만 틈만 나면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바람에 형 길버트는 걸핏하면 동생을 구조해야만 한다.

    가족, 상처의 근원이지만            희망의 근원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길버트 그레이프에게 가장 큰 고통은 이 지긋지긋한 일상이 반복적이라는 것이다. 길버트에게 골칫덩어리 가족으로부터 탈출할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가족이라는 연대감은 엄마의 몸무게처럼 그를 무겁게 짓누른다. 발목에 무거운 모래주머니를 달고 있는 듯이 살아가던 길버트는 캠핑카에 몸을 싣고 이곳저곳을 유랑하는 소녀를 만나 다른 삶의 가능성을 보게 된다. 우여곡절 끝에 세상을 떠난 엄마와 무거운 엄마의 시신을 집밖으로 꺼내는 과정을 통해 길버트는 쳇바퀴 돌듯 희망 없던 골칫덩어리 가정으로부터 벗어날 기회를 마련한다.

    주목해야 할 것은 길버트 그레이프의 답답한 가정사가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감독의 시선이다. 감독 라세 할스트롬은 무겁고 갑갑한 길버트의 삶에 유랑과 자유의 가능성을 준다. 그는 가족이 주는 고통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면서 한편으로 그것을 지나친 절망의 원인으로 제시하지는 않는다. 언젠가 어머니가 돌아가시듯이 가족으로 인한 고통은 필연적이지만 보편적이기도 하다. 가족이란 그 모습을 달리할 뿐 어떤 개인에게든 짐스러운 비밀의 일부임에 분명하니 말이다.

    대재벌의 사생아로 자란 아들이 마침내 아버지와 화해하는 과정을 그린 ‘매그놀리아’의 메시지도 여기서 멀지 않다. 사기꾼에 협잡꾼 가까운 아들은 자신을 외면했던 아버지를 용서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영화 ‘매그놀리아’의 백미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여겼던 화해와 용서가 실현되는 순간이다. 용서와 화해가 이루어지는 그때, 개구리비가 하늘에서 내리는 기이한 일이 벌어진다. ‘매그놀리아’는 가족과의 화해라는 것이 개구리가 비가 되어 내리는 일만큼이나 어렵다는 것을 말해준다. 화해는 가족이기 때문에 더욱 어렵고 때로는 불가능하다. 나의 부모이고, 나의 자식이기 때문에 보편적 관대함이 어려워진다. 가족이란 최소한의 요구와 최대한의 필요라는 모순 속에 놓인 공간이기 때문이다.

    부자관계,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를 인륜이라고 표현한다. 인륜이란 인간을 동물로부터 격상해주는 근본적 윤리다. 이는 부모와 자식 간의 윤리가 그저 본능의 힘을 빌린 자연발생적 감정만으로는 지탱될 수 없는 것임을 짐작케 한다. 가족이라는 관계, 그 안에는 인간이기에 참고 견뎌야만 하는 윤리가 있다.

    가족은 자연발생적이라기보다는 발명된 것이라고 보는 편이 옳다. 가족은 친밀성과 연대, 그리고 이해를 바탕으로 한 공존의 관계다. 우리가 전통적 가족의 요건으로 생각해왔던 혈연관계나 위계질서는 가족의 하위 개념이기는 하지만 필수 조건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이제 가족의 정상성은 그 형태가 아닌 신뢰 관계와 기능에 의해 판명돼야 하기 때문이다.

    고통과 행복의 양가적 역설

    김태용 감독의 ‘가족의 탄생’은 그런 점에서 가족의 이상적 의미를 제시하는 작품이다. 여성학 교과서처럼 선언적인 부분이 있지만 김태용 감독은 영화를 통해 결국 가족이 상처의 근원이기도 하지만 희망의 시작일 수밖에 없다는 메시지를 설득력 있게 전달한다. 영화에는 두 명의 여자를 모두 ‘엄마’라고 부르는 채현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채현은 자신을 보호하고 키워준 두 여인을 큰엄마, 작은엄마 혹은 친엄마, 새엄마로 구분하지 않고 그냥 ‘엄마들’로 부른다. 삼촌이라는 통칭을 두고도 큰아버지, 작은아버지를 엄연히 구분하는 한국의 가부장제 질서 속에서 채현의 호명법은 이채롭다 못해 혁명적이다. 영화 속에서 가족은 남자 아버지, 여자 어머니라는 생물학적 구성이 아닌 부성과 모성이라는 본질적 기능으로 운용된다. 권위로 억압하는 아버지나 집착을 애착과 혼동하는 어머니가 아닌 이해하고 사랑하고 보호해주는 부성과 모성의 공간, 그곳이 바로 가족인 셈이다.

    기든스나 벡의 말처럼 이제 가족을 가족으로 통합하고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위계나 권위가 아닌 친밀성이다. 아버지의 권위가 아닌 사랑, 어머니의 애착이 아닌 보호가 부부단위의 친밀성을 근간으로 가족이라는 체제를 유지하고 보존해주는 것이다. 생물학적 혈연이나 권위가 아닌 친밀성이야말로 현대 가족의 필수 요소다.

    가족, 상처의 근원이지만            희망의 근원
    강유정

    1975년 서울 출생

    고려대 국어교육과 졸업, 동 대학원 석·박사(국문학)

    동아일보 신춘문예 입선(영화평론),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문학평론),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문학평론)

    現 고려대·한국예술종합학교 강사


    서정주는 시 ‘자화상’에서 “애비는 종이었다”라고 고백한다. 그리고 자신을 키운 것은 “8할이 바람이었다”라고 돌이킨다. 애비가 종이었기에 그 수치심은 시인의 생애에 바람을 불러온다. 가족이란, 그렇다. 부끄럽고, 부담스럽지만 또 한편 애틋하고 애잔하다. 예술가는 한 번쯤 자신의 가족에 대해 고백해야만 진정한 자기 세계를 구축할 수 있다고 한다. 가족에 대해 낱낱이 고해하는 것, 그 상처를 드러내는 것은 곧 나의 내밀한 상처를 감싸고 있던 붕대를 벗겨내는 것과 같다. 가족에 대한 비밀, 상처는 자존심의 근원이자 영원한 비밀이기도 하다. 예민한 영혼을 가진, 누구에게나 가족은 고통과 행복의 양가적 역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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