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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액션 영화배우 열전 ⑦

뻔뻔하고 능청스럽던 허장강, 부릅뜬 눈으로 세상을 노려보던 황해

악당, 그 뜨거운 매혹

  • 오승욱│영화감독 dookb@naver.com

뻔뻔하고 능청스럽던 허장강, 부릅뜬 눈으로 세상을 노려보던 황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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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득력 있는 악의

뻔뻔하고 능청스럽던 허장강, 부릅뜬 눈으로 세상을 노려보던 황해

1970년대 중반까지 악역 전문 연기자로 유명했던 배우 오지명.

오지명도 빼놓으면 섭섭한 악역이다. 문오장과 비슷하게 1960년대 중반 등장해 1970년대 중반까지 온갖 악역을 도맡아 했는데, 이원세 감독의 ‘석양에 떠나라’(1973)에서 그는 하이에나 같은 악역을 해낸다. 영화가 시작되면 두 명의 사나이가 산등성이에 서서 여명이 밝아오는 공장지대를 내려다보고 있다. 오지명과 1970년대 단골 악역 중 하나인 최성이다. 두 사람은 어제 교도소에서 출소하자마자 범죄를 벌이려 코를 벌름거리며 근대화 산업으로 돈이 돌기 시작한 시멘트 공업 지대에 들어선 것이다. 이 사악한 두 마리의 하이에나는 개과천선하고 성실하게 살려는 옛 동료 신일룡을 찾는다. 협박해 돈을 챙기려는 속셈이다. 산에서 내려온 그들은 아침에 문을 연 국밥집에 들어간다. 이른 아침 부엌에서 세숫대야를 놓고 머리를 감던 여주인의 하얀 목덜미와 허벅지를 보고 성욕이 동한 오지명과 최성은 거침없이 뻔뻔하게 강간을 한다. 신일룡의 집 거실에 들어간 오지명은 신일룡이 이뤄낸 안락한 가정을 질투하는 한편, 신일룡의 행복을 산산조각 낼 비루한 생각들을 떠올린다. 눈빛이 날카로워진다. 독사 같은 눈을 가늘게 뜨고 무표정으로 일관하며 눈에 보이는 약한 자들을 괴롭히고 그들을 파괴하는 것에 기쁨을 느끼는 오지명의 악의는 대단히 설득력 있었다.

그가 멋진 연기를 펼친 또 다른 영화는 장동휘가 킬러로 출연하는 이만희 감독의 ‘암살자’(1969)다. 장동휘가 우익 인사를 암살하러 집을 비운 사이, 그의 집에 뻔뻔스럽게 침입해 장동휘의 어린 딸을 인질로 삼아 장동휘가 변심하지 못하게 하는 좌익 하수인으로 출연한 오지명은 어린 소녀 전영선과 마주 앉아 늑대와 소녀의 동화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사악한 늑대가 어린 소녀를 앞에 두고 이런저런 더러운 궁리를 하는 역을 멋지게 해낸다.

오지명과 문오장, 최성은 한국 액션영화의 2세대 악역들이다. 1세대 악역, 장동휘·박노식·허장강·황해·독고성이 나이가 들어 중후한 멋을 갖추면서 악역보다는 성격 있는 주인공 쪽으로 옮겨가자 그 빈자리에 들어선 것이다. 독고성. 그는 주로 조연으로 출연했고, 장동휘·박노식처럼 파워풀한 에너지로 악의를 발산하는 배우는 아니었다. 늘 조용하고 조심스러웠다. 영화 속에서 진가를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언제나 장동휘 또는 박노식 같은 주인공의 깡패조직과 겨루는 상대방 깡패조직의 두목으로 나와 비열한 음모와 술수를 쓰는 몇 장면만 보이고는 사라져버리는 작은 역으로 기억된다. 그의 악역 연기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웨스턴 ‘황야의 7인’(존 스터지스 감독, 1960)을 불법으로 리메이크한 ‘오인의 건달들’(1971)이다. 시장 상인들을 괴롭히는 장동휘의 깡패 조직에 대항하는 다섯 명의 깡패 중 주인공 최무룡과 함께 리더 격 깡패 역을 맡은 독고성은 ‘황야의 7인’에서 리더 격이었던 율 브리너와 스티브 매퀸 중 율 브리너에 가까운, 조용하지만 사려 깊은 깡패로 나온다. 연기의 섬세한 결을 중시하는 최무룡의 버디 파트너로 독고성은 최고의 연기를 펼친다. 복수 이외에 어떤 것도 생각하지 않는 최무룡 주위를 맴돌며 조금은 뻔뻔스럽고 조금은 교활한 깡패연기를 해냈는데, 영화의 마지막에 그가 사실은 형사였고 장동휘 일당을 체포하기 위해 잠입한 언더커버였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좀 재미없어지기는 하지만, 연기력만은 발군이다. 자신을 과장되게 밀어붙여 혼자만 튀려는 한국 액션영화계의 고질적인 나쁜 연기를 독고성은 조용한 연기로 가볍게 비웃어버린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한국 액션영화 악역 중 가장 빛나는 별을 꼽으라면 허장강, 황해, 장동휘, 박노식이다. 장동휘는 1950~60년대 그가 했던 수많은 악역 연기를 뛰어넘는 가장 멋진 악역 연기를 박노식 감독의 영화 ‘광녀’(1975)에서 보여줬다. 박노식을 고문하는 일본 특무대의 앞잡이 조선인 역인데, 병 때문인지 살이 빠져 홀쭉한 얼굴을 하고 사이가 벌어진 이빨을 드러낸 채 사악하게 웃으며 박노식을 협박하는 그 악의가 대단했다. 좀 더 나와 더 사악한 연기를 해줬으면 했지만 그는 영화 속에서 단 한 번 나오고 사라졌다. 좀 더 비중이 있었더라면 한국 영화 사상 최고의 악역 반열에 올랐을 텐데 아쉽다.



1세대 악역 스타들

1975년 9월21일. 아마도 일요일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TV에서 뉴스가 나왔다. 영화배우들이 팬들을 위해 축구 대회를 열었는데, 선수로 뛰던 허장강이 경기 도중 심장마비로 사망했다는 소식이었다. 당시 나는 배우 허장강에 대해 알고 있는 게 없었는데, 그가 한국 영화계 최고의 악역배우였다는 해설이 곁들여졌다. 그날 이후 나는 한국 영화 속 최고의 악역배우는 허장강이라고, 그의 영화를 한 편도 보지 않고 그대로 믿어버리고 말았다. 그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몇 해 뒤 TV에서 방영된 ‘대지옥’(1973)을 보고서였다. 극악무도한 악당 허장강이 지옥으로 가서 온갖 고초를 겪는 이야기였는데, 지옥에서 겪는 온갖 고초 때문인지 그는 불쌍해 보였고, 허장강을 괴롭히는 지옥의 악귀들이 오히려 영화 속 악역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신상옥 감독의 ‘성춘향’(1961)을 보았다. 영화 속에서 방자로 출연한 허장강은 악역 전문 배우가 아니었다. 굳이 말하자면 너무 재미있는 감초 조역이었다. 주인공 김진규 최은희보다 허장강과 도금봉이 나오는 장면이 더 재미있었다. 한국 영화에서 감초처럼 등장해 영화의 재미를 더해주는 조연들의 계보 중 그가 최고이자, 최초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허장강의 진면모를 보지 못했던 어릴 적 내 생각일 뿐, 허장강은 1960년대의 대표적인 악역 전문 배우였다. 물론 그의 연기 영역이 악역에만 국한되는 건 아니다. 오히려 소탈한 중년 서민 연기와 노인 연기가 인상적인 경우도 많다. 그러나 ‘허장강 하면 악역’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그의 악역이 오직 그만이 만들어낸 매력적인 캐릭터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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