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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윤수의 ‘그 영화’ ④

백 마디 말보다 한 번의 손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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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마디 말보다 한 번의 손길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 중에서

영화 속 등장인물의 내면을 드러내는 가장 쉬운 방법은 대사를 이용하는 것이다. 하지만 대사만으로 외면화 작업이 이뤄진다면 세상 모든 영화 속 인물들은 수다쟁이가 될 것이 뻔하다. 미국의 시나리오 작가 데이비드 하워드(David Howard)는 “대사란 시나리오 작가가 짊어져야 할 짐의 극히 일부분”이라고 말했다. 가령 극도로 분노한 인물이 “나는 너에게 화가 났어”라고 말했다면, 그것은 너무 약한 표현이고 어쩌면 거짓말일 수도 있다. 그러나 멱살을 낚아채어 그를 벽에다 내동댕이쳤다면, 대사가 없더라도 그의 내면에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알아차릴 수 있다.

복잡한 내면의 감정상태를 드러내는 ‘어떤 행동’을 찾아내는 것. 이것이 시나리오 작가에게 가장 어려운 과제다. 영화 ‘위대한 탄생’과 ‘모두가 미국인’을 쓴 톰 릭먼(Tom Rickman)은 “중요한 것은 종이 위에 어떻게 쓰여 있는지가 아니라 스크린 위에서 어떻게 보이는가”라고 말했다.

허진호 감독의 데뷔작 ‘8월의 크리스마스’는 인물의 내면을 고급스럽게 외면화한 대표적인 걸작이다. 서울 변두리에서 작은 사진관을 운영하는 정원(한석규 분)은 우연한 기회에 교통단속원 다림(심은하 분)을 만나게 된다. 그녀는 매일 비슷한 시간에 사진관 앞을 지나고, 단속한 차량의 사진 필름을 맡긴다. 이십대 초반의 다림은 당돌하고 생기가 넘친다.

해맑고 천진난만한 그녀가 차츰 정원의 일상이 되어간다. 다림은 자신의 모든 투정과 당돌함을 편안하게 받아주는 정원이 마냥 좋기만 하다. 하지만 정원은 그녀 앞에서 아무런 감정 표현도 하지 못한다. 자신이 불치병으로 죽음을 앞두고 있기 때문이다. 정원은 말없이 그녀로부터 사라지고 스스로 자신의 영정 사진을 찍는다. 그리고 영화 마지막 내레이션으로 자신의 감정을 관객에게 말한다.

“내 기억 속의 무수한 사진들처럼 사랑도 언젠가 추억으로 그친다는 것을 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신만은 추억이 되질 않았습니다. 사랑을 간직한 채 떠날 수 있게 해준 당신께 고맙단 말을 남깁니다.”

인물의 내면을 고급스럽게 외면화

백 마디 말보다 한 번의 손길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 포스터

허 감독은 주변 환경과 행동을 통해 인물의 내면을 드러낸다. 영화가 시작되면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들리는 아침 조회 소리가 정원의 잠을 깨운다. 내용 파악은 안 되지만 웅웅거리는 초등학교의 스피커 소리는 추억과 생명력이라는 영화 전체의 정서를 지배한다. 구체적이고 선명한 정보 전달 방식은 아니지만 죽음을 앞둔 정원이 ‘내가 사라져도 저들은 계속 살아 있겠지?’라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정원은 홀아버지와 살며 가끔씩 반찬을 해오는 여동생과 마당이 보이는 마루에 앉아 담소를 나눈다. 수박을 먹으며 수박씨 멀리 뱉기 시합을 하는 오누이의 일상은 여유롭고 정겹지만, 감독은 이런 일상의 소소함도 곧 사라질 것이라는 쓸쓸한 메시지를 은근히 드러낸다. 얼마 후 정원은 다림이라는 이름의 교통단속원을 우연히 알게 된다. 그녀에게 마음이 끌리지만 사랑하는 관계로 발전해서는 안 된다고 스스로를 억제한다. 그런 마음은 존댓말이라는 형태로 외면화된다. 스스로의 감정을 단속했던 정원은 존댓말을 반말로 바꾸며, 그녀에 대한 사랑을 조금씩 드러낸다. 무거운 짐을 실어주고 오토바이를 태워주며 사귀고 싶은 자신의 욕망을 겉으로 드러내기 시작한다.

병원에 다녀온 어느 날, 정원은 마루에 앉아 발톱을 깎다 한숨을 내쉰다. 그리고 마룻바닥에 누워 잠시 생각에 잠기다가 눈을 감는다. 여기서 감독은 정원의 한가한 일상을 관객들에게 조용히 지켜보도록 한다. 만약 이 상황을 정원의 대사로 표현한다면 ‘난 더 살고 싶어. 사랑하는 여자가 생겼는데 지금 죽는 건 억울해. 내가 태어나고 자란 마루에 앉아 발톱을 깎는 이런 한가로움이 앞으로 지속될 수 있을까?’ 정도가 될 것이다. 하지만 감독은 아무 대사도 없이 관객이 죽어가는 남자의 쓸쓸함을 조용히 지켜보도록 했다. 감정이 제거된 일상의 사소한 행동으로, 죽음을 앞둔 정원의 내면을 외면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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