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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광우의 영화사회학

3류 한국 정치에 냉소

‘역린’

  • 노광우 │영화 칼럼니스트 nkw88@hotmail.com

3류 한국 정치에 냉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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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영화는 왕을 암살하려는 대왕대비 측 계략과 이 계략에 맞서 왕권을 강화하려는 왕의 대응으로 전개된다. 암살과 관련된 음모를 다루는 ‘궁정 스릴러’가 되니 영화는 화려한 의상과 대비되는 어두운 조명을 많이 사용한다. 왕은 궁내 인물들과 소통하지만 궁 밖 인물들과 접촉하지 않는다. 대신 왕을 암살하려는 세력, 그들의 지시를 충실히 이행하는 살수 집단의 우두머리 광백(조재현), 이 음모에 희생되는 살수인 을수(조정석)의 이야기가 삽입된다. 이러한 배치는 왕의 선한 동기와 극명하게 대비된다.

정조를 본격적으로 조명한 첫 영화는 이인화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영원한 제국’(1995)이다. 움베르토 에코의 추리소설인 ‘장미의 이름’에서 영감을 받은 이 영화는 정조시대 규장각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쫓는 추리극 형식이다. 이 영화는 정조 독살설을 대중에게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됐다. 이후 2007~2008년 텔레비전 드라마 ‘이산’(MBC)을 통해 정조는 영조에 이어 많은 개혁을 시도했으나 조선 후기 붕당정치의 폐해를 해결하지 못하고 좌절하는 인물로 자리매김한다.

‘팔굽혀펴기’ 하는 개혁가

정조 치세는 정약용, 박지원, 박제가 등 유명한 실학자가 활발하게 활동한 조선 후기 문예부흥기였다. 정조 사후 조선은 급격하게 쇠락했다. 우리 사회는 불과 48세에 세상을 떠난 정조를 아쉬워하는데 정조 관련 영화들은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를 적극 반영한다. 이와 관련해 정조 관련 영화들에서 정조는 실존하지 않는 어떤 이상적 개혁 정치인을, 수구대신들은 이러한 개혁을 가로막는 21세기의 낙후된 한국 정치세력을 상징한다. 이에 따라 정조 관련 영화들은 3류 한국 정치에 대한 냉소를 담아낸다고 할 수 있다.

정조는 어린 시절 아버지 사도세자가 뒤주 속에 갇혀 죽는 모습을 지켜봤다. 왕이 된 후 사도세자에 대한 지극한 효심으로 수원 화성을 조성했다. 정조와 사도세자를 죽게 한 세력과의 갈등은 정조라는 인물의 비극성을 강화한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을 인지하는 한국인 관객은 정조에게 쉽게 안타까움과 연민을 느낀다.



‘역린’은 이전의 대중문화 텍스트에서 형성된 이러한 정조의 고정 이미지에 의존한다. 동시에 이 이미지를 확장한다. 이 영화 속 정조는 육체적인 매력을 갖춘 인물인 동시에 경연장에서 신하들을 이론으로 논파하는, 지적으로도 뛰어난 인물로 묘사된다. 동정심을 일으키는 비련의 인물이면서 성(性)적으로도 어필하는 인물로 그려진 셈이다. 보통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사극영화에서 태조 이성계, 태종, 세조는 갑옷을 입은 모습으로 자주 등장한다. 정조는 문무를 겸비한 인물로서 활을 쏘는 장면을 통해 무인의 성격이 강조된다. ‘영원한 제국’에서는 정조(안성기)가 활쏘기 연습을 하는 장면으로, ‘역린’에서는 정조가 궁에 침입한 살수들에게 화살을 쏘아 제압하는 장면으로 나타난다.

‘사회적 적폐와 좌절감’ 투영

‘역린’의 클라이맥스는 정조를 지키려는 금위영 무사들과 정조를 암살하려는 자객들 간의 격전 장면이다. 이후 대왕대비의 계략이 무산되는 과정이 약하게 그려졌다. 이 때문에 이야기가 용두사미로 끝나는 것처럼 보이는 게 이 영화의 약점이다. 정조와 정적인 대왕대비 정순왕후, 병권을 쥔 구선복(송영창) 간 갈등이 뚜렷하게 해결되지 않기 때문에 용두사미처럼 보이는 것이다. 정조는 암살기도가 발생하기 전 금위영 호위무사 몇 명만을 데리고 구선복의 군대로 달려가 구선복을 설득한다. 그러나 구선복이 설득되는 과정이 불분명하다. 정조를 위기로 몰아넣는 정순왕후는 영화 내내 성적 매력을 발산하는 팜파탈로 묘사된다. 그러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간 후 정순왕후는 너무 나약한 인물이 된다.

3류 한국 정치에 냉소
노광우

1969년 서울 출생

미국 서던일리노이대 박사(영화학)

고려대 정보문화연구소 연구원

논문: ‘Dark side of mod-ernization’ 외




이런 약점에도 ‘역린’은 개봉 11일 만에 300만 관객을 끌어들였다. 많은 한국인이 ‘역린’에 호감을 갖는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다. 정조라는 정의로운 소수의 개혁가가 다수의 부조리한 세력에 맞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는 점이 관객에게 어필하기 때문이다. 최근 일어난 여러 사건, 만연한 사회적 적폐에 한국인은 좌절과 무기력을 느낀다. 그래서 이들은 비슷한 시련을 겪은 정조에게 쉽게 감정이입한다. 적어도 정조는 얼마동안은 불의와 싸워 살아남았고 일부나마 자신의 이상을 현실에 구현했다.

신동아 2014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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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광우 │영화 칼럼니스트 nkw88@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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