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월호

흥미로운 클래식 음악사 이야기

‘클래식은 규칙 파괴,현세 초월, 개인 중시의 역사’

  • 김갑수│시인, 문화평론가 dylan@unitel.co.kr│

    입력2009-01-06 11: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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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흥미로운 클래식 음악사 이야기

    2008년 11월20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사이먼 래틀 경의 지휘에 맞춰 브람스 교향곡을 연주하고 있다.

    “나는 불쌍이야. 불쌍이 본질이고 콘셉트이고 철학이야. 나는 불쌍이라고.”

    사람들이 와르르 웃는다. 좌중의 오랜 친구는 또 그 소리야, 하는 듯 손사래를 친다. 왁자한 웃음은 그러니까 내 ‘불쌍주의’가 익살로 들린다는 의미다. 불쌍해 보이지 않는 내가 불쌍하기 그지없다. 작업실로 돌아와 문을 여는데 저 반대편에 놓인 리스트와 모차르트 흉상이 뚱한 얼굴로 나를 건너다본다. 그들도 불쌍하다. 리스트, 모차르트가 왜 불쌍한지 나는 당장 360가지는 댈 수 있다. 아, 이 공간 안에는 온통 불쌍한 존재들로만 가득 차 있건만 왜 사람들은 그것을 사치인 양 작란(作亂)인 양 여기는 걸까. 불쌍하고 가긍하도다, 나여.

    ‘내가 사랑을 노래하려 할 때 그것은 슬픔으로 변했다.’ 슈베르트가 일기장에 남긴 구절이다. 번역에 문제가 있을는지 모른다. 우리는 일기장에 이런 문투로 쓰지 않는다. 내가 아는 슈베르트로 재구성해보자면 이렇다. ‘젠장, 왜 나는 연애 한번 못해보는 거야. 아무리 껄떡대봤자 나 따위를 쳐다보는 년은 하나도 없구나. 슬흐다, 슬허!’

    연애 못해 불쌍한 슈베르트

    추측건대 슈베르트는 연애를 못해서 죽었을 것이다. 서른두 살 젊디젊은 나이였다. 사인(死因)이 매독이다. 빈의 뒷골목 밤거리 여인에게나 고독한 육신을 의탁해야 했을 것이다. 그럴 수밖에. 사내 키가 152cm라면 볼장 다 본 것이다. 통통한 몸집에 똥배가 엄청나게 튀어나왔고 까불이 수다쟁이였다고 한다. 교사가 꿈이었지만 계속 낙방했다. 결국 취직 한번 못했다. 생전에 음악가로 유명세를 타본 일도 없다.



    흥미로운 클래식 음악사 이야기
    후대에 우리가 만나는 그의 초상화는 그 시절의 ‘뽀샵질’이 남긴 재주란다. 추남도 그런 추남이 없었다는 증언이 남아 있다. 자, 따져보자. 취직을 못했으니 돈이 궁했을 테고 ‘기장’으로 사내 감별하는 여인들의 습성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가난하고 키 작고 얼굴 못생긴 사내에게 어떤 여자가 관심을 두겠는가. 게다가 다변과 똥배. 말 많고 많이 먹는 것은 고독한 사람의 특징적 증세다. 슈베르트 일기장의 또 다른 구절이 이렇다.

    “이 지상에는 내가 있을 곳이 없나요?”

    청춘기를 슈베르트로 지내보지 못한 사람은 ‘불쌍’이 몸에 익은 의상처럼 익숙한 기분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불쌍해야만 자기 같다는 기분에 공감할 수 없을 것이다. 마흔 살에 병으로 죽은 내 친구 한정수는 멋쟁이였다. 화가였던 녀석은 첨단의 ‘댄디’였고 잘생겼고 부유하기까지 했다. 그의 화실에 얹혀살며 나는 청춘기의 많은 시간을 죽였다. 친구의 동료 화가들이 드나들었다. 내 눈에는 한결같이 세련돼 보였고 주고받는 농담도 내가 이해하지 못할 그들 세계만의 독특한 언어였다. 가령 그들은 “쌀티난다” 혹은 “그 친구 쌀이야 쌀! ” 같은 말을 자주 썼다. 그게 프랑스어를 변용시켜 만든 ‘유치하고 천하다’라는 의미인 것을 깨닫는데 한참 시간이 걸렸다.

    화실에 놀러온 어떤 암사슴도 내게 관심을 갖지 않았다. 대신 아주 친절했다. 아랫것이나 식객에게 대하는, 무리에 포함시키지 않는 과잉된 예절이 그것이다. 나는 언제나 구석에 놓인 전축을 벗 삼아 판을 틀고 연탄불을 갈았다. 오갈 데 없는 나는 비참하고 불쌍했지만 기묘하게 유쾌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화사한 사람들 속에서 ‘불쌍’은 내 고유의 영토였다.

    지금 나는 얹혀살기는커녕 화실을 닮은 공간의 주인장 노릇을 하고 있다. 간혹 찾아오는 일행 속에 낯모르는 슈베르트가 곁다리로 묻어온다. 슈베르트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쭈뼛거리며 날 선 자의식을 감추는 그에게 속마음으로 이렇게 말한다. ‘그래, 초라해 하고 쪽팔려 하려마. 네 불쌍은 너만의 것이야. 지금 네 눈에는 나의 불쌍이 전혀 보이지 않겠지만 우리는 불쌍족(族)이고 불쌍 동지야. 전국불쌍동지연대라는 시민단체는 없을까. 나만의 불쌍, 자기연민을 미워하지 말라고. 그것조차 품지 않는다면 태생이 불쌍한 자의 다음 단계, 누추한 비루와 뻔뻔한 천박이 찾아올 수 있다네, 친구.’

    ‘마음은 언제나 불쌍’이 음악 취향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지금은 멘델스존의 실내악곡, 포레의 가곡이나 피아노곡들, 생상스의 협주곡이나 교향곡도 즐겨 듣는다. 카라얀의 화사한 사운드, 번스타인의 재기발랄, 안 되는 곡 없이 무한정한 레퍼토리로 질리게 만드는 유진 오먼디의 지휘도 즐겨 받아들인다. 그들을 싫어했다. 이유는 단 하나, 행복한 생애를 살았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행복감은 공허한 사람의 전유물이라고 경멸하며 살아왔다. 그런데 웬일이니, 이제 내가 ‘불쌍’을 주장하면 사람들이 웃는다. 어쩌다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왜 벗어나야 합니까?’

    이유는 너무나 단순한 데 있다. 더 이상 가난하지 않다는 것. 나를 ‘불쌍’으로 밀어 넣은 하고 많은 사유는 여일하건만 단 한 가지, 세월이 나를 먹고살 만한 부류로 바꾸어버렸다. 돈벌이에 그리 ‘애달캐달한’ 기억이 없건만 세월은 내게 출연료와 원고료와 강의료를 챙겨주었다. 그러다 마침내 거창한 줄라이홀을 만들어 정주케 해주었다. 그래도 변함없이 불쌍하다고 이 연사 소리 높여 외치고 싶건만 불쌍이 경제용어인 것을 미처 몰랐다. 가난하지 않으면 불쌍하지도 못한다니!

    몇 주 연속 작업실을 떠나 지방을 다녀야 했다. 전북 김제로 충남 대전으로 전남 장성으로…. 서울의 몇몇 구청에서도 강연 요청이 있었다. 도청 군청 시청 구청의 공무원 교육에 나 같은 사람이 연사로 불려간다. 예술체험의 의미와 가치를 말하란다. 공무원의 삶에서 바흐나 슈베르트는 어떤 의미를 갖게 될까. 공무원의 삶은 소설에서나 보았다. 주제 사라마구의 ‘이름 없는 자들의 도시’에 나오는 단조로운, 반복의 삶. 주인공 주제는 중앙호적 등기소의 사무보조원이다. 한 개인의 탄생에서 죽음까지 모든 일이 기록되는 곳이다. 그는 남몰래 유명인의 신상을 뒤지며 세월을 죽인다. 공무원 주제에게는 자신만의 삶과 영혼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이 땅의 수많은 주제, ‘강사님을 뫼시러’ 마중 나오고 배웅하는 공무원들의 삶도 주제와 같을까. 문득 A 도청에서 만난 공무원과 B 군청에서 만난 공무원과 C 시청에서 만난 공무원을 도무지 구별하지 못하는 나를 발견했다. ‘공무원들’로 묶이는, 구별되지 않는 군상에서 벗어나는 것이 강의의 주제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예술체험은, 그러니까 집단소속에서 벗어나서 자기 고유의 실존에 닿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지방의 강의장까지 장시간 오고가는 차 안에서 문득 공무원이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원이건 사업가건 학자건 백수건 모두가 한국이라는 촌락의 부족민처럼 소속과 뿌리에 연연하는 태도를 보인다. 근본 없는 자, 소속을 경시하는 자는 불학무식한 무뢰배로 취급된다. 그게 두려워 모두가 대한민국 청사의 ‘공무원들’이 되고자 서로서로를 묶는다. 한 두름의 군상 속이어야 안도감을 느낀다. 그러한 소속감의 족쇄에서 벗어나기. 내가 생각하는 예술체험의 목적성이 바로 그것이다.

    “왜 벗어나야 합니까?”

    어떤 강의장에선가 갑자기 날아온 질문에 말문이 탁 막혔다. 답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느닷없이 ‘왜 살인이나 도둑질을 하면 안 되느냐’ 같은 질문을 받는다면 우선 말문이 막힐 것이다. 존재의 자유와 창조적인 삶의 추구란 너무나 지당하고 마땅한 가치로만 여겨왔다. 그런 추구가 거추장스럽거나 사치스러운 것으로 여겨질 가능성을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일단 예술, 그중에서도 음악 공부를 하자고 빠져나갔다. 왜 그런 공부가 필요하냐고 재차 질문하겠지만 공부하고 나서 답을 생각해보자고 질문자를 달랬다.

    음악은 어떻게 생겨났나

    음악에 대한 공부는 가만히 머릿속으로 추리해보는 것에서 시작된다. 세상에는 왜 음악이라는 요물이 생겨난 것일까. 각종 음악사마다 첫 장에 저자 나름의 주장이 실린다. 하지만 생각해보라. 어차피 증거가 있을 수 없는 추정이다. 별다른 연구 없이 머릿속 생각만으로 음악의 기원을 유추해볼 수 있다. 각자 나름대로 새로운 학설을 창안해도 된다. 일단 유명 책에 등장하는 설은 이렇다.

    최초의 음악. 그것을 신화나 전설에 등장하는 이야기에서 따오면 뮤즈설이 된다. 신이 인간에게 매개자를 보내 음악이라는 선물을 내려줬다는 것이다. 이건 하나마나한 얘기 같다. 뜻밖에 진화론의 찰스 다윈이 음악의 기원에 관한 글을 썼다. 자연계의 암수가 이성을 찾고 유혹하는 행위를 모방하는 과정에서 음악이 생겼다는 것이다. 상당히 그럴싸하다. ‘편편황조여, 자웅상의로다’ 유리왕은 황조가에 가락을 실어 노래처럼 불렀을 것 같다. 마르크스주의 경제사학자 카를 뷔허는 노동기원설을 내세웠다. 생존을 위한 투쟁과정에서 나타나는 노동의 리듬에서 음악이 비롯됐다는 주장이다. 리듬 같은 음악적 요소는 움직이는 신체의 동작을 옮겨놓은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장 자크 루소나 허버트 스펜서는 음악을 ‘강조된 언어’라고 규정한다. 소통을 목적으로 하는 말이 확장되어 음악이 되었다는 이론이다. 바그너가 ‘내 생각이 바로 그거야! ’ 하면서 무릎을 쳤다고 한다.

    그밖에도 마을과 마을 간의 규칙적인 의사전달 체계를 기원으로 한다는 주장도 있다. 소리에 의한 커뮤니케이션 수단이라는 것이다. 제의에서 분화되었다는 주장도 많이 한다. 무당의 춤은 무용으로, 내지르는 말은 문학과 연극으로, 그 소리는 음악으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기원은 어떻든 간에 멜로디가 있고 하모니가 있으며 리듬이 실리고 사운드의 빛깔(음색)이 있으며 일정한 구조를 띠면 완성된 음악이 된다. 이 다섯 가지 음악의 요소가 충족되기까지 아주 오랜 세월이 걸렸다. 우리가 통상 서양음악사라고 하는 음악의 내력을 주마간산 격으로라도 훑어보는 것은 꽤 유익한 일이다. 초중고교 시절에 익힌 상식을 되새김하는 것인데 고전음악은 그 시대의 전후맥락을 감안하고 들어야 감흥이 커진다. 그야말로 겅중겅중 건너뛰며 한번 들여다보자.

    음악의 기원은 앞서 언급했듯이 거의 ‘구라’ 차원에서 논의되는 반면 시조로 삼는 구체적인 인물이 있다. 수학자 피타고라스. 그가 대장간의 망치소리를 듣고 음악의 규칙적인 배열의 원리를 파악했다고 하는 것은 아주 유명한 얘기다. 아마도 떨어지는 사과가 중력을 가르쳐줬다고 하는 것과 유사한 전설일 것이다.

    흥미로운 클래식 음악사 이야기

    작곡가 슈베르트가 ‘보리수’를 작곡한 곳으로 알려진 오스트리아 빈의 횔더리히스뮐레 레스토랑.

    바로크, 깨진 진주가 어원

    기원을 넘어 시조를 넘어 진짜 음악의 시작은 서기 1150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2세가 정리한 ‘그레고리안 찬트(Gregori- an chant)’부터 친다. 최초로 악보에 기록된 것, 즉 기보를 출발점으로 설정한 것이다. ‘찬트’라면 찬송가를 말한다. 그러니까 고전음악은 교회나 수도원의 예배음악에서 시작됐다고 본다. 신의 음성을 전하는 곳이니까 잡스러운 기악반주 따위는 없다. 아 카펠라(a cappella), 무반주 단성음악이 최초의 음악이었다. 교회 바깥에도 음악은 있었다. 지금은 다른 의미로 사용되는 발라드, 샹송 같은 세속 가곡들. 노래하는 트루바두르(Troubadou rs)가 출현해서 귀부인과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노래하고 기사도를 찬미한다. 모험과 궁정풍의 연애담이 세속 가곡의 주된 내용을 이루는데 유행가답게 내용들이 좀 웃긴다. 독일 쪽에는 세속음악가로 민네징거, 마이스터징거들이 속속 등장한다. 이 모든 것을 묶어 중세음악이라고 부른다. 특기할 인물이 하나 있다. 중세 끝 무렵인 14세기 프랑스에서 활동한 기욤 드 마쇼인데 중세음악을 들어보겠다고 음반을 찾으면 그레고리안 찬트 외에는 대부분 마쇼의 작곡집이 나온다. 그는 미리 나온 바흐 같은 대작곡가였다.

    중세를 끝장낸 시대정신은? 초등학교 저학년도 알 만한 이 퀴즈의 답은 물론 르네상스다. 신의 대리인 교황과 세속의 왕초 황제가 권력다툼을 벌이다가 세속 쪽 힘이 더 세지는 과정을 뜻한다. 음악도 물론 신의 세계에서 세속사회로 중심이 이전된다. 수도원이 아니라 궁정이 음악의 중심지가 된다는 뜻이다. 궁정에서 연회를 펼칠 때 춤의 반주로 음악이 활용됐다. 왕의 행차 때 나발을 불어대는 행사음악도 많다. 구텐베르크의 인쇄기 발명이 음악의 보급에 크게 기여했다고 한다.

    대략 15~16세기의 음악을 뜻하는 르네상스 음악은 위대한 세 사람의 이름으로 기억하는 것이 좋다. 주로 궁정에서 활동한 조스캥 뒤 프레가 첫째다. 음악사적으로 새로운 작업을 많이 했다는 건데 그냥 맥락 모르고 들어도 그의 미사 음악들은 참 아름답다. 다음이 팔레스트리나. 대위법을 발전시켜 오늘날에도 통용되는 미사음악의 전범을 구현했다. 그리고 이탈리아의 영주이자 대공 신분으로 많은 곡을 남긴 제수알도가 있다. 바람난 아내와 정부를 죽여버린 성깔로도 유명한데, 그런 만큼 작품에서 그만의 개성이 두드러진다. 모든 예술은 새로운 길을 터준 사람을 언제나 윗길로 치는데 그 점에서 제수알도의 역할이 높이 평가된다.

    르네상스 다음이 바로크 음악이다. 1600년부터 쳐서 J.S. 바흐가 사망한 해인 1750년까지의 음악이다. 너무나 잘 알려진 상식인데, 보석 세공인들이 깨지고 망가져서 버려야 할 진주를 일컬었다는 ‘바로코’라는 말이 어원이 됐다는 걸 기억하자. ‘요즘 젊은 애들은 영 깊이가 없고 겉만 화려하고 괴상한 짓들만 한다구.’ 바로 이런 어른들의 비난과 훈계가 음악사의 정식 이름이 됐다. 예나 지금이나 비슷하지 않나. 참고로 로큰롤도 재즈도 어원은 성행위를 뜻하는 은어에서 비롯됐다고 본다. 새로운 예술은 뒷골목 논다니들이 만든다는 말이 맞는가 보다.

    시민의 대중오락, 오페라

    바로크 음악부터 본격적인 감상의 대상으로 삼는 탓에 자세히 들어가면 한도 끝도 없는 지식의 숲이 펼쳐진다. 거기서 헤맬 수는 없고 바로크 음악이 발전한 장소의 특징만을 떠올린다. 중세 음악이 교회였고 이어진 르네상스 음악이 궁정이었다면 그 다음 바로크 음악은 극장에서 발전한다. 점점 더 많은 사람에게 음악이 전달된다는 의미다. 바로크 이후에는 귀족들의 장원, 신흥 부르주아지들의 살롱으로 활동의 장소를 넓혀간다. 비록 바닥에 앉았다지만 일반시민도 들어갈 수 있었던 바로크 시기 극장의 음악은 오페라의 발명으로 특징된다. 피렌체에서 아베마리아로 유명한 작곡가 카치니나 페리 같은 인물들이 고전극과 음악을 결합시켜보자는 취지로 몇 년 몇 월 몇 일, 구체적인 날짜를 정해 태동시킨 발명품이 오페라다. 베네치아를 중심으로 오페라가 시민의 오락거리로 유행하자 거시기를 잘라 여성 역을 했다는 카스트라토의 활약이 이때부터 나온다.

    바로크 음악의 특징으로 오페라와 더불어 또 하나 거론해야 할 것이 기악의 탄생이다. 감상을 위한 연주 음악이 바이올린을 중심으로 발전한다. 오늘날 수십억 수백억을 호가하는 스트라디바리나 아마티 같은 악기가 이 시기의 산물이다. 이탈리아에만 바로크 열풍이 불었던 것은 아니다. 프랑스에서는 베르사유 궁정 예배당에서 쿠프랭 가문이 대를 물려 날렸고, 지휘하다가 다쳐서 죽은 륄리의 명성도 이때 높았다. 영국은 서민계급이 즐길 수 있는 유료극장이 발전했고 독일은 대학생들로 구성된 연주단체 콜레기움 무지쿰이 카페에서 활동했다. 특히 칸타타가 성행한 곳이 독일이었다.

    오로지 바로크 음악만을 듣는다는 사람을 본 적이 있다. 반면에 그 곡이 그 곡으로 다 똑같이 느껴진다는 사람도 있다. 의견은 각자의 몫일 테고 세 시기로 나누는 주요 작곡가의 이름쯤은 기억해두자. 바로크 초기는 몬테베르디, 프레스코발디, 하인리히 쉬츠를 중심에 둔다. 중기 또는 번성기 인물로는 륄리, 북스테후데, 코렐리, A. 스카를라티, 퍼셀, 쿠프랭 등이다. 바로크 후기의 주요 인물은 J.S. 바흐, 헨델, 텔레만, 비발디, 라모, D. 스카를라티 등이다. 이들의 음악세계는 음반 해설지에 마르고 닳도록 씌어 있다.

    그 다음이 클래식이다. 고전주의. 그 다음에 낭만주의. 우리는 이 ‘주의’들을 생물이나 사회과목처럼 암기해서 시험을 봤다. 음악이 암기과목인 나라는 일단 후진국이다. 요즘 학교는 달라졌을라나. 어쨌든 참고서를 통해 암기된 기억을 재정리해보자.

    근대인의 원점 베토벤

    1780년부터 1820년까지를 고전주의 시기로 본다. 이른바 제1차 빈 3인조가 고전주의 형식을 완성한다.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이 3인조의 면면이다. 영주의 하인 신분에서 자유 음악가로 변신하는 시기의 인물들이다. 하이든은 충직한 하인의 마음으로 일한 맘씨 좋은 음악교사였다. 모차르트가 파파라고 불렀고 베토벤도 잠시 문하에 들어갔는데 스승이 하도 싫어해서 구박만 받고 나왔다고 한다. 의외로 진지한 감상을 할 때 하이든의 교향곡이나 현악 4중주들은 깊은 감흥을 안겨준다.

    황녀의 무릎에도 앉았던 재기 발랄의 모차르트는 극빈자로 죽었다. 최초의 프리랜서이자 상처 입은 자유인이었다. 이 점은 그의 음악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요소다. 오페라를 통해 귀족들을 망가뜨린 게 단순한 객기 탓이 아니었다. 조선 후기 광대패들의 탈춤놀이는 주로 권문세가 댁 마당에서 펼쳐지는데 양반들 갖고 놀며 망가뜨리는 얘기가 주를 이룬다. 맥이 닿는다. 사회변동과 신분해체가 음악 속에 반영된 것이다. 악성이라고 배운 베토벤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악성이 맞다. 그는 혁명기 유럽의 시대정신을 온몸으로 구현했고 이상의 추구를 끝없이 펼쳐나갔다. 젊은 날에는 음악적 형식에 충실한 고전주의자로, 장년기부터는 이상을 추구하는 낭만주의가 그 음악의 요체다. 근대란 ‘자아’가 창조되는 시기를 뜻한다. 베토벤을 진정한 근대인의 원점으로 삼아도 된다고 본다.

    규칙을 파괴하는 것. 머나먼 것에 대한 동경, 현세를 초월하고자 꿈꾸는 것. 개인성을 강조하는 것. 문학(시)과 음악이 리트라는 양식으로 통합을 이루는 것. 마침내 교향곡이 완성되는 것. 이것이 음악의 낭만주의다. 중기 이후의 베토벤으로 시작해 베버, 슈베르트, 로시니, 베를리오즈, 멘델스존, 쇼팽, 슈만, 브람스, 리스트, 바그너, 말러…. 별들의 잔치가 낭만주의다.

    이때 작곡가의 명성을 뛰어넘는 대연주자가 출현한다. 쇼팽이 고국 폴란드의 흙을 병에 담아와 파리에서 어떻게 했다느니 하는 내용을 고교시절에 배운 것 같은데, 실은 조르주 상드와의 연애담이 더 끈끈하게 기억된다. 그는 대연주자였다. 기획공연을 창시하여 악마 이미지를 연출했던 파가니니도 바이올린의 대연주자였다. 죽어서도 고향에서의 반대 때문에 36년간이나 방부 처리된 채 아들 아킬레가 시신을 떠메고 다녔다. 리스트, 아, 리스트! 내 작업실에 놓인 ‘유이(二)한’ 흉상 가운데 하나가 리스트다. 작품이 화려하고 ‘오빠부대’의 효시일만큼 인기 연주인이었다지만 그게 관심이 아니다. 여자 꼬시기에 여념이 없으면서 동시에 경건한 사제의 삶을 동경했던 이중성. 극단적으로 성과 속을 오간 그 분열에 나는 동류의식을 느낀다. 실제로 인생말년에 그는 진짜 신부가 됐다.

    흥미로운 클래식 음악사 이야기

    바로크시대 초기 오페라의 연주 광경을 그린 그림.

    낭만이 넘쳐 아래로 시대가 내려오면서 몇 가지 중요사항이 생겨난다. 먼저 오페라의 두 가지 흐름을 주도한 바그너와 베르디. 바그너는 오페라를 종합예술로 만들었다. 오페라가 아니라 악극이라고 불렀고 바그네리안이라고 일컫는 추종세력까지 만들어냈다. 불협화음이 마구 작렬하는 근대성이 압도적인 음향 속에 펼쳐진다. 베르디는 베리스모 오페라를 개화시켰다. 현실주의 오페라를 뜻하는 말이 베리스모인데 왕이나 신화 속의 인물 따위를 걷어차버리고 추악하고 슬픈 실제의 삶을 그려내기 시작했다.

    서유럽 몇 나라만 음악을 했을 리는 없다. 질풍노도의 낭만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다른 지역의 민족음악도 탄력을 받았다. 먼저 슬라브 민족주의를 내세우며 일명 ‘힘센 무리들’로 불린 러시아 5인조를 꼽아야 한다. 보로딘은 화학자였고 무소르크스키는 관료 출신의 방랑자였고 림스키코르사코프는 해군 사관이었으며 세자르 퀴는 처음부터 끝까지 아마추어였다. 발라키레프만이 유일한 음악전공자였다. 이 공포의 외인구단 5인조에다 서구파였다고 배척받은 차이코프스키를 넣어 새로운 러시아 음악이 생겨난다.

    ‘음악은 죽었다’

    슬라브 음악의 득세 못지않게 그 옆 동유럽 보헤미아 지역의 음악도 빼놓을 수 없다. 체코의 스메타나와 드보르자크가 먼저 나오고 이어 현대로 넘어가는 분열의 정서에 민속적 감성을 버무려 대단히 특이한 음악을 만들어낸 3인방 바르토크, 코다이, 야나체크가 있다. 이들의 곡을 들을 때마다 터져 나오는 경탄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그리고 이어서 본격적인 근대음악이 출발한다. 한 축은 드뷔시를 정점으로 하는 프랑스의 인상주의를 꼽아야겠고 또 한 축은 제 2차 빈 3인조로 불리는 쇤베르크, 베르크, 베베른의 표현주의 흐름을 들 수 있다.

    돈 매클린의 노래 ‘아메리칸 파이’의 마지막 가사가 ‘음악은 죽었다(the mu- sic die)’이다. 실제로는 비행기 사고로 죽은 버디 홀리를 추모한다는 뜻이지만 근대음악 이후, 그러니까 현대음악으로 분류되는 음악부터 ‘더 뮤직 다이’가 느껴진다. 현대음악은 신기함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기가 쉽지 않으니까. 그 대신 현대음악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음악적 성격을 불문하고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존재들이 있다. 라흐마니노프, 스트라빈스키, 쇼스타코비치, 프로코피예프, 벤저민 브리튼, 메시앙…. 별이 무척이나 많다.

    스스로 생각해도 참 수다스럽게 말을 풀었다. 정보량이 많고 잘 알려진 시기의 이야기는 간단하게 훌쩍 넘어가려 했는데 도무지 지나칠 수 없는 이름이 매우 많다. 북유럽의 시벨리우스나 그리그는 거론도 못했고 미국 쪽의 거슈윈, 코플란드, 엘리엇 카터에게도 자리가 없다. 무겁고 진지하게 음악을 대한다면 힌데미트나 막스 레거도 제외할 수 없고 ‘카르미나 부라나’의 칼 오르프도, 펜데레츠키도 대접을 해야만 한다.

    1150년부터 20세기 초입까지 고전음악은 이렇게 흘러왔다. 다 지나간 일들이고 지나간 이름들일까. 천만에. 음악애호가에게 음악사의 사건이나 작곡가의 존재는 생생하게 살아 있는 현존이다. 세상에서는 테러가 발생하고 대통령이 바뀌고 경제가 흥했다 망했다 하지만 음악세계에서는 전혀 다른 파도가 몰아쳐 오고 몰아쳐 간다. 신문 방송에 보도되는 세상과는 아주 다른 또 하나의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다.

    ‘내 이름은 불쌍이야’, 뜬금없는 ‘불쌍론’을 말했더랬다. 나는 왜 불쌍한 걸까. 어째서 불쌍해야만 안도감이 드는 걸까. 뒤집어서 불쌍하지 않은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그런 사람, 안 불쌍한 사람, 많을 것 같은데 잘 안 보인다. 신체와 영혼이 온전해야 안 불쌍할 텐데 몽땅 온전한 사람을 찾을 수가 없다. 대단한 지위에 있으면 안 불쌍할 것 같은데 어떤 자리의 누가 대단하다는 건지? 내가 볼 때는 안 불쌍한 사람이 없다. 다만 남의 ‘불쌍’에 관여하는 것이 주제넘어 보여 내 ‘불쌍’에만 전념하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스스로 불쌍하지 않다고 믿는 사람이 너무 많다. ‘불쌍’을 면해주는 것이라야 재산이 좀 있다거나 언제 식을지 모를 사랑의 상대가 있다거나 출신학교나 직업 같은 배경이 그럴싸하다거나 외모가 반반하다거나 뭐 그런 것들이다. 그런 걸로 안 불쌍하다니 참 좋겠다만 아마도 안 불쌍한 사람은 죽치고 앉아 귀 기울여 음악을 듣지 않을 것이다. 지하 작업실도 만들지 않을 것이고 눈 오고 비 오고 안개 낀 날 가슴이 터질 듯이 아프지도 않을 것이다. 세상에 태어난 게 미안하지도 않을 것이고 그 세상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것이 분하고 원통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 대신 지금 무슨 맹랑한 수작하고 자빠졌냐고 빤히 째려볼 것이다.

    군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소속감의 족쇄로부터 풀려나기 위해 예술체험이 필요하다고 강의하는 나에게 어떤 공무원이 물었다. “왜 벗어나야 합니까?”라고. 그런 사람을 두고 젊은 날의 황동규 시인이 이런 시를 썼다.

    ‘다들 망거질 때 망거지지 않은 놈은 망거진 놈뿐이야’

    ‘내 이름은 불쌍이야’

    바흐를 만나고 북스테후데를 만나고 텔레만과 놀고 음악사의 별들을 주저리주저리 섭렵하고 있을 때 ‘불쌍’이 잠깐 비켜난다.

    흥미로운 클래식 음악사 이야기
    김갑수

    1959년 서울 출생

    성균관대 국어국문과 졸업

    시인 및 음악칼럼니스트

    저서 : ‘나의 레종데트르’ ‘나는 왜 나여야만 할까?’, 시집 ‘세월의 거지’ 등


    어제부터 읽기 시작한 ‘티베트 사자의 서’에 널린 수백 가지 죽음과 해탈의 안내문을 접할 때 ‘불쌍’은 무색해진다. 커피바 옆에 죽죽 뻗은 계은죽이 새순을 틔울 때, 노지마의 피아노 타건에서 손톱 부딪치는 소리가 명료하게 들릴 때, 교체한 진공관의 음색이 촉촉하게 젖어올 때 ‘불쌍’은 저만치 물러나 샐쭉하게 때를 기다린다. 결국 ‘불쌍’으로 되돌아올 테지만 소소하고 사사롭고 비본질적이고 탈중심적일 때 아주 잠깐씩 생은 ‘불쌍’을 밀쳐낸다. 보아라, 한 ‘불쌍’이 여기 있다. ‘불쌍’ 간다 ‘불쌍’ 받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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