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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비평

지난 10년간 최악의 신조어 ‘원·판·김·세’

  • 정해윤 │시사평론가 kinstinct1@naver.com

지난 10년간 최악의 신조어 ‘원·판·김·세’

민주 정치는 ‘프레임(frame·현상을 보는 시각 틀이나 관점) 전쟁’이고 프레임은 ‘신조어’로 구현된다. 탁월한 신조어 하나가 유권자의 선택을 결정한다. 이 때문에 정당은 자신의 신조어를 유통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근래 한국에서 성공한 신조어로는 노무현 정권 당시 야당인 한나라당(현 새누리당)에서 만든 ‘세금폭탄’을 꼽을 수 있다. 보수 정당은 전통적으로 감세(減稅)를 내세우는데 한나라당은 자신의 이러한 정책 기조와 세금 인상에 대한 유권자의 저항을 네 마디 말로 똑 부러지게 엮어냈다.

그런데 최근 ‘세금폭탄’이라는 용어가 다시 등장했다. 지난 8월 현오석 경제팀이 발표한 세제개편안은 민심의 벽에 부딪혔고 불과 나흘 만에 박근혜 대통령은 전면 재검토를 지시했다. 그러자 민주당이 ‘원 저작권자’인 여권을 향해 ‘세금폭탄’이라는 용어로 공세를 편 것이다.

민주당의 이런 용어 전략에 대해 전문가들은 좋은 점수를 주지 않는 듯하다. 프레임 이론의 권위자인 조지 레이코프는 “상대편의 언어를 쓰기 시작하는 순간 패배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우리 정치권은 무슨 일만 터지면 유권자를 낚기 위해 신조어를 대량 살포한다. 이런 경향은 점점 심해지고 있다. 아무 용어나 마구 쓰다보니 때론 상대방이 만든 용어도 가져다 쓰는 것이다. 그나마 여당의 ‘손가위’(손톱 밑 가시 뽑기 특별위원회), 야당의 ‘을지로’(乙을 지키는 길(路)), ‘봉봉세’(봉급 생활자가 봉인 세금제도)는 정치적 지향성을 보이면서 유권자의 주목을 끈 좋은 신조어에 해당한다.

이름 가지고 인신공격

이 정도에서 그쳤으면 딱 좋았을 텐데 항상 더 나간다. 국정원 댓글 사태와 관련해 민주당이 내건 ‘남·해·박·사(남재준 국정원장 해임, 박근혜 사과)’는 분명 지나친 표현이었다.

이어 민주당이 유포한 ‘원·판·김·세(원세훈, 김용판, 김무성, 권영세)’는 단언컨대, 우리 정치 문화를 후퇴시킨 지난 10년 중 최악의 신조어라고 할 것이다. 원·판·김·세는 이름의 첫 글자, 마지막 글자, 첫 글자, 마지막 글자를 가져다 붙여 일종의 균형감 내지 안정감을 주고 있다. 그러나 이 점을 빼면 윤리적으로 최악이고 전략적으로도 단점투성이다.

우선 원·판·김·세는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 분명한데 ‘사람의 외모(원판)가 김샌다’는 악의적인 인신공격 뉘앙스를 갖는다. 또한 국정원 사태와 관련된 검증되지 않은 의혹에 4명의 개인을 엮어서 ‘낙인찍기’를 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원세훈 전 국정원장과 김용판 전 서울경찰청장은 실정법 위반 및 선거개입 혐의가 의심되기는 하지만 무죄추정 원칙이 적용되는 형사재판의 피고인 신분이다. 김무성 새누리당 의원과 권영세 주중대사는 뚜렷하지 않은 몇 마디 말 외엔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사전 입수의 정황증거조차 없고 내사나 기소도 안 된 그야말로 자연인 상태다. 경중이 다른 이 네 사람을 하나의 카테고리로 묶는 것도 합당하지 않을뿐더러 이름을 장난스럽게 조합한다는 자체가 사람의 원초적 인격에 대한 조소와 경시를 표출하는 셈이다. 따라서 상식과 격을 아는 이들은 ‘원·판·김·세’라는 신조어에 거부감을 느낄 것이며, 이 말을 아무렇지 않게 유포하는 민주당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질 것이다.

언론의 한심한 받아쓰기

한심한 것은 ‘원·판·김·세’와 같은 악의적인 신조어가 언론에 의해 널리 확산되는 점이다. 기자들에게 빈번히 제기되는 비판은 ‘받아쓰기를 한다’는 것이다. 받아쓰기는 비판 능력의 부재를 의미한다.

상당수 언론은 민주당 정치인의 발언을 옮기는 쌍따옴표 내에서 ‘원·판·김·세’를 쓰는 것에 그치지 않고 아예 기사 본문에도 버젓이 ‘원·판·김·세’를 써왔다. 연합뉴스 8월 6일자 기사는 한술 더 떠서 전병헌 민주당 원내대표가 ‘원·판·김·세’라는 용어를 말하지 않았음에도 제목을 이라고 달았다. 이쯤 되면 기사 쓰기와 인터넷 게시판 글쓰기를 구분하는 것이 무의미할 정도다.

2008년 광우병 사태 때 ‘뇌송송 구멍탁’이라는 신조어는 우리 사회에 상당한 경제적, 정신적 피해를 남겼다. 이런 책임은 도대체 누가 질 것인가. 정치인들이 만들고 언론이 뿌려대는 ‘낙인찍기 신조어’는 마치 전쟁터의 지뢰처럼 많은 이에게 상처를 주고 사회 곳곳에 상흔을 남기고 있다.

신동아 2013년 10월 호

정해윤 │시사평론가 kinstinct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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