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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석의 언론과 현대사 산책 ⑤

경성제대 졸업한 엘리트, 왜 북한은 이름을 지웠을까?

월북 언론인 이갑섭의‘조보’연구

  • 정진석│한국외국어대학교 언론정보학부 명예교수 presskr@empal.com│

경성제대 졸업한 엘리트, 왜 북한은 이름을 지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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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보(朝報)’의 존재는 일찍부터 알려져 있었지만, 조보 연구는 1970년대 말에 와서야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런데 북한에서는 이미 1958년에 깊이 있는 연구논문 한 편이 나왔다. 조보 연구에서는 남한보다 훨씬 앞섰던 것이다. 그런데 논문을 쓴 필자의 이름은 검은 먹으로 지워져 있다. 대체 필자는 누구였을까? 누군가가 연필로 적어놓은 것처럼 월북 언론인 이갑섭의 것일까. 김일성종합대학의 신문학강좌 교재에 수록되었던 그 논문의 필자에 대한 궁금증에서 출발하여 이를 밝혀보고자 시도했던 과정이 이번 글을 쓰게 된 동기다. 우선 조보란 무엇인가에서 시작하여 북한의 조보 연구에 숨은 비밀을 따라가봤다.
경성제대 졸업한 엘리트, 왜 북한은 이름을 지웠을까?
왕조시대의 전근대 신문 ‘조보’

조보는 왕조시대에 조정의 소식을 손으로 써서 전달했던 필사신문(筆寫新聞)이었다. 중앙집권적인 왕권정치체제에서 왕과 정부의 정책과 인사이동 등을 포함하여 다양한 소식을 손으로 써서 정부의 관리와 지방의 수령들에게 전달했던 매체가 조보였다. 불특정 다수가 아니라 특정한 대상에게 전했다는 점에서는 서한신문(書翰新聞)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조보, 또는 ‘기별’로 통칭되었지만 다른 여러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조보는 오늘날 민간에서 발행하는 신문과 정부의 ‘관보(官報)’기능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 굳이 따진다면 관보에 가까운 존재였다고 할 수 있다. 집권세력은 정치적인 선전과 신속하고 효율적인 정책 수행, 체제를 유지·강화하는 수단으로 조보를 활용했고, 피지배층의 입장에서는 조보가 권력의 동향을 파악하는 창구 역할을 했다. 지배세력과 기득권층을 비롯하여 권력에서 소외된 사람들도 집권세력의 생각과 움직임을 파악할 정보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왕조시대의 언론사상과 뉴스 전달 형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조보의 역할을 규명하고 연구하는 일이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다.

조정의 소식을 주로 담았다는 측면에서 본다면, 조보는 오늘날 정부가 발행하는 관보에 해당한다. 체제유지를 위한 이념 전파의 구실도 수행하였다. 지배층의 통치 이데올로기를 전파하는 매체로 조보는 일정한 역할을 했던 것이다. 민간신문이 없는 시대였으므로 신문의 정보전달 기능은 지녔지만 권력에 대한 ‘감시’와 ‘비판’은 없었다.

근대 신문이 처음 도입되던 무렵부터 조보와 근대 신문의 연관성에 관해서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고, 조보를 근대 신문의 원형으로 보는 견해는 일찍부터 있어왔다. 유길준은 1895년에 발행된 ‘서유견문(西遊見聞)’에서 서양의 신문도 조보와 마찬가지로 손으로 써서 돌려보다가 신문으로 발전하였다고 언급하여 조보를 신문의 기능을 가졌던 언론매체로 보았다.(유길준, ‘서유견문’, 일조각 영인 유길준전서 5, 1971, 478쪽)

1910년 1월1일자 한글판 대한매일신보(국한문판은 1월6일자) 칼럼은 선조 때 선비들이 조보를 인쇄 판매하였으나 왕이 이를 금지했던 사실을 소개했다. 조보의 인쇄 판매를 금지하고 관련자들을 잡아 가두는 바람에 조보 발행이 중단되었던 사실을 들어 “오호라, 신문은 문명 사업의 제1기관이 아닌가. 이것이 방해함만 없었으면 300년을 전래하는 큰 신문이 오늘날 대한국에 있었을진저”라면서 인쇄 판매하던 조보를 왕이 중단시켰음을 아쉬워하였다. 안재홍도 일제강점기 조선일보에 게재한 ‘조선신문사론’(1927년 1월5~9일, 3회)에서 선조 11년(1578)에 관보(조보)를 인행(印行)하여 팔아서 자생(資生)하다가 금지당한 것이 “우리가 아는바 조선 신문(報紙) 발행의 효시”라고 말했다. 이중화(李重華)는 1918년 1월호 ‘반도시론’에 게재한 글 ‘반도의 신문과 잡지’에서 조보를 언급하였다.

일본인 서지학자 마에마(前間恭作)의 ‘고선책보(古鮮冊譜)’(1937)에는 조보에 관한 설명은 없이 현종 초년부터 숙종 23년까지(1659~77)의 조보 40책과 헌종 기유년(1849)의 조보가 남아 있다는 사실만 기록하고 있다. 프랑스 외교관 모리스 쿠랑(Maurice Courant)이 1894년에 불어로 출간한 ‘한국서지(書誌·Bbliogra-phie Corenne)’에도 조보가 하나의 항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한경보(漢京報), 조보 또는 기별이라는 항목은 조보가 발행되던 당시에 외국인이 객관적으로 기록한 자료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모리스 꾸랑, 이희재 역, ‘한국서지(書誌)’, 일조각, 1994).

조보를 본격적으로 연구한 논문은 1969년 ‘조보와 경보(京報)에 관하여’(임종순)가 있었고, 그 후로 언론학과 역사학 분야에서 논문이 나오기 시작했다. 서울대학교 규장각에서도 ‘고문서 12, 관부문서 조보’(1996)를 간행하였는데, 서두에 실린 양진석(梁晉奭)의 ‘해제’도 조보에 관한 연구이다. 조보라는 제도에 관해서는 이처럼 진작부터 연구 논문이 나오고 있었다. 북한의 리철화는 ‘조선출판문화사(고대-중세)’(사회과학출판사, 1995)에 약 6쪽에 걸쳐 조보를 독립항목으로 다루었다.

이름이 지워진 북한의 ‘조보’ 연구자

조보에 관한 연구논문이 북한에서 처음 발표된 연도는 1958년이었다. 북한의 조보 연구는 김일성종합대학에 개설된 ‘신문학강좌’와 관련이 있었다. 김일성종합대학 신문학강좌 개설 시기는 알 수 없지만, 1958년 이전에 신문학강좌가 있었고, 그 과목 가운데 ‘기별’(조보)이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이 해 10월에 출간된 ‘력사론문집’(제2집, 과학원출판사)에 실린 ‘조선신문의 원형(原型)으로서의 기별지에 관하여’라는 논문에 ‘김일성종합대학 신문학강좌’라는 표시가 붙어 있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김일성종합대학에 1950년대 중반에 교과목으로 신문학강좌가 개설되었고, 조보에 관한 강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남한에서는 1954년에 홍익대학에 설립된 신문학과가 최초였고 이어서 1958년에는 중앙대학교에 신문학과가 설립되었다. 정식 학과는 아니었지만 신문학강좌는 서울대(1949), 연희대(1953)에도 개설된 적이 있었다. 1947년 4월에 개원한 조선신문학원(이후 서울신문학원으로 명칭 변경)은 언론인 양성을 위한 신문학 교육을 시작하여 많은 언론인을 배출했다. 6·25전쟁 전의 조선신문학원에서는 전쟁 전에 월북한 인물과 전쟁 후에 납북된 사람들도 강의를 맡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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