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1월호

텍사스 ‘시골’의 작은 ‘루브르’들

킴벨 · 포트워스 · 아몬카터 미술관

  • 최정표 |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 jpchoi@konkuk.ac.kr

    입력2015-10-22 11:5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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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댈러스는 알아도 포트워스는 모르는 이가 태반이다.
    • 그러나 텍사스의 오지라 할 작은 도시에 미술관 순례자라면 꼭 가봐야 할 작은 보석 같은 미술관이 세 곳이나 있다.
    • 특히 킴벨 미술관과 포트워스 현대미술관은 미술관 건물 자체가 하나의 작품이라 할 정도로 아름답다.
    텍사스 ‘시골’의 작은 ‘루브르’들

    킴벨 미술관(위)과 아몬카터 미술관.

    텍사스 동북쪽에는 댈러스(Dallas)라는 유명한 도시가 있고, 그 서쪽 가까운 곳에 포트워스(Fort Worth)라는 낯선 이름의 작은 도시가 있다. 댈러스는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당한 곳이고, 각종 영화와 드라마의 무대이기도 해서 그 이름이 익숙하다. 하지만 ‘포트워스’는 생소하다. 텍사스에서도 외진 곳에 속하고, 한국과도 별 인연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도시에 다이아몬드처럼 빛나는 작은 미술관이 하나 있다. 킴벨 미술관(Kimbell Art Museum)이다.

    문화도시 포트워스

    킴벨 미술관은 케이 킴벨(Kay Kimbell)이라는 부호와 그의 아내 벨마 킴벨(Velma Kimbell)이 모든 것을 바쳐 만든 미술관이다. 소장품은 350여 점에 불과하지만, 주옥같은 유럽 명품으로만 구성됐다. 또한 미술관 건물부터가 미국에서 최고 건물로 인정받는 하나의 예술작품이다. 가히 ‘작은 루브르’라 할 만하다. 미술관의 태동은 1935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1972년 지금의 미술관 건물이 지어지면서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포트워스 인구는 75만 명 정도(2010년 기준)로 텍사스에서 5번째로 큰 도시다. ‘요새(fort)’로 시작하는 이름에서 보듯 도시는 1849년 군사 요새로 출발했다. 1846년 발발한 미국-멕시코 전쟁 때 군사적 요충지였는데, 당시 이 지역에서 활약한 미국 장군 윌리엄 워스(William Jenkins Worth)의 이름을 따서 도시 이름을 지었다. 군사도시로 출발했지만 지금은 문화도시를 지향한다. 문화시설이 꽤 많다. 미술관은 이 도시의 아이콘이다.

    포트워스는 텍사스에서 미술관이 가장 먼저 설립된 곳으로. 문화적 자부심이 매우 강한 도시다. 킴벨 미술관 말고도 아름다운 미술관이 두 곳 더 있는데, 포트워스 현대미술관(Modern Art Museum of Fort Worth)과 아몬카터 미술관(Amon Carter Museum of American Art)이 그것이다.



    킴벨 미술관은 정통 유럽 미술품을, 포트워스 현대미술관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현대 작품을, 아몬 카터 미술관은 미국 작가 작품을 소장한다. 뉴욕 시에 비교한다면 킴벨 미술관은 프릭 컬렉션, 포트워스 현대미술관은 뉴욕현대미술관(MoMA), 아몬카터 미술관은 휘트니 미술관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 세 미술관은 서로를 보완하며 종합 미술관 구실을 한다. 포트워스가 문화도시로 자부심을 가질 만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양보다 질’ 350여 점만 소장

    텍사스 ‘시골’의 작은 ‘루브르’들

    미켈란젤로, The Torment of Saint Anthony, 1487~88(위), 카라바조, The Cardsharps, 1595

    세 미술관은 서로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해 한꺼번에 관람하는 데 불편한 점이 없다. 나는 단지 이들 미술관을 둘러볼 목적으로 2011년 10월 포트워스를 방문했다. 이 도시는 일부러 가지 않으면 좀체 방문할 기회를 갖기 어려운 곳이다. 텍사스의 한쪽 끝에 있는, 미국에서도 오지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미술관 순례자라면 꼭 한 번 가봐야 할 도시다.

    미술관 설립자 케이 킴벨(Kay Kimbell·1886~1964)은 중학교를 중퇴하고 방앗간에 취직할 정도로 빈한한 가정 출신이었으나 사업에 뛰어난 재능이 있었다. 그는 제분, 음식료품, 석유, 유통, 보험 등에 걸쳐 70개가 넘는 회사를 일궈 텍사스 재벌로 부상했다. 1931년 아내 벨마는 남편을 포트워스에서 열린 한 그림 전시회에 데리고 갔는데, 이것이 계기가 돼 킴벨은 그림에 빠졌다. 당장 그 자리에서 영국 그림을 한 점 샀다고 한다.

    킴벨은 그림을 사 모으기 시작하면서 1935년 미술관을 위한 재단(Kimbell Art Foundation)을 만들었다. 그리고 30년 뒤인 1964년, 그동안 모은 명품들과 기타 재산을 재단에 넘기면서 “최고의 걸작이 될 미술관 건물을 지으라”는 유언을 남겼다. 아내도 자신 몫의 재산을 재단에 기부했다. 킴벨재단은 미 서부 지역 최고 미술관인 LA카운티미술관 관장을 지낸 리처드 브라운을 초대 관장으로 초빙해 새 미술관 신축 임무를 맡겼다. 브라운은 미술관에 전시할 렘브란트, 반 다이크 등의 작품과 잘 어울릴 보석 같은 건물을 짓겠다고 선언했다.

    수많은 건축가를 심사한 후 루이스 칸이라는 대가에게 미술관 신축을 맡겼다. 건물은 1969년 공사가 들어가 1972년 완성됐고, 기대하던 대로 걸작이 탄생했다. 미술관 건물은 그 안에 전시될 작품의 품격에 전혀 부족하지 않다고 평가받았다. 이후 소장품이 늘어나자 건물을 더 짓기로 계획했는데, 기존 건물에 흠이 될까봐 새 건물은 길 건너에 따로 지었다. 새 건물도 또 다른 고품격을 자랑하면서 2013년 개관했다.

    킴벨 미술관은 최고의 품격을 지향한다. 초대 관장 브라운은 ‘양보다 질이고, 작품 수를 늘리기 위해 소장품의 품격을 훼손해서는 안 된다’고 분명히 했다. 그래서 미술관은 지금도 여전히 명품만을 고르고 골라 350여 점만 소장한다. 이와 더불어 미술사 전문가들을 위해 5만9000여 권의 장서를 갖춘 도서관을 운영한다.

    美 대륙 유일한 미켈란젤로 작품

    킴벨 미술관에서는 미켈란젤로와 카라바조의 작품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두 작품 모두 그들의 대표작이고 미술사에 기록되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The Torment of Saint Anthony’는 아메리카 대륙에 단 하나뿐인 미켈란젤로 작품이다. 그리고 전 세계에 오직 4개뿐인 미켈란젤로의 패널 그림 중 하나다. 15세기 독일의 유명한 판각화가 마르틴 숀가우어(Martin Schongauer)가 판각한 패널에 미켈란젤로가 그림을 그린 것이다. 미켈란젤로가 12세 무렵 그린 작품으로 그의 유년기 작품으로는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것이라고 한다.

    2008년 소더비 경매에 나왔을 때 이 작품은 미켈란젤로의 스승이 만든 작품으로 알려졌고, 미국의 한 미술상인이 200만 달러에 낙찰받았다. 그리고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으로 옮겨 정밀 감정을 했더니 뜻밖에도 미켈란젤로 본인의 작품으로 판명됐다. 이를 알게 된 킴벨 미술관은 곧 그 가격의 3배인 600만 달러 이상을 지급하고 이 작품을 사들였다.

    카라바조의 ‘카드 사기꾼(The Cardsharps)’은 매우 재미있는 그림이다. 속임수로 카드 도박하는 장면을 그렸는데, 긴장되면서도 코믹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라트루 등 후세 화가들이 이 그림을 모사하거나 패러디한 작품만 해도 50여 점이나 된다. 카라바조가 23세 때쯤 스승으로부터 벗어나 홀로 서기를 할 때 그린 작품으로 그의 첫 후원자가 구매했다. 그 이후 로마의 귀족 가문으로 넘겨져 내려오다가 1890년대부터는 행방이 묘연해졌다.

    이후 100여 년이 지난 1987년 스위스 취리히의 한 수집가가 이 작품을 시장에 내놓았고 킴벨 미술관이 사들여 지금까지 소장하고 있다. 그런데 2006년 영국의 한 미술사학자가 소더비 경매에서 똑같은 그림을 하나 구입했다. 소더비는 킴벨 미술관 작품의 모사품이라며 판매했는데, 구매자는 카라바조가 직접 그린 것이라고 주장했다. 학계에서도 구매자의 의견에 동조하는 사람이 많았다. 카라바조는 똑같은 그림을 여러 점 그리기도 했기 때문이다. 결국 진위를 놓고 소송까지 벌어졌다. 구매자는 2011년 사망했고, 그림은 런던의 한 미술관에 대여됐는데, 보험금이 무려 1000만 파운드(약 170억 원)나 된다고 한다.

    연못에 솟아오른 미술관

    텍사스 ‘시골’의 작은 ‘루브르’들

    포트워스 현대미술관. 일본 출신의 안도 타다오가 설계한 매우 독특한 건물이다.

    포트워스 현대미술관은 미국의 여느 현대미술관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미술관의 출발은 1892년으로 올라간다. 텍사스의 첫 공인 미술관으로, 도서관(Forth Worth Public Library and Art Gallery)과 함께 설립됐다. 1892년 이후 이름과 위치가 수없이 바뀌면서 오늘의 포트워스 현대미술관으로 자리 잡았다. 전시실 규모는 1500평 정도이고, 3000점이 넘는 현대 작품을 소장한다.

    특히 2002년 새롭게 개장한 미술관은 일본이 자랑하는 현대 건축가 안도 타다오(Ando Tadao)가 설계한 건물로, 건물 자체가 마치 현대 조각품 같아 매우 돋보인다. 내부 전시실은 물론 건물의 외형과 정원 모두 현대적 감각을 최대한으로 부각한 초현대식 건축물이다. 실내 전시실은 넓고 천장이 높아 어지간한 규모의 대작이 전시돼도 답답한 느낌을 주지 않는다.

    이 미술관의 하이라이트는 건물을 에워싼 연못. 미술관 건물이 마치 물속에서 솟아오른 것처럼 야트막한 연못에 둘러싸였다. 건물 외벽은 통유리로 돼 있어 미술관 안에서 바깥을 보면 발아래에서 물이 출렁인다. 벽이 모두 통유리로 둘러싸인 만큼 실내에서도 마치 정원에 나와 있는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된다. 미술관 레스토랑도 반드시 들러야 한다. 식당 바깥이 모두 물이라, 호수 한가운데 떠 있는 듯하다. 강원도 원주에 있는 ‘뮤지엄 산’ 역시 안도의 작품으로 두 미술관은 닮은 점이 많다.

    연못의 외곽은 푸른 잔디밭이고, 거기에는 조각품들이 전시돼 있다. 텍사스의 따스한 햇볕을 받으면서 정원의 조각품을 감상하는 것 역시 놓쳐서는 안 될 즐거움이다. 미술관 정면 왼쪽에는 세라(Richard Serra)의 초대형 철 조각품이 우뚝 솟아 있다. 3층인 미술관 높이보다 더 높다. ‘Vortex’라는 제목이 붙은 이 작품은 대형 철 구조물로 만들어진 전형적인 세라의 조각품으로, 32t이 넘는 대형 철판 7개로 만들어진 총 230t짜리 작품이다. 2002년 설치된 이후 10여 년간 산화한 철은 구릿빛 녹을 금빛처럼 햇볕에 반사시킨다.

    안도 타다오는 일본 오사카 출신으로 매우 특이한 경력을 소유한 현대 건축가다. 건축가로서 체계적인 교육을 받지 않았고, 건축가가 되기 전에는 트럭 운전사와 권투선수를 했다. 독학으로 공부한 건축가이고, 일본의 정신을 잊지 않는 건축가로 정평이 나 있다.

    포트워스 현대미술관은 안도의 세 번째 미국 내 건축물이다. 첫 번째는 1997년 시카고에 지은 자신의 집이고, 두 번째는 2001년 건축한 세인트루이스의 퓰리처 예술재단(Pulitzer Foundation for the Arts) 건물이다. 그런데 두 건물 모두 포트워스 현대미술관에 비해 규모가 매우 작다. 따라서 포트워스 현대미술관은 안도가 미국에서 자신의 기량을 최고로 발휘해서 지은 첫 건물인 셈이다. 안도는 유명 건축가들과 벌인 치열한 경쟁에서 승리해 이 건물의 설계자로 선정됐다. 미술관 측은 안도의 작품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텍사스 오지에서 만나는 추상미술

    포트워스 현대미술관에는 추상표현주의(abstract expressionism) 거장들의 작품이 유난히 많다. 뉴욕 MoMA에서나 봄직한 추상표현주의 작품을 텍사스의 작은 도시에서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의외였다. 특히 추상표현주의 1세대 거장들의 작품은 미술관의 품격을 한층 높여준다.

    로버트 머더웰(Robert Motherwell)은 미국 추상표현주의를 지칭하는 용어 ‘뉴욕파(New York School)’를 처음 쓴 사람으로 잭슨 폴록, 마크 로스코, 빌렘 드쿠닝, 필립 거스톤 등과 더불어 추상표현주의 1세대로 일컬어진다. 그들 중에서는 막내에 해당될 것이다.

    텍사스 ‘시골’의 작은 ‘루브르’들

    리처드 세라, Vortex, 2002

    포트워스 현대미술관은 머더웰의 작품을 50여 점 소장하고 있다. 머더웰이 화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 첫해(1941)부터 죽기 1년 전(1990)까지의 작품을 망라한다. 그중에 ‘스페인 공화국에 대한 애가(Elegy to the Spanish Republic)’와 ‘스페인 공화국에 대한 애가 No. 171(Elegy to the Spanish Republic No.171)’은 그의 대표작에 해당한다. 머더웰은 검은색과 하얀색을 대비시키고, 수직 막대기와 계란형 모양을 대비시키는, 이런 유형의 그림을 수백 점 그렸다. 여기서 ‘애가(Elegy)’는 스페인 내전(1936~1939)과 공화주의자들의 비극적 패배를 나타낸다. 애가는 장례식 때 부르는 진혼곡이라고 볼 수 있다. 생과 사를 대비시키고 잔인한 죽음을 잊을 수 없다는 머더웰의 염원이 담긴 작품이다.

    머더웰은 워싱턴 주에서 태어났지만 학창 시절 대부분을 캘리포니아에서 보냈다. 그는 스탠퍼드대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하버드대 대학원에 가서도 철학을 공부했다. 이후 컬럼비아대 박사과정에서 미술사를 전공했고, 곧이어 전업 화가의 길로 들어섰다. 그는 1940년대 미국에서 일어난 추상표현주의의 토대를 닦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1944년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같은 해 MoMA가 그의 작품 한 점을 구입했다. MoMA는 그의 작품을 구입한 1미술관으로, 이로써 그의 앞길이 열리기 시작했다. MoMA가 인정한 작가였으니.

    1940년대 중반에 오면 머더웰은 미술계 아방가르드 운동의 주요 대변자가 된다. 1958년에는 추상표현주의의 대표적 여류화가인 헬렌 프랑켄탈러(Helen Frankenthaler)와 결혼하는데, 그의 세 번째 결혼이었다. 그러나 이 결혼도 1971년까지만 이어졌다. 1991년에는 포트워스에서도 그의 회고전이 열렸다.

    추상에서 구상으로

    포트워스 현대미술관에는 필립 거스톤(Phillip Guston)의 작품도 많다. 주로 전성기이던 1950~70년대 작품이다. ‘불빛(The Light)’은 1964년 작품인데 유난히 눈길이 갔다. ‘저것도 그림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추상이라는 것이 본래 그렇긴 하지만 내게는 그저 ‘물감으로 된 낙서’였다. 3개의 물체가 검은색으로 그려져 있는데 무엇인지 통 알 수가 없다. 마음속의 심상이라 생각하고 각자의 상상에 맡겨 해석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제목 때문인지 바탕으로 그려진 분홍색은 물체 뒤에서 비추는 불빛 같기도 하다.

    거스톤의 ‘페인터스 폼스(Painters´s Forms)’는 매우 괴기스러운 그림이다. 입에서 온갖 잡동사니가 쏟아져 나온다.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것은 다리, 구두, 담배꽁초, 손톱, 재떨이 뚜껑 등이라고 하는데 그림에서 식별해내기는 쉽지 않다. 작가 자신의 입이라고 가정하면, 이 그림은 그의 자화상이 될 것이다.

    필립 거스톤은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태어나 어릴 때 가족이 모두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했다. 부모는 우크라이나계 유대인인데, 거스톤이 캘리포니아에서 자랄 때 유대인은 흑인과 마찬가지로 심한 차별대우를 받았다고 한다. 어려운 유년 시절을 보낸 것이다. 게다가 그는 열 살 무렵 아버지가 목매 자살한 모습을 직접 목도하는 비극을 겪었다.

    거스톤은 14세 때 LA의 예술고등학교에 입학했는데, 거기서 나중에 미국 추상표현주의의 대가가 된 잭슨 폴록을 만난다. 둘은 친구가 됐다. 학교가 미술보다 체육을 강조하자 둘은 이 정책에 반대하는 글을 발표했다. 이 사건으로 둘 다 퇴학 처분을 받는데 폴록은 나중에 복학해서 졸업했다. 거스톤은 미술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거의 독학으로 공부했다.

    22세 때 거스톤은 뉴욕으로 갔다. 그 후 이곳저곳 대학에서 그림을 가르쳤고, 드디어 1950년대에 들어 추상표현주의 1세대 작가로 크게 성공을 거두며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1970년대 와서는 추상에 점점 실망감을 느끼고 방황하며 구상 쪽으로 옮겨가기도 했다.

    미국 미술사의 현장

    포트워스의 세 번째 명품 미술관인 ‘아몬카터 미국작품 미술관’은 이름 그대로 미국 작가의 작품을 소장하고 전시하기 위해 아몬 카터(Amon G. Carter·1879~1955)가 만든 미술관이다. 아몬 카터는 자기의 수집품을 기준으로 미술관을 만들라고 유언을 남겼고, 딸 스티븐슨(Ruth Carter Stevenson)이 1961년 미술관을 정식 출범시켰다.

    초대 관장 윌더(Mitchell A. Wilder)는 미국 미술사의 현장을 만들겠다는 원대한 꿈을 안고 미국 작가의 작품을 시대별, 유파별로 균형 있게 수집했다. 그 결과 미술관은 1830년대의 풍경화부터 20세기 현대 작품까지 미국 미술사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미술관으로 발전했다. 유명 작가는 물론 웬만한 미국 작가의 작품은 모두 소장하고 있다. 미술관은 미국 사진작가 400여 명의 작품 3만여 점도 갖고 있다. 명실 공히 미국 미술 역사의 메카다. 미술관은 2001년에 대대적인 확장공사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아몬 카터는 13세 때 어머니가 죽자 가출해 뜨내기 외판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기차에서 샌드위치를 파는 등 온갖 일을 다 했다. 외판원으로 타고난 기질이 있었든지 샌드위치 사업으로 크게 성공해 언론사를 인수했고, 이 회사를 지역의 최고 언론사인 ‘Fort Worth Star-Telegram’으로 키웠다. 이 언론사는 텍사스는 물론 인근의 뉴멕시코와 오클라호마까지 영역을 넓혀나갔다. 나중에는 라디오와 TV까지 운영하는 종합 미디어 회사로 발전했다.

    텍사스 ‘시골’의 작은 ‘루브르’들
    최정표

    1953년 경남 하동 출생

    미국 뉴욕주립대 박사(경제학)

    공정거래위원회 비상임위원, 건국대 상경대학장

    저서 : ‘재벌들의 특별한 외도’ ‘한국재벌사연구’ ‘공정거래정책 허와 실’ ‘한국의 그림가격지수’ 등

    現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 경실련 공동대표


    아몬 카터는 포트워스를 위해서라면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많은 회사와 학교를 포트워스에 유치했고, 미국 전역에 포트워스를 홍보하는 일에 열정을 쏟았다. 언론사를 운영한 만큼 홍보의 귀재이기도 했다. 그런 아몬 카터가 포트워스에 미술관을 남긴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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