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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論으로 본 조선왕조실록

왕실을 다스려야 나라를 다스린다

종친들의 사치 풍조

  • 허윤만 | 한국고전번역원 연구원

왕실을 다스려야 나라를 다스린다

왕실을 다스려야 나라를 다스린다
조선시대 국정 기록을 전담한 사관은 임금과 신하의 대화를 기록하고 국정과 관련된 주요 문건을 인용, 발취해 사초를 작성했다. 사건의 시말(始末), 시시비비, 인물에 대한 평가 등 사관들의 다양한 의견(史論)이 함께 실렸다. 당대에 첨예한 논란을 빚으며 사관들의 붓끝을 뜨겁게 한 사건을 2편씩 소개한다. 이 글은 최근 한국고전번역원이 발간한 ‘사필(史筆)’에서 가져왔다.

한국고전번역원 刊 ‘사필(史筆)’



조선시대의 한양 도성은 이른바 4대문의 안쪽 구역으로, 지금의 서울 중구 전체 및 종로구 중심 지역을 포괄하는 정도의 크기다. 현재의 서울시와 비교하면 아담해 보이지만, 도성으로서의 기본 기능은 충분히 해낼 수 있는 규모였다.

하지만 도성 크기는 한정돼 있는데, 도성 내 인구는 계속 늘다 보니 주거 공간이 모자라는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도성에 거주하는 왕실 종친과 고관대작들은 자신들의 부와 지위를 이용해 더 크고 더 넓은 집을 지으려 했고, 이 때문에 나라에서는 기준을 마련해 이를 규제하려 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조선의 가옥 건축에 관한 규정인 ‘가사제(家舍制)’가 세종 13년(1431)에 도입됐다. 처음에는 지위에 따라 가옥의 면적을 규제했는데, 임금의 적자(嫡子)인 대군(大君)은 60칸, 여러 왕자와 공주 등은 50칸, 2품 이상 관리는 40칸, 3품 이하 관리는 30칸, 일반 서민은 10칸으로 제한했다. 그런데 가옥 면적을 제한하자 이번에는 집을 높고 화려하게 짓는 현상이 나타났다. 결국 세종 22년(1440)에 이르러선 기둥과 들보의 길이, 누각의 높이 등도 규제하기 시작했다.



집 넓히기, 높이기 경쟁

왕실을 다스려야 나라를 다스린다

[일러스트• 이부록]

그러나 규정이 아무리 치밀해도 이를 지키지 않을 때 단속할 방법이 없다면 있으나 마나다. 중종 때 사회 기강을 어지럽힌 왕실의 사치 문제는 바로 이 가사제를 제대로 지키지 않은 데서 비롯됐다.

중종은 20명의 자녀를 뒀는데, 요절한 인순공주를 제외한 9남 10녀가 모두 혼인했다. 이렇듯 장성한 자녀가 많다 보니 이들이 독립해 대궐 밖에 나가서 살게 될 가옥을 신축하거나 수리하는 일이 빈번했다. 그 과정에서 규정을 어기며 집터를 늘리거나 규정에 없는 건축물을 짓는 등의 폐단이 속출했다.

그러자 규정을 벗어난 왕실의 가옥은 철거해야 한다는 신료들의 주장이 거세졌다. 급기야 중종 22년(1527) 5월에는 한 달 동안 무려 12차례나 철거 요청이 있었다. 하지만 자식 사랑이 남달랐던 중종은 신료들의 집요한 요구를 계속 물리쳤다. 중종의 완강한 고집에 신료들의 요구도 일단 한풀 꺾인 듯 보였다. 그러나 신료들은 7월부터 다시 거센 반격을 퍼부었고, 이를 견디지 못한 중종은 결국 울며 겨자 먹기로 철거를 승인해야만 했다.

하지만 이후로도 왕자군과 옹주들의 불법적인 가옥 확장이 계속돼 백성의 고통을 가중시켰다. 중종 30년(1535)에 올라온 사헌부의 계사(啓辭)에 그 실상이 훤히 드러나 있다.

“돈의문 안에 새로 지은 옹주의 집터가 꽤 넓은데도 행랑 밖에 있는 평민 사랑손 등 6인의 집을 억지로 사들여 철거했습니다. 이에 억울함을 호소하며 울부짖는 소리가 밤낮으로 그치지 않으니 듣는 자들이 모두 놀라 탄식하고 있습니다.

왕자와 옹주의 집터에 대한 규정이 경국대전에 실려 있으니 선왕이 법을 세운 뜻이 매우 깊고 멀리 내다본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여러 왕자가 법전을 무시하고 서로 사치스러움을 경쟁하며 집터 넓히기에만 힘쓰다 보니, 백성이 편안히 살지 못하고 끝내 유랑하게 됩니다. 경국대전에 의거해 집터를 넓히지 못하게 하고, 아울러 억지로 땅을 사들이지도 못하게 하소서.”(중종실록 30년 6월 7일)

이처럼 왕자군과 옹주들이 불법으로 집터를 확장하기 위해 주변 백성의 집을 철거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백성은 감히 왕실을 상대로 반항할 수도 없어 꼼짝없이 집에서 내쫓겨야 했을 것이다. 값을 쳐줘서 집을 사들인다고는 해도 대대로 살아온 집을 억지로 내놓아야 하는 처지였으니 집을 빼앗긴 자들의 상실감은 무척 컸을 것이다.



변소처럼 보일 정도

이에 대한 사관의 논평을 보자.

 

주상은 재위한 지 30년이 지났지만 한결같이 공손하고 검소해 선왕이 물려준 궁궐을 넓히거나 증축하는 일이 없었고, 무너지고 파손된 곳이 있더라도 즉시 수리하지 않았다. 그런데 왕자와 부마들은 쉴 새 없이 집을 지었기 때문에 토목공사에 시달리는 백성의 고통이 그칠 때가 없었다. 사대부의 집에서도 이를 경쟁하듯 따라 해 웅장하고 아름답게 꾸미는 데 힘써서 화려한 서까래와 높은 용마루가 도성 곳곳에 즐비했다. 선왕 때의 재상 집을 여기에 비교해 본다면 마치 변소처럼 보일 정도였다.

-중종실록 30년 6월 7일



왕실의 사치를 위해 백성이 토목공사에 시달리는 데다, 이처럼 좋지 못한 풍조가 사대부들에게까지 번지며 더욱 큰 폐단을 낳았다. 왕실이 대놓고 법을 어기는데 누가 지키려 하겠는가. 비록 중종 자신은 검소하고 백성 앞에 모범을 보이고 싶어 했지만, 나랏일을 다스리기에 앞서 집안 단속부터 했어야 했다. 중종은 자기 자식들의 사치를 충분히 규제할 수 있는 위치에 있으면서도 사실상 사치를 방조한 것이다.

당시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훈구파 신료들은 대토지 소유를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고 그 부를 한껏 과시하며 사치 풍조를 조장했다. 어쩌면 중종은 미약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왕실의 사치를 방조하는 식으로 기싸움을 했을지 모른다. 애초에 탐욕에 물든 훈구파는 차치하고라도, 왕실만큼은 스스로 권위와 기강을 세워서 잘못된 풍조를 어떻게든 바로잡으려는 태도를 보여줬어야 했다. 무리한 토목공사로 백성이 고통받고 삶의 터전에서 내쫓기는 것을 막지 못한 중종의 한계가 못내 아쉽다.





신동아 2016년 9월 호

허윤만 | 한국고전번역원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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