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6월호

김양동 계명대 서예과 교수

  • 김서령 칼럼니스트 psyche325@hanmail.net

    입력2007-06-04 16: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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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양동 계명대 서예과 교수
    “신석시 시대 토기에 얹힌 문양은 빗살무늬가 아니라 빛살무늬이다.”

    “신의 고유어는 살이다.”

    서예가이자 화가이자 전각가이자 금석학자인 김양동(金洋東·64) 선생의 흥미로운 주장이다. 그를 여러 번 만났다. 귀 기울일수록 흥미진진했고 들여다볼수록 신기했다. 수백장의 사진자료를 구경했고 옛 서적과 논문을 훑어봤다. 이야기는 소박하고 간명했다. 어려울 게 아무것도 없었다. 어째서 여태 아무도 이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우리가 지금까지 별 생각없이 받아들였던 토기 위의 빗금은 ‘빗살무늬’가 아니라는 것이다. 거기다가 왜 하필 빗살을 그렸을까 의심하지 않은 채 그저 교과서에 나온 대로 빗살이란 명칭을 습득해버렸고 빗살이니까 빗살이려니 했다. 생각하면 우리가 사물과 세상을 대하는 방식은 늘 이런 식이 아니었던가?

    먼저 김양동 선생의 얘기를 근거로 ‘빛살무늬’ 토기부터 들여다보자. 토기는 그냥 물건을 담는 용기가 아니다. 5000년 전 우리 선조들의 생각과 말이 고스란히 담긴 경전이고 암호다. 토기가 생긴 것은 구석기시대가 지나고 신석기시대로 진입하면서부터다. 토기라는 그릇이 필요하게 된 사회경제적 의미는 농경생활이 시작됐다는 것이다.



    사냥을 하거나 열매를 따 먹고 살 때라면 깨지기 쉽고 옮기기에도 무거운 토기 같은 것이 필요했을 리 없다. 그런 시절에는 그저 던져도 깨지지 않고 납작하게 접히는 가죽 포대 같은 걸로도 족했으리라.

    갈무리할 곡식이 생겼기에 저장할 그릇이 필요했다. 그래서 토기를 만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토기의 몸에 뭔가를 새겼다. 동이족(東夷族) 토기의 특징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이 표면에 그어진 빗금이다. 과연 아무 생각없이 머리 빗던 빗으로 흙 위에 죽죽 금을 그었을까?

    아니, 그 시대 사람들이 과연 머리를 빗었으며 빗었다 해도 지금 같은 빗이 있었을까. 즐문(櫛文)이 어째서 즐문일까? 그게 과연 ‘빗살’이 맞을까? 김양동 선생의 의문은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그는 온갖 자료를 찾아다녔다. 중국에도 가고 몽골에도 가서 책을 뒤지고 흩어진 파편을 주워 모았다.

    고대의 생각을 찾아

    그가 무슨 고고학자는 아니었다. 붓글씨를 썼고 글씨를 쓰다보니 전각을 하게 됐고 한서를 읽게 됐고 두루 궁금한 게 많아진, 천상 타고난 ‘공부꾼’일 뿐이다. 실은 고고학자니 서예가니 화가니 하는 구분조차 졸렬하다. 굳이 학문과 예술의 장르를 금 긋고 쪼개고 갈라놓을 필요가 있을까.

    아무튼 그는 토기의 빗금이 빗살일 리 없다고 맨 처음 의문을 들고 나온 사람이었다. 반복된 짧은 사선, 이게 뭘까? 왜 새겼을까? 다른 곳엔 없을까? 이 무늬가 그 시대의 가장 아름다운 디자인이었단 말일까? 이쯤되면 공부란 가슴 뛰는 설렘이 된다.

    그는 한문 해독력이 나라 안 둘째가라면 서러울 학자인데다 부지런하고 열정적이었다. 게다가 직관이 발달했고 통찰력이 있었다. 내가 목동 그의 집에 자꾸만 찾아간 것도 비슷한 설렘에 전염됐기 때문이다.

    “고고학자들이 빗살무늬라고 부르는 건 그 무늬가 빗을 닮았고 또 빗 같은 도구로 그렸을 거라는 점에서 비롯된 거거든요. 빗살무늬라는 이름은 광복 전에 일본인 후지다 교수가 독일어의 ‘kammkeramik(comb pottrery)’를 직역해 쓰기 시작하면서 비롯됐고요. 그걸 우리 고고학계가 비판 없이 그대로 가져다 쓴 겁니다. 유물에는 고대인의 사유 체계가 그대로 담겨 있어요.

    출토 유물의 명칭은 왜 그런 형태와 문양과 재질을 그 시대에 썼으며 무슨 내용을 담고 싶어서 그랬던가 하는 의문에서 출발해 붙여야지, 지금 사람들의 잣대로 비슷하게 생긴 사물의 이름을 마구 갖다 붙여서는 안 됩니다. 유물의 명칭은 사고의 틀을 한정해버려요. 적어도 통일신라 이전 출토물들의 명칭은 설득력을 가질 수 있게 재검토해야 할 겁니다.”

    김양동 계명대 서예과 교수

    내년이 정년이지만 평소 구상중인 생각들을 작품화 하려면 앞으로 10년은 꼬박 더 걸릴것 같다고 김양동 교수는 말한다.

    산둥반도를 중심으로 중원의 동해안에 분포되어 군락을 이루던 고동이족은 태양숭배족이었다. 동해에 아침마다 둥그렇게 떠오르는 해는 언제나 정확하게 반복되는 불변의 진리였다. 또한 태양은 그들이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가장 큰 알이었다(우리말 ‘하늘’은 한(큰)+알(卵)에서 왔을 가능성이 크고, 고대인은 하늘(天)과 태양(日)을 같은 개념으로 생각했다는 것이 여러 문헌에 나타나고 있다).

    추운 날 한데서 밤을 지새본 사람은 안다. 해가 돋는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인간이 얼마나 태양빛을 그리워하는지를! 이뿐 아니라 태양이 곧 생명 그 자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고층건물도 전기도 도로도 탈것도 상상할 수 없던 기원전 3000년, 야생짐승과 추위와 비바람을 견뎌야 했던 신석기시대 인간에게 태양의 의미는 현대의 태양과는 다를 수밖에 없었으리라. 신비이고 신앙이고 그 자체가 신(神)의 현현이었을 것이다.

    빛을 그린 이유

    산과 강과 흙뿐인 땅에서 솟아오르는 태양의 크기와 기운을 상상하는 건 어렵지 않다. 게다가 농경의 첫 번째 조건은 일조량이다. 초기 농경생활에 필요한 토기를 만든 고대인이 그 표면에 무엇을 그려넣고 싶었을지는 뻔하고 선명해졌다.

    거기다 ‘빗’을 그렸겠는가, ‘빛’을 그렸겠는가. 토기의 빗금은 당연히 빛이었다. 빛은 그렇게 빛살의 형태가 되어 우리에게 닿았다. 그걸 고대인은 신에게서 온다고 여겼으리라.

    빗살무늬는 빛살무늬가 되는 것이 백번 온당하다고 나는 수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김원룡 선생은 지금까지 잘 써오던 것을 혼동스럽게 굳이 새 이름을 만들 필요없다고 하셨다지만, 김양동 선생이 찾아낸 의미는 희한하게도 발음이 같다. ‘빗살’을 ‘빛살’로 바꾼다 해도 혼란스러울 게 전혀 없다는 것은 우리말의 너그러움이자 지금까지 제 이름 찾기를 기다려온 고대인의 모종의 주술인 것만 같다.

    그까짓 토기 위의 무늬쯤 빗살이든 빛살이든 뭐가 대수냐고? 그게 전혀 그렇지가 않다. 토기 위의 무늬는 인간이 남긴 최초의 언어다. 최초의 언어가 신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은 심원한 의미가 담겨 있음을 상징한다. 그 빗살무늬는 지금도 우리 생활 곳곳에, 현대예술의 여기저기에서 원형질이 그대로 발견된다는 게 김양동 선생의 발견이고 주장이다.

    “토기의 빛살은 태양숭배 사상에서 유래된 신(빛살, 햇살)을 간절한 주술적 염원으로 새겨놓은 것이었어요. 최고 존재에 대한 경배심, 그리움, 풍요로운 생산을 기원하면서 태양을 상징하는 의상(意象)을 긋고 새겼던 고대인의 마음이 토기를 보고 있으면 그대로 전달되지 않습니까.”

    그렇다. 알고 보는 것과 모르고 보는 것은 이렇게 달라진다. 김양동 선생의 이야기에서 나는 여러 번 눈에서 비늘이 떨어지는 삽상함을 체험했다. 그는 또한 빛살무늬의 본질이 원시예술의 원형질을 이루어 한국미의 특색인 ‘선의 예술’을 만들어냈다고 유추한다.

    ‘아름다움’의 유전자

    “이런 본질적인 미감은 배우고 가르쳐서 얻어지는 게 아니거든요. 절로 민족정서에 배어들어 피와 살처럼 우리 것이 된 겁니다. 저 빛살무늬의 원초적 미감이 한국인의 유전자에 새겨진 아름다움의 최초이자 최후의 것이 아닐까요? 그런 미적 정서가 현대미술 용어로 신(新)원시예술(New Primitive Art)이라고 하는 것으로 이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원시성은 언제나 순진 소박 단순 무기교 등의 특성을 지니며 동일 문양의 반복으로 나타나는 속성을 지닙니다. 김환기 정상화 곽인식의 작품과 박서보의 ‘묘법’시리즈, 서세옥의 군무, 이우환의 ‘선으로부터’시리즈, 하종현, 권영우, 송수남, 최영명, 오수환씨의 작업들이 내 눈에는 동이족 신석기 시대 빛살 무늬에 시원을 둔, ‘뉴 프리미티브 아트’화(化)된 모던 작업으로 보입니다.”

    우연히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의 이응로전과 현대화랑의 정상화전을 그와 같이 보게 되었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먹으로 찍은 동일 형태들, 방사상으로 퍼져가는 문양들, 200호 화면을 가득 채운 똑같은 선과 색의 반복은 아닌게아니라 토기 위의 빛살무늬와 연이어 있다는 게 확연히 보였다.

    그 작업이 이뤄진 시점이 기원전 2000년이든 서기 2000년이든 상관없이, 작업한 장소가 파리의 아틀리에든 한강변의 몽촌토성이든 상관없이 같은 이미지와 미감이 전해진다는 것은 전율할 일이었다.

    김양동 계명대 서예과 교수

    김양동 교수는 현대적 느낌의 서화 작품을 즐겨 그린다.

    “중간색이나 단색 톤, 반복성, 비정형성의 누적은 고대 인간이 남긴 최초의 신의 언어(빛살무늬)를 현대적 감성으로 표현한 거예요. 이건 틀림없이 체질에서 나온 미적 특성일 겁니다. 이것이야말로 빛살을 사유의 원형으로 삼은 동이(東夷)들의 영성에서 얻어지는 우리만의 논리예요. 그런데 굳이 이걸 앙포르멜이니 미니멀아트니 모노크램이니 하면서 박래된 용어들로 해석해야만 말이 되는 걸로 알고 있으니…, 반성해야 합니다.”

    이건 그림 얘기가 아니다. 신에 관한 얘기다. 김양동 선생이 지닌 또 하나의 중요한 문제의식은 우리말에 왜 신(神)에 해당하는 단어가 없느냐는 것이다. 그걸 그는 뜻글자인 한자를 통해 유추해냈다. 한자는 역사 속에 일어난 갖가지 사건과 인간이 연관된 고대 문화의 압축이라고 할 수 있다. 한자에서 신(神)의 문자학적 변천은 ‘|’에서 ‘?’으로, 다시 ‘?’을 싸고 있는 학 구(臼)자로, 다시 ‘申’에서 ‘神’으로 논증된다.

    불알과 상투

    신은 한자 고어에서도 태양의 광선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말은? ‘|’은 원초적 생명 에너지를 주는 태양의 빛살을 나타낸 상형자다. 우리 민족 시조 신화인 고주몽, 박혁거세, 김알지 등의 탄생이 모두 햇빛 쪼임과 관계 있는 난생설화(卵生)이고 천손강림설화인 것은 바로 그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자 다음 변천단계인 ‘?’은 1.불똥심지 주 2.주인 주 3.우두머리 주로 해석되는 자(字)다. 해는 불(火)의 알(卵)이므로 불알이 된다. 불의 알은 남자가 지닌 생산의 원천으로 고환을 ‘부랄’이라고 하는 것도 불알의 연철음으로 생각할 수 있다.

    “장가를 간 불알은 대외적으로 머리 꼭대기에 독립 선포의 표식을 얹는데 그게 바로 ‘상투’예요. 말의 대립관계로 볼 때 상투에 대응하는 하투가 있어야 할 거 아닙니까. 하투란 말할 것도 없이 불알이거든요. 여자들의 얹은 머리도 마찬가지고…. 고대의 머리 모양은 성(性)의 표시와 밀접한 연관이 있어요.”

    신(神)이 ‘|’에서 ‘?’로 변한 것은 태양이라는 자연신이 사람이라는 인격신으로 변한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고대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종족보존과 번식이었다. 그게 역사의 전부였다. 그러니 고대인은 종족보존과 번식을 할 수 있도록 근원적인 힘을 내려주는 대상, 즉 태양을 숭배하고 신으로 모셨을 수밖에 없다. 현대인이 황금이란 물신에게 경배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같은 이유 아닐까.

    그런데 우리말엔 하늘 땅 해 바람 물 사람 소리 쌀 살(나이) 숨 솔 수리 같은 단어가 살아 있는데도 신에 대응하는 고유어가 없다. 정말 없었을까? 김양동 교수는 다시 문헌을 뒤지기 시작했다. 아니 혼자 앉아 가만히 혀를 굴려봤다. 그리고 문득 깨달았다. 신을 나타내는 한자의 근본 형태가 ‘|’이라면 거기 해당하는 우리말은 빛-살이나 햇-살일 거라고. 그 말에 공통되는 ‘살’이 즉 신의 고유어일 것이라고!

    신이 만물의 상위개념이므로 만일 고유어가 ‘살’이라면 이 말을 핵으로 한 고대 문화 상징어들이 갈라져 나왔을 거라는 가정하에 이번에는 ‘살’을 어원으로 하는 어휘군을 찾아보았다. 많았다. 온통 ‘~살’ 투성이였다.

    신(神)은 ‘살’이었다?

    생의 의미인 ‘삶, 살다’와 ‘사람’, 공기나 물의 흐름을 일컫는 바람-살, 물-살(여기서 풍류(風流)가 나왔다고 그는 생각하고 있다), 우리가 주식으로 하는 쌀과 그걸로 만들어진 ‘살’, 알을 낳다의 ‘슬다’, 새해 첫날인 ‘설’과 음악의 원형인 ‘소리’, 새 중의 우두머리이며 흔히 왕을 상징하는 ‘솔개’, 우리 민족의 상징인 ‘소나무(솔)’, 신에게 바치는 음료인 ‘술’, 임금의 밥인 ‘수라’, 태양을 본뜬 모양의 바퀴를 가진 ‘수레’ 등등등. 게다가 ‘살’을 기본으로 한 어휘들은 단순 어휘가 아니라 모두 고대 문화의 상징어였다.

    김양동 선생을 만나기로 약속한 날 나는 공교롭게 살풀이를 전공한 한 춤꾼과 동행했다. 결코 달변이라 할 수 없는 그가 반가운 기색이 역력한 채 말했다. “살풀이의 살-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살은 알고 있는 것처럼 악하고 삿된 기운이 아니에요. 신풀이 신명풀이라는 의미가 돼야 해요. 신(神)이 명(明)하다는 것은 ‘살’이 끝까지 구김 없이 좍 뻗쳐 나가는 것을 뜻하거든요. 그것은 흥이고 풍류이고 멋입니다. 술과 소리와 살풀이가 섞여 원시종합예술이 되고 신명이 최고조에 이르는 겁니다. 신명이 나는데 까짓 살(煞)이라고 풀리지 않고 배겨 나겠어요? 살(煞)은 신(神)의 악의적이고 왜곡되고 축소된 의미로서 살풀이라는 말 속에 남아 있게 된 겁니다.”

    그는 1943년생이고 경북 의성에서 태어났다. 그 시절 농촌의 가난이야 되물을 필요도 없다. 게다가 아버지가 전쟁 때 돌아가셨다. 편모 슬하 3남 2녀의 막내아들은 중학 진학도 쉽지가 않았다. 가난에 대한 지울 수 없는 기억이 몇 있다. 누구든 유년기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현재의 싹이 거기 움트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김양동 선생에게서도 그걸 찾아내고 싶었다. 어릴 적 이야기를 졸랐다.

    “어머니는 밤 깊도록 베를 짜셨어요. 자다 깨보니 베 짜던 어머니가 뭐라고 자꾸 중얼거리셔요. 들어봤더니 낮에 이웃집 할머니한테 설움을 당하셨던지 혼잣말로 그 할머니한테 분풀이를 하고 계셨어요. 그 말을 듣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룩 흘렀는데 그때 주먹을 쥐고 결심했어요. ‘꼭 성공해서 어머니 설움을 씻어드려야겠다!’고.”

    중학 졸업 후 산에 나무나 하러 다녀야 했던 소년이 미대 교수가 되고, 그림과 글씨와 서각이 혼융된 놀랄 만한 그림을 쉼 없이 그려대고, 뉴욕으로 파리로 전시회를 하러 다니는 것은 저 홀로 울음 삼킨 밤과 연관돼 있음에 틀림없다. 대학 학장에, 문화재 위원에, 미협 서예분과위원장 같은 감투는 거기 따라오는 부스러기일 뿐이다.

    야간학교 학생, 교수 되다

    내가 김양동의 그림을 처음 본 곳은 인사동 통인화랑이다. 흙으로 그려진 사람이나 부처가 네 귀가 번쩍 들린 기와집 안에 앉아 있고 양쪽으로 시가 씌인 그림이 수십 점 전시돼 있었다. 이전 어디서도 본 적 없는 그림이었다. 시와 글씨와 그림이 한 화면에 공존했다. 전혀 본 적 없는 건 아니었다. 시화전이라는 학생들 잔치에 이 비슷한 것이 있긴 했다.

    그러나 시화전에서 시의 의미가 주라면 김양동 그림에선 형태가 우선이었다. 그림 곁에 따라나오는 글씨도 그 자체로 조형이었다. 물감의 빛깔 또한 독특했다. 분명 2000년이라는 사인이 있는데도 기원전 2000년의 그림이 아닌가 싶을 만큼 바랜 빛깔이었다. 오래된 와당의 빛깔, 출토된 토기의 빛깔, 녹슨 구리의 빛깔이 깊고 담담하게 이쪽을 응시했다. 숱한 이야기가 화면 안에서 흘러나왔다. 시와 글씨와 그림의 본질을 새삼 짚어보게 만드는 화면이었다.

    요컨대 김양동은 한마디로 규정할 수가 없는 작가였다. 동양화인지 서양화인지 추상인지 구상인지, 유교인지 불교인지 도교인지, 그림인지 판화인지 글씨인지를 도통 구분할 수 없이 그 모든 것을 한 화면 안에 조화롭게 감싸 안는 전혀 새로운 그림 앞에 나는 전율했다. 자연스러우면서 낯설고 힘차면서 다정하고 편안하면서 뱃속 깊이에서 무언가 끌어올리는 그림이었다.

    그런 게 있을 줄을 전에는 알지 못했다. 흔히 내공이라고 말하는 그 무엇, 그 공력의 힘이 화면 안에서 내게로 옮겨오는 듯한 기분이었다. 필획의 힘 때문인지 토채의 깊은 색깔 때문인지 곁에 씌어진 문자의 의미나 주술 때문인 지 알 길 없었다.

    알고 보니 김양동은 화가라기보다 서예가였다. 38년째 맹렬하게 붓글씨를 써온 사람이었고 현직도 계명대학교 서예과 교수다. 서예과는 김양동 이전에는 없던 학과였다. 그가 미술대학 안에 서예과를 만들어야 한다고 여기저기 탄원하러 다녔고 시작한 지 5년 만인 1989년, 국내에서 처음으로 원광대학에 서예과가 생겼다. 그 과를 탄생시킨 주인공이 바로 그였다.

    대학에 학과가 생긴다는 것은 연구가 심화된다는 것이고, 학풍이 생겨난다는 것이고, 체계적으로 전문가를 길러낼 수 있다는 의미다. 처음엔 원광대학으로 갔다가 몇 해 후 고향 인근 대구의 계명대학에 서예과가 생기자 그리로 옮겨갔다. 중·고등학교 국어교사에서 대학교수로 점핑한 것이 모조리 스스로 주춧돌을 놓고 기둥을 세우고 대들보를 올린 일이었으니, 그가 교수가 된 사연은 가히 입지전적이다.

    자장면 만들던 때

    중학 졸업 후 무작정 대구로 나간 그는 진학하지 못하고 중국집에 취직한다. 배달은 부끄러워 주방일을 맡았다. 자장면을 수준급으로 만들 줄 알게 될 무렵 시내로 배달을 나갔다가 중학 때 라이벌이던 친구 송희칠을 만난다. 송은 교복을 입고 책가방을 들고 걸어가며 영어 단어를 외느라 그를 지나쳐갔다. 중국집으로 돌아온 그는 얼굴에 불을 부은 듯했다.

    김양동은 포부가 크고 총명한 소년이었다. 중학 때 ‘운현궁의 봄’같은 소설을 읽으면 단번에 줄줄 외워버려 동네 할머니들이 이야기를 들으려고 자꾸만 불러댈 정도로 명석했던 소년이 중국집 배달원이 됐으니 자존심이 어떠했을까. 밤새 뒤척대다가 결심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공부를 계속하자! 길은 없지 않았다. 야간고등학교로 진학한다. 그리고 마침내 경북대 국문과로 진학해 대학생이 되었다. 읽고 싶던 책을 원 없이 읽을 수 있어 행복했고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시골 어머니를 모셔와 함께 살 수 있어 더욱 의기양양해졌다. 그 모든 것이 그날 자장면 가게 앞을 지나간 친구 송희칠의 은공이었다고 그는 통쾌해한다(그 친구 송희칠은 나중에 철학과 교수가 됐다).

    서예에 입문한 건 27세 때였다. 시골 고등학교 국어교사를 거쳐 배치고사에 합격해 서울로 입성한 직후였다. 우연히 신문회관에서 열리는 철농 이기우 선생 전시회 포스터가 눈에 띄었다. 찾아가봤다. 동경하던 세계가 거기 있었다. 문하가 되겠다고 선생 댁으로 찾아갔다.

    제 발로 글씨 배우겠다고 찾아온 사람은 처음이라고 사모님이 신기해하셨던 게 기억난다. 철농 선생에게 서예와 전각을 배우는 한편 청명 임창순 선생과 우전 신호열 선생에게는 고전강독을 배웠다. 1970년대는 임창순 선생의 태동고전연구소로 찾아갔고 80년대는 신호열 선생의 사간동 강학실로 나갔다.

    박물관에 다니면서 유물을 보고 관계서적을 읽고 개인 소장품이나 문중의 전적들을 적극적으로 접하면서 글 보는 안목을 길렀다. 유물을 놓고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던 스승으로는 예용해 선생이 있었다.

    “정초에 예용해 선생께 세배를 가면 최순우 선생을 뵐 수 있었어요. 두 분이 골동을 앞에 두고 담소하시는 것을 듣는 것이 참 좋은 공부가 됐지요.”

    이렇게 형성된 안목과 실력으로 문화재 전문위원이 되고 문예진흥원에서 매년 발간하는 예술연감 중에서 서예 부분에 관한 평론을 썼다. 그러면서 서예평론가라는 호칭을 얻지만 빤한 동네에서 얼굴을 마주대는 사람들의 작품을 비평한다는 게 쉽지 않아 그런 글을 쓰지 않기로 작정했다.

    53세, 파격의 첫 전시

    그가 첫 전시회를 연 것은 나이 53세 때였다. 일부러 그 나이 되기를 기다렸다. 만 26세에 시작한 글씨를 만 26년간 써온 지점, 그쯤이 돼서야 남에게 펼쳐 보일 자기세계가 만들어질 수 있으리라 여겼다.

    “서예를 처음 시작할 때 서예가가 되려고 한 게 아니었어요. 그저 선비의 교양으로 필요하다고 여겼을 뿐이에요. 보수적인 유교 풍토가 강한 안동, 의성 지방에서는 다들 그렇거든요. 지금 생각하면 철농 선생과의 만남도 운명이지요. 그전까지는 전각이 뭔지도 몰랐어요. 정한숙 교수가 쓴 ‘전황당 인보기’라는 소설 속에서 고독한 전각가가 남이 알아주지도 않는 작업에 심취하던 얘기를 읽은 적이 있을 뿐….

    다른 흥미를 가질 마땅한 대상이 없어서 글씨를 썼다는 편이 맞을 겁니다. 글씨가 돈도 안 들고 혼자 할 수도 있으니까…. 글씨 쓰는 재주로 따지면 나는 중간밖에 못 갈 겁니다. 범재지요. 실은 재주가 특출한 것도 좋지 않아요. 글씨란 그저 자기가 살아온 만큼만 담겨지는 거거든요…. 재주가 너무 빼어나면 속되기가 쉽지요. 예로부터 공부가 안 되는 놈이 글씨를 쓴다는 말이 있었어요. 학문은 도를 향한 것이고 글씨는 술(術)이니 술이 도를 방해한다고 이해했던 겁니다.

    글씨의 조형은 담는 그릇일 뿐이에요. 그릇보다 담기는 내용이 중요한 거지요. 글을 읽고 사유가 깊어지고 그래야 좋은 글씨가 나오는 거지 글씨 연습만 한다고 되는 게 아니지요. 중국 용어에는 형신(形神)이라 해서 조형(형태)과 사유(정신)를 구분하는 말이 있어요.”

    53세 나이에 맞춰 처음으로 53점의 작품을 내걸었다. 기존의 서예작품과는 전혀 달랐다. 유불선이 혼합되고 각서화(刻書畵)가 혼융된 드라마틱한 화면이었다. 서예가 외면받는 현실에서 이미 있던 것만을 고집해서는 돌파구가 없다고 생각했다.

    “일부러 서예와 그 밖의 요소를 혼합했어요. 서예는 문자적 조형미가 뛰어나지만 자갈이 많은 자갈밭에서는 여간해서 돌의 개별적 존재가 눈에 띄지 않으니까…, 보다 효과적으로 서예의 본질을 전할 작품을 만들려고 고심했지요.”

    이 첫 전시에서 그는 자기의 공부를 유감없이 펼쳐 보인다. 에둘러 말하지도 않았다. 직설화법으로 화면 가운데에다 빛살무늬를 좍좍 그려넣고 아래 위로 글씨를 써넣었다. 초등학교 아이들이 봐도 확연하게 알 수 있게!

    ‘신의 순수한 고유어는 살이다’ 혹은 ‘신석기시대의 빛살무늬는 태양숭배를 사유의 원형으로 하는 고대 동이족들의 상징부호이다. 따라서 이것은 인간이 남긴 최초의 언어이며 한국미의 원형질로서 필획의 시초이기도 하다’라고 썼다.

    그림의 끝에는 ‘무슨해 무슨날 근원(近園)이 새기고 찍고 쓰다’라고 사인했다. 근원은 그의 호다. 월북한 근원 김용준을 알기 전에 철농 선생이 지어줬는데 원래의 槿을 나중에 정곡 선생이 近으로 바꿔주셨다. 대학에 나오는 근도(近道)에서 따온 글자로, 서예가 도라면 거기에 가까워지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마인드 콘트롤하자는 의지가 담겨 있다.

    전각을 하다보니 자연히 문자학에 관심을 가지게 됐고 문자학을 거슬러 올라가다보니 자연히 상형과 회화의 세계를 만나게 됐다. 상형의 세계는 원초적인 언어표현이었다. 4000~5000년 전 사람들과 대화하는 기쁨과 묘미를 알게 됐다. 중국 암각화나 신석기 도기 파편에 나타난 부호들을 통해 서와 화가 동원(同源)임을 실감할 수 있었다. 서예가가 화가가 되는 것은 이렇게 자연스러운 순리였다.

    詩, 書, 畵의 순서대로

    최근 경주 화가 박대성에게서 “시서화라는 말의 순서가 괜히 생긴 게 아니다”라는 말을 들었다. 시(詩)가 익으면 서(書)가 되고 서(書)가 익으면 절로 화(畵)가 된다는 것인데 김양동 선생이야말로 시와 서의 등성이를 넘어 화에 다다른 사람의 전형이 아닐 건가.

    그는 그림의 기법 또한 기존의 것을 쓰지 않았다. 도자기 판과 낡은 한지를 사용해 마티에르를 살리는 ‘떠냄’법을 썼다. 그 위에 흙빛을 칠해 토기 빛깔을 그대로 시늉했다. 옥수수 껍질이나 지푸라기를 붙여 자연스럽게 소재를 확장했다. 그림 곁에는 한글 시도 쓰고 한시도 쓰고 사서삼경도 쓰고 불경도 썼다.

    “작업과정은 이래요. 먼저 도자기 만드는 흙으로 된 도판을 준비합니다. 그 위에 제가 구상해놓은 그림을 스케치하고 새깁니다. 그리고 그 도판을 초벌구이 하지요. 구워낸 도판을 아래에 놓고 그 위에 고지를 놓아 눌러서 탁본하듯 떠냅니다. 이렇게 하면 원래 구상했던 그림이 드러나고 선의 요철이 생기지요. 다음 종이가 바짝 마르기를 기다렸다가 글씨를 쓰고 색을 칠해요. 그 위에 그림을 덧그릴 수도 있고요. 그림이나 글씨를 쓰기 전에 황토나 회토를 바르면 또 전혀 다른 맛이 나지요. 나중에는 그 글씨나 색깔을 다시 지우기도 하고…. 과정이 복잡해서 완성하는 데 한 3개월 걸립니다.”

    그의 집에서 벽에 세워진 숱한 도판을 봤다. 그 도판 안에 우리 신화와 역사와 문화의 원형이 몽땅 들어 있었다. 춤추는 고구려인과 활쏘는 무사와 단군왕검과 관세음보살과 삼족오와 항아리와 기와집과 봉황과 석가모니 부처와 강강수월래가! 도판에 찍어낸 고지들도 엄청났다. 보는 것만으로 엄청난 시간이 걸릴 만큼 꾸준한 작업이었다.

    종이는 오래 묵은 한지를 쓰는데 질기고 빛깔 또한 자연스러워 애호한다. “한지에 생긴 쥐오줌 같은 것이 되레 재미있어요. 토채를 칠하면 흠이 되지 않고 화면에 고태가 물씬 풍기거든요.”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한 것은 그의 작업을 떠받치는 큰 힘이 된다. 작품에는 상상력이 가장 중요한데 돌아보면 청년시절 국문과에서, 특히 김춘수 선생에게 시를 배운 것이 그의 감성의 촉수를 예민하게 훈련해준 것같다.

    “내게 작가적 상상력이 있다는 걸 발견한 게 한 20년 전쯤일 겁니다. 남과 똑같은 작업을 하기는 싫었어요. 국립현대미술관 초대작가전에 출품하면서 명도전 모양에 법고창신이란 글을 썼지요. 그후 연암 박지원 글에서 따온 ‘법고이지변 창신이능전’이 내 좌우명이 됐습니다. 옛것을 본받더라도 오늘에 맞게 변화시킬 줄 알고 새것을 만들더라도 법도에서 어긋나지 않게 하라는 뜻이지요. 당시 월전 선생이나 일중 선생도 앞으로 서예도 이렇게 변해야 한다고 내 작업을 지지해주셔서 힘이 났던 기억이 있어요.”

    절로 터져 나오는 예술

    취미는 골동 감상이다. 이야기가 담긴 유물들을 수집하는 데도 재미를 들였다. 그의 집 서가 모퉁이에서 깨진 기왓장을 여러 개 발견했다. 기왓장엔 그의 독특한 필체로 언제 어디서 주웠는지가 적혀 있었다. 부서진 기왓장이 그의 글씨로 인해 아연 생동감을 얻는 것을 나는 신기하게 들여다봤다.

    고대의 토기들이 얼마나 현대적인 조형미를 가지는 것인지를 나는 김양동 선생의 안내로 탄복해가며 구경했다. 4000년 전의 토기들과 점토 인물판으로 그는 새로운 작업을 준비 중이다. 내년이 정년이지만 그는 아직 청년이다. 샘 솟는 아이디어로 눈에 광채가 도는 청년. 교수직을 퇴임하고 시간이 많아지면 한 10년 본격적으로 틀어박혀 그동안 구상했던 작업들에 매달릴 예정이다.

    “예술은 만드는 게 있고 절로 터져 나오는 게 있어요. 만드는 것은 한참 보면 싫증이 날 수 있지만 터져 나온 것은 볼수록 새롭고 좋지요.”

    김양동 계명대 서예과 교수
    김서령

    1956년 경북 안동 출생

    경북대 국문과 졸업

    중앙중 교사, ‘매일경제’ 신문·‘샘이깊은물’ 객원기자

    월간 ‘동서문학’ 신인상

    저서 : ‘김서령의 가’


    오랫동안 연찬해온 전각, 한자를 해독하는 힘, 문학에 대한 식견, 신화적 상상력, 고대 문화와 금석학에 대한 깊은 탐구, 이것이 김양동의 내공이다. 그리고 그 내공이 절로 터져나오는 것이 그의 글씨고 그림이다.

    자신의 말대로 김양동의 작품은 들여다볼수록 새롭고 좋을 수밖에 없다. 그의 거실 벽에 걸려 있는 글귀가 요 며칠 내 머릿속을 줄곧 맴돈다. ‘관서통선(觀書通禪)’, 글씨는 쓰는 것도 보는 것도 결국은 선(禪)에 닿기 위함이든가. 그 선은 옛 토기의 빛살무늬 안에 수천년을 고요히 숨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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