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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리 기자의 사람 속으로

목숨을 내놓고 춤을 얻다

대한민국 발레리노의 자존심, 이원국

  • 글: 이나리 byeme@donga.com

목숨을 내놓고 춤을 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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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무 살을 기점으로 극과 극을 달리한 삶. 부산 사내의 기질과 발레리노의 감수성이 부대끼며 빚어내는 불협화음. 한국 발레 역사를 다시 쓴 ‘영원한 왕자’ 이원국의 춤인생.
목숨을 내놓고 춤을 얻다
그와의 대화는 쉽지 않았다. 말은 종종 끊어지고 시선은 자꾸 비켜갔다. 순간순간 그는 딴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쩌면 ‘생활하는 사람’이 아닌 것도 같았다. 무작정 한 길만 달려온, 그렇게 늘 자신을 바닥까지 소진해버려, 자잘한 감정이나 속생각을 말로 표현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사람인 것처럼도 보였다.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 이원국(37). 그의 ‘속세 체험’을 스무 살 어느 여름날까지로 마감 짓게 한 것은 발레다. 1986년 6월1일, 그는 7년 간의 아픈 방황의 시간을 접고 발레라는 신(神) 앞에 종신서원을 했다. 과장이 아니다. 그는 정말 자신을 ‘버렸다’. 한국 발레리노의 교과서, 한국 발레 부흥의 변곡점은 그렇게 탄생했다.

무용평론가들은 이원국을 두고 ‘한국 발레 역사를 다시 쓴 무용가’ ‘한국 발레는 이원국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한국 발레의 이정표’ 등의 극찬을 아끼지 않는다. 실제로 ‘테크닉, 그 이상의 테크닉’을 구사하는 그의 등장으로 우리 발레는 레퍼토리 확대와 대중성 확보에 획기적인 전기를 맞았다. 그는 팬클럽을 갖고 있는 우리나라의 유일한 발레리노이며 명실상부한 슈퍼스타다. 그의 출연 여부에 따라 같은 국립발레단 공연이라도 관객 동원에 큰 차이가 나기도 한다.

1995년에 러시아 키로프발레단, 1995~96년에는 루마니아 국립발레단의 객원 주역으로 활약했다. 1999년에는 루마니아 국립클루즈오페라발레의 객원 주역이 됐다. ‘세계춤 2000 월드스타 갈라공연’에서 줄리 켄트, 이렉 무하메도프 등 세계적 무용가들과 어깨를 나란히하기도 했다.

1989년 동아무용콩쿠르 대상을 시작으로 1992년 불가리아 바르난 국제무용콩쿠르 화이널리스, 1997년 한국발레협회상 당쉬르 노브르상, 1999년 평론가가 뽑은 무용예술상 무용가상, 문화관광부 장관상, 2000년 문화관광부 젊은예술가상 등을 수상했다. 2001년에는 세계 3대 콩쿠르 중 하나인 모스크바 국제발레콩쿠르에서 ‘베스트 파트너상’(비출전자이나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수여)을 수상해 화제를 모았다. 서른일곱. 발레리노로서는 환갑 진갑을 다 넘긴 나이에 그는 여전히 대한민국 최고의 발레리노다. 지난 10년간 그랬던 것처럼.

격렬한 긴장, 엄청난 에너지

설핏 스쳐가는 봄 냄새가 가슴을 꼭 쥐었다 놓는 2월 어느 날, 서울 양재동 예술의전당 내의 국립발레단 스튜디오를 찾았다. 남녀 여러 쌍이 연습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를 알아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의 어깨가 가장 넓었고 그의 자세가 가장 우아했다.

“이 사람이 이원국이에요.”

“누가 찾아왔다”고 하자 그는 웬일인지 몸을 뒤로 빼며 슬쩍 다른 발레리노의 등을 떼밀었다. 처음 보는 사이에 웬 장난인가 싶었다. 그런데 표정이 그게 아니었다. 그는 쑥스러워하고 있었다.

“서른일곱이라던데, 이런 꽃미남일 리 없잖아요.”

농담으로 받아치자 비로소 하하 편한 웃음이 터졌다. 연습이 아직 안 끝났으니 좀 기다려달라며 한구석에 의자를 놓아주었다.

그리고 춤이 시작됐다.

팔 다리가 길고 아름다운 발레리나와의 격정적인 파 드 되(2인무)였다. 연습일 뿐인데도 플로어엔 강한 긴장이 흘렀다. 두 사람은 옷이 땀에 푹 젖을 정도로 깊이 몰두했다. 멀리서 보면 그저 가볍고 우아하게만 느껴지는 동작들이, 실은 근육이 파열될 만큼 격렬한 긴장과 엄청난 에너지를 요구하는 고행이란 사실을 처음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보는 이의 몸에까지 절로 힘이 들어가고 숨이 가빠올 지경이었다.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었다. 감정과 표정과 스토리가, 그를 표현해낼 수 있는 연기력, 혹은 테크닉 그 이상의 ‘몸의 언어’가 필요한 듯했다. 그들은 등으로, 손끝으로 말하고 있었다. 춤추는 그 순간만큼은, 둘은 연인이었다.

연습이 끝난 후 탈의실 한켠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는 땀에 젖은 몸을 씻지도 않은 채 가운을 걸치고 앉아 진한 부산 사투리로 질문에 답했다. 성실한 자세였지만 상황의 이면을 엿볼 수 있게 하는 말은 많지 않았다. 부산 남자 특유의 무뚝뚝함일 수도 있겠고, 오래 한 일에 몰두해온 사람의 서투름 혹은 까다로움일 수도 있었다. 저녁으로 짬뽕을 시켜먹었다. 그는 “국물이 정말 맛있다”며 순식간에 한 그릇을 비워냈다.

두 번째 본 날도 그는 춤을 추고 있었다. 국립발레단 최고령 현역이자 명실상부한 대표 발레리노인 그는 나이 어린 단원들의 교사 역할을 겸하고 있었다. 봄풀처럼 싱싱한 10대 후반, 20대 초반의 ‘제자’들 사이에서 그 또한 댓잎처럼 푸르고 강건했다.

지면에 실을 사진을 찍는 동안 그는 또 한번, 당당한 가운데서도 문득문득 수줍음을 타는 이중의 면모를 보였다. 하긴 이중성은 예술로 일가를 이룬 이들의 공통된 특징 아니던가. 이를 이원국에 국한해 말한다면, 스무 살을 기점으로 극과 극을 달리한 삶, 부산 사내의 기질과 발레리노의 감수성이 부대끼며 빚어내는 불협화음에 그 뿌리가 있을 법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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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나리 byem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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