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동아 로고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나의 삶, 나의 아버지

아버지의 독립운동과 나의 두꺼비 축구단|이기준

  • 글: 이기준 한국공학한림원 회장·전 서울대 총장

아버지의 독립운동과 나의 두꺼비 축구단|이기준

1/6
  • 아버지가 서대문과 대전감옥에서 8년이 넘도록 옥고를 치르는 동안 우리 집안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에 시달렸다. 식구들은 뿔뿔이 헤어졌고 어머니는 공장에서 밤늦도록 일했다. 그러나 정작 아버지는 ‘당연히 할 일을 했다’며 국가 포상도 거부했다.
아버지의 독립운동과 나의 두꺼비 축구단|이기준

왼쪽부터 아내 장성자(張誠子), 아버지 송강 이준열 (松崗 李駿烈), 어머니 허정(許柾), 그리고 이기준(李基俊).

우리 집안에는 ‘감옥 이전’ 세대와 ‘감옥 이후’ 세대가 있다. 일본 식민지 시절, 아버지께서 8년간 옥고를 치르기 이전에 태어난 형님과 두 누님, 그리고 그 후에 태어난 나를 구분하는 말이다.

나의 아버지 송강 이준열(松崗 李駿烈)은 1919년, 서울공대의 전신인 경성공전(京城工專, 高工이라고도 부른다) 응용화학과를 졸업한 엘리트 출신이다. 본인이 원했다면 편안하고 여유 있는 삶을 누릴 수 있는 위치에 있었을 것이다. 내가 1961년에 서울대 응용화학부(당시에는 화공과)를 졸업했으므로 아버지는 나의 42년 선배가 되신다.

나는 2차대전 중에 B29 폭격기가 허연 연기를 뿜고 하늘을 가르면서 공습하는 것을 보았고, 우리 민족의 비극사인 6·25전쟁을 겪었으며, 4·19세대로서 대학의 소용돌이와 스튜던트 파워(student power)를 경험했고 5·16쿠데타 직후 군에 입대했다. 얼른 보면 어렵고 변화무쌍한 시절에 인생살이의 기초를 닦은 것으로 보이지만 나의 형님이나 누님들이 겪은 고난의 시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것이다.

아버지는 대학 시절 일본인들에 대항하기 위하여 공대의 한국인 학생들을 규합해 공우회(工友會)를 조직한 뒤 회장을 맡으시기도 했다. 1919년 3월1일에는 33인 대표의 연락을 받아 대학생들을 소집하고 책임자로서 독립만세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탑골공원에서 만세운동 주도

종로의 탑골공원에서 당신은 탑 위에 올라서고 중학생 소집을 맡은 신태악씨는 담 위에서 만세운동을 독려했다는 말씀을 듣고 내가 탑 위에 어떻게 올라 설 수 있었냐고 물었던 적이 있다. 그 때 아버지는 당시 일본인들이 탑을 해체해놓은 상태였기 때문에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고 담담하게 대답하시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아버지는 그 사건 이후 상당기간 충남 아산의 시골집에 피신했다가 평북 의주 왕자제지 공장에 취직이 되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엔지니어의 일을 맡으셨다. 그러나 이내 그 무렵 평양에서 발생한 폭발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고, 석방된 후에도 상해와 만주 등지를 떠돌아다니는 방랑생활을 해야 했다.

아버지는 젊은 인재들을 교육하는 일이 나라의 장래를 위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임시정부 요인들의 뜻을 받아들여 국내에 잠입한 뒤, 동대문 밖 숭인동에서 이른바 고학당(苦學堂)을 개설해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는 학원의 교장 직책을 맡는다. 학생들에게 학비를 받지 않았으므로 전국에서 많은 학생들이 고학당에 모여들었다. 선생님들은 모두 자원봉사자들이었으니 고학당 운영이 당시 아버지에게는 퍽 어려운 일인 동시에 무척이나 보람 있는 일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몇 년 후 일본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한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고학당 사건이 터지는 바람에 아버지는 체포되고 고학당은 강제해산당하는 운명을 맞게 된다. 당시 고학당 학생 중에는 형편이 어려운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이 많았고, 이러한 배경 때문에 사회주의 운동에 뛰어들어 상당한 위치에 오른 사람도 있었다고 들었다.

서대문감옥과 대전감옥에서 수감생활을 하는 동안 아버지는 정치범으로 복역중이던 독립운동가를 여럿 만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옥중에서 독서를 통해 많은 것을 배웠다고도 한다.

그러나 8년이 넘는 아버지의 옥중생활이 우리 집안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을 가져다 주었다. 식구들은 뿔뿔이 헤어져야 했고 어머니는 고무공장에서 밤늦도록 일을 해야 겨우 생활을 꾸려갈 수 있었다.

복역중에 다시는 독립운동을 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하고 일찍 출감한 사람도 있었다고 하나, 아버지는 의롭지 못하다는 이유로 이조차 거절했다는 말씀을 듣고 우리 주변에서 이의를 다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아버지는 신의를 존중했고 이러한 일들과 관련해 국가로부터 포상받는 일조차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다’며 극구 사양하셨다.
1/6
글: 이기준 한국공학한림원 회장·전 서울대 총장
목록 닫기

아버지의 독립운동과 나의 두꺼비 축구단|이기준

댓글 창 닫기

2018/11Opinion Leader Magazine

오피니언 리더 매거진 표지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목차보기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