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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 나의 아버지

‘인색하면 잃고 베풀면 얻는다’ 귓가에 맴도는 개성상인 정신|김우종

  • 글: 김우종 전 덕성여대 교수·문학평론가

‘인색하면 잃고 베풀면 얻는다’ 귓가에 맴도는 개성상인 정신|김우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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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암교 냇가에 있던 그 조그만 집에서 9·28 수복 때 아버지로부터 그런 말씀을 듣기 전날 나는 고향을 떠나 서울로 가서 복학할 생각에 마음이 설레었다. 물론 어서 고향을 떠나고 싶었던 데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숨어 있다가 나와보니 이제는 우리 편(우익)에서 또 설쳐대는 통에 세상은 전보다 더 미쳐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공산 진영에 의한 학살 피해자가 수도 없이 많았는데 이번에는 이쪽에서 똑같은 잔인한 보복과 학살을 시작하고 있는 것 같았다. 도망간 부역자의 집에 살아남은 가족들은 어디론가 끌려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마치 빨갱이들에게 잡혀가서 죽지 않은 것만으로도 죄가 되는 것 같은 세상이었다. 그동안 남하했다가 돌아온 국교(초등학교) 동창생 한 녀석은 옷 속에서 긴 회칼을 뽑아들고 무용담을 자랑하기도 했다. 그 무용담이란 자기가 저지른 민간인 학살의 경험이었다. 그러더니 주사기를 꺼내서 제 손으로 엉덩이에 찔렀다. 페니실린 주사였다. 그는 주사를 찌르면서 여자와 달콤한 키스를 하고 엉덩이를 흔들며 성관계를 갖는 흉내까지 냈다. 그가 그렇게 성병에 걸린 것은 매춘부와의 관계 때문만은 아니었다. 소문에 의하면 그는 도망친 부역자의 집 여인을 학살하기 직전에 반드시 그런 ‘행사’를 치렀다는 것이다.

세상이 완전히 미쳐버린 것이다. 그래서 나는 어서 그곳을 떠나고 싶었다. 그런데 서울로 출발하기 전날 저녁에 아버지는 밖에서 돌아오시면서 내게 편지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우종아, 혹시 모르는 일이니 이걸 가지고 가거라.”

아버지가 내주신 것은 황해도 연안경찰서장이 발행한 신원증명서였다. ‘사상이 온건하고’로 시작되는 그 증명서는 적(敵) 치하에서 절대로 아무런 부역행위도 저지르지 않았음을 확실하게 증명한다는 문서였다.



아버지는 상점 일에만 바쁘신 것처럼 보였지만 우리들에게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시는 편이었다. 특히 좌우대립의 와중에서 그렇게 세상이 미쳐 돌아가고 있을 때에는 부모로서 자식에 대한 보호 본능이 발휘되었던 것 같다. 그때 만들어주신 신원증명서도 그런 마음에 준비하신 것이었을 것이다. 그 신원증명서는 서울로 올라가 복학 수속에 써먹기 전에 이미 서울역에서부터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신원증명서의 위력

서울역에 내리자마자 개찰구에서는 경찰로 보이는 사람들이 젊은이들을 닥치는 대로 심문하고 더러는 다른 데로 끌고도 갔다. 이때 나도 그들에게 걸려서 심문을 받게 되었는데 아버지가 주신 신원증명서를 내밀자 군말없이 놓아주었다. 그 증명서가 없었더라면 어디로 끌려가 무슨 험한 일을 당했을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다음날 동숭동의 학교에 가보니 교문에는 미8군 마크가 붙어 있고 미군 헌병이 서 있었다. 그리고 교문에서부터 지금의 샘터사와 예총 건물이 있는 냇가를 따라서 학교 전체를 빙 둘러 철조망이 쳐져 있었다.

복학 수속을 위한 심사를 받기 위해 학교 뒤 관사에 마련된 심사장을 찾아 갔더니 ‘공산 치하에서 뭘 했느냐’는 것부터 물었다. 고향에 내려가서 숨어 지냈다고 했더니 이내 그걸 증명하라는 것이었다. 내가 고향에서 뭘 했는지 알고 싶다면 그들이 내 고향에 가서 조사할 일이지 내가 어떻게 그걸 증명한단 말인가?

할 수 없이 나는 아버지가 주신 연안경찰서장의 신원증명서를 내밀었다. 그러자 더이상 아무것도 물어보려고 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만들어주신 종이 한 장이 두 번째로 위력을 발휘하는 순간이었다.

며칠 후 심사 결과를 보러 갔는데, 그곳에는 훗날 유명한 소설가가 된 박완서씨가 있었다. 입학 직후에 잠시 연구실이나 강의실에서 본 적이 있는 우리 국문과 신입생 중의 하나였기 때문에 기억에 남아 있었다. 그런데 나는 심사에 통과했지만 그녀는 불합격 판정을 받아 고개를 떨구고 저쪽으로 힘없이 걸어가고 있었다. 끔찍한 세상에서 어렵게 살아남아서 만나게 된 유일한 동창생인 데도 나는 부끄러워 말을 걸지 못하고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후 꼭 20년이 지난 1970년에 나는 박완서씨를 다시 만났다. 그녀는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에 ‘나목(裸木)’을 응모해서 화려하게 등단했는데 그때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나는 박씨의 작품을 최고작으로 뽑겠다고 주장했고 다른 두 분의 심사위원은 다른 작품을 당선작으로 뽑겠다고 주장한 끝에 ‘나목’이 2대1의 표차로 탈락하고 말았다. 그러나 나는 심사 결과 재검토를 주장했고 결국 당선작을 뒤집어놓고 말았다. 2대1로 낙방한 심사결과를 뒤집어놓은 일은 전무후무한 일일 것이다. 그러면서도 나는 그 여자가 그때의 박완서인 줄은 전혀 몰랐었다. 20년의 세월이 흘렀고, 그 여자는 그냥 살림집 아줌마의 모습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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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우종 전 덕성여대 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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