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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 나의 아버지

“군부독재 위해 일하는 그 날부터 너는 내 아들이 아니다”|김정원

  • 글: 김정원 세종대 석좌교수 kimjw02@sejong.ac.kr

“군부독재 위해 일하는 그 날부터 너는 내 아들이 아니다”|김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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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9년 광주학생운동에 참여하면서부터 아버지의 삶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미국 생활 중에는 박정희 정권에 반대해 백악관 앞 시위를 주도했고 80년 신군부와도 타협하지 않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아버지는 타고난 시인이자 낭만주의자였다.
“군부독재 위해 일하는 그 날부터 너는 내 아들이 아니다”|김정원

5남2녀와 함께 찍은 가족사진. 가운데 앉은 이가 아버지 김순현씨. 뒷줄 맨 오른쪽이 필자.

“아버지.”원고 청탁을 받고 20년 만에 소리 내어 아버지를 불러보았다. 지금이라도 저 문을 열고 당당하게 걸어들어오실 것 같은 아버지. 순(順)자, 현(鉉)자를 쓰시는 나의 아버지는 자구마한 체구지만 태산 같은 정신력을 지닌 분이었다. 교육자, 언론인, 시인이자 민주화운동가로 한평생을 용감하게 살아가신 분이셨다.

증조부께서 충청도를 떠나 전라도 군수로 부임하시면서 우리 집안은 잠시 전라도 땅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아버지는 경술국치의 해인 1910년에 8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나 전라도에서 유년기를 보내셨다. 친구분들에 따르면 아버지는 학창시절 축구선수와 달리기선수로 이름을 날렸다고 한다. 키는 크지 않았지만 스피드와 투지가 뛰어나 상대편을 교란시키는 능력이 대단했다는 것이다. 내가 올림픽 국가대표 빙상선수 후보로 선발되었을 때 아버님 친구들은 모두 부전자전(父傳子傳)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1929년 일본 제국주의에 항거하는 광주학생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면서 아버지의 삶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광주학생운동은 일본인 중학생의 한국 여고생 희롱사건을 계기로 격투가 벌어진 데 대해 경찰과 일본 신문이 일방적으로 일본 학생을 편든 데서 비롯되었다. 11월3일, 일본 국경일인 명치절에 신사를 참배하고 돌아오는 일본인 학생과 한국 학생들 사이에 격투가 벌어졌고, 한국 학생들이 광주일보사를 포위, 윤전기에 모래를 뿌리는 등 왜곡보도에 항의하면서 운동은 본격화되었다.

‘국가 없이는 아무것도 없다’

시위는 곧 광주 역전으로 번져 그곳에 모여 있던 한·일 학생간, 교사간의 충돌로 이어졌고 마침내 한국인 대 일본인의 조직적인 투쟁으로 확대되었다. 결국 일제당국은 임시 휴교조치를 내리고 주동자 체포에 나서 수십 명을 검거했다. 아버지도 수배대상이 되어 상당기간 도피 생활을 했다. ‘국가 없이는 아무것도 없다’는 아버지의 가치관이 형성된 것도 이때였다. 아버지는 이후 광주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적을 이기기 위해서는 적을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혈혈단신 일본 유학길에 올라 일본 중앙대학에서 교육학을 공부하고 돌아오셨다.

귀국 후 어머니를 만나 서울에서 가정을 꾸리신 아버지는 엄격한 가정교육이 자녀교육의 토대라는 신념을 갖고 이를 직접 실천하셨다. 우리 형제들은 덕분에 하루도 빼놓지 않고 기상시간을 지켜야 했다. 물론 늦잠도 허용되지 않았다. 종로에 있는 교동초등학교에 입학한 뒤로 새벽 6시면 어김없이 일어나야 했다. 조금이라도 늦잠을 잘라치면 아버지께선 내 방문을 열어젖히고 “이 녀석, 어서 일어나지 않고 무얼 하느냐”시며 이불을 걷어냈다. 북풍한설이 몰아치는 엄동설한에도 아침 6시 기상원칙은 달라지지 않았다.

나와 동생들은 기상과 동시에 이불을 개고 차가운 물에 걸레를 빨아 책상을 닦았다. 그리고 방 청소를 깨끗하게 마치고 세수를 한 다음에야 아침식사를 할 수 있었다. 어떤 때는 우물물이 얼어 있어 두레박으로 얼음을 깬 뒤 얼음조각이 둥둥 떠 있는 물을 길어 걸레를 빨기도 했다. 그럴 때면 추운 겨울날 일찍 일어나는 것이 너무나도 싫었다. 그러나 청소를 마치고 나면 장남이었던 나는 아버지와 단둘이 겸상을 하고 아침식사를 할 수 있었다.

인두 들고 달려온 아버지

예나 지금이나 고등학교 3학년들은 졸업 때가 되면 머리도 기르고 학생티를 벗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나도 예외가 아니었다. 경기고 3학년 당시 졸업이 다가오면서 머리를 약간 기른 적이 있었다. 물론 학교에서도 문제 삼지 않았고 모자를 쓰면 눈에 띄지도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아버지께선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으셨다. 학생이면 졸업하는 순간까지 학교 규정을 지켜야 하는데 규칙을 어기고 머리카락을 기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었다. 벌겋게 달구어진 인두를 들고 와서 머리를 밀어버리겠다고 호통을 치시던 아버지. 나는 곧바로 이발소로 달려갈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늘 원칙을 강조하셨다. 규율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아무리 지식이 많더라도 소용이 없다는 말씀을 입버릇처럼 되풀이하셨다.

특히 5남2녀 중 장남인 내게는 유난히 책임감을 강조하셨다. 지방에 계셨던 할아버지가 올라오셨을 때라야 겨우 할아버지 손을 붙잡고 재미있는 구경거리도 보러가고 마음껏 어리광을 부렸던 기억이 난다. 할아버지는 말년에 전재산을 학교에 기부할 정도로 의지가 강한 분이셨지만 나에게만큼은 세상에 둘도 없이 너그럽고 인자한 분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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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정원 세종대 석좌교수 kimjw02@sejo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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