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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 나의 아버지

‘록백꾸’ 몇 판 쳐드려야 “그만 나가 놀아라”|조영남

  • 글: 조영남 가수

‘록백꾸’ 몇 판 쳐드려야 “그만 나가 놀아라”|조영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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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는 성묘를 가지 않는다. 내 아버지나 엄마가 그까짓 성묘에 오고 안 오고를 따질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교회보다 대폿집을 더 좋아한 조승초씨나 가짜꿀 만들어내던 김정신 권사님은 성묘를 하면 효자, 성묘를 안 하면 불효자로 여길 만큼 쫀쫀한 사람들이 아니다.
‘록백꾸’ 몇 판 쳐드려야 “그만 나가 놀아라”|조영남

아버지와 내가 함께 찍은 유일한 사진. 나보다 궁상스럽게 보이는 동생 영수(가운데·부산대 음대 교수)가 지금은 휠씬 잘 생겼다.

나 의 삶과 나의 아버지에 관해서 말해보라니 그저 한숨만 나온다. 별로 할말이 없기 때문이다. 내 아버지의 삶은 한마디로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아비는 선각자였느니라’ 하는 멋진 표현이 있지만 내 아버지는 그런 칭호를 받을 만한 인물이 애당초 아니었다.

입장을 바꿔 지금 미국 뉴욕에서 대학에 다니는 아들녀석에게 ‘대답하라, 네 아버지는 선각자가 아니었더냐’고 묻는다면? 글쎄다. 일찍이 조강지처를 버리고 집을 나간 점, 아이들을 오로지 엄마 밑에서만 크게 했던 점, 뭐 이런 허물 몇 가지만 덮어준다면 지 애비를 어느 정도 선각자로 인정할지도 모른다. 지 애비가 평생 누린 가수로서의 명성을 봐서라도 말이다.

그러나 내 아들녀석에게 ‘정직하게 대답하라! 네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었는가?’고 묻는다면 아들녀석은 거침없이 대답할 것이다. ‘최악이었습니다. 웬수였습니다!’ 이렇게 되면 아래위로 피장파장이다. 나는 내 아버지를 우습게 보고 내 아들은 나를 우습게 보고 내 아들의 아들은 내 아들을 우습게 보고…. 흡사 ‘나의아버지가나의곁에서조을적에나는나의아버지가되고또나는나의아버지의아버지가되고…’로 시작하는 시인 이상(李箱)의 오감도(烏瞰圖)식 패턴을 방불케 한다.

이렇듯 내 자신이 자타가 공인하는 아버지 자격상실자임에도 나는 뻔뻔스럽게 내 아버지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뭔가를 털어놓아야 한다. 임시로 그럴 수 있는 자격을 ‘신동아’에게서 부여받았다. 그렇다면 앞으로 몇 페이지에 걸쳐 내 아버지는 나의 포로며, 나의 인질이다. 아버지를 죽일지 살릴지 생사여탈권이 내 붓끝에 달렸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의기양양하다.

아버지가 선각자였다고?

내 아버지에 대한 기억의 부피는 참으로 옹색하다. 다 합쳐봐야 3분짜리 기록영화 한편이 될까말까다. 반신불수의 몸으로 가마니때기 위에 기약도 없이 쭈그리고 앉아 계시던 내 아버지! 그게 전부다.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중풍으로 병석에 누우신 아버지는 대학생이 될 때까지 단 한 번 일어서 보질 못하고 세상 같지도 않은 세상을 마감했다.

아버지가 병에 걸릴 걸 미리 알았더라면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나마 정신을 바짝 차리고 유심히 아버지를 관찰했을텐데…. 아버지는 예고도 없이 너무나도 일찍 아버지의 역할을 중단해버렸다. 따라서 내 아버지 조승초씨의 삶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된다. 중풍 걸리기 전과 중풍 걸린 이후의 삶이 그것이다. 아주 간편하다. 중풍 전에는 별 특징 없는 보통사람이었고 중풍 후에는 주욱 치유 불가능한 신체불구자였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부터 아주 어린 시절의 덜 성숙된 기억들을 더듬더듬 주워모아야 한다. 기억이란 원래 희미하고 뿌연 것인데 그걸 또 언어나 문자로 옮기다 보면 새로 꾸며낸 공상소설 되기가 십상이다. 공상소설이라도 잘만 쓰면 좋으련만 걱정이 태산이다.

지금은 이북의 수도인 평양 근교 안악인가 하는 어느 고장 박천 조씨(朴川 趙氏)집 3남매 중 막내였던 조승초 청년은 총각 시절 평양시내 기림리 근처의 제법 유명한 냉면집 외동딸을 만나 혼인을 하게 된다. 조승초 청년의 색시가 바로 나의 어머니 되는 김정신 권사님이다. 김혜길이라는 이름도 따로 있었는데 왜 이름이 둘인지는 자세히 안 물어봐서 모른다. 냉면집 어른, 따지고 보면 한번도 본 적이 없는 내 외할아버지가 보시기에 시골서 땔나무를 등에 지고 와서 팔고 가는 청년이 꽤 괜찮았는지 무남독녀 외동딸을 덜컥 줘버린 형국이었다.

아홉 명 중 넷은 일찍 죽고

그후 조승초 김정신 두 사람은 일심동체가 되어 자식을 무려 아홉이나 낳았다고 한다. 나는 두 분의 특이한 업적을 십분 이해한다. 두 사람이 아홉 명의 자식을 만들어내다니…. 일제 말기라서 변변한 취미생활이 없었다는 증거일 터다. 물론 그중에 넷은 일찍 죽었다. 당시는 몇 명씩 죽는 게 관례였었다고 한다. 나는 나머지 다섯 중에 넷째였다. 지금 부산대학교 선생인 내 동생 조영수가 막내다.

우리 부모는 황해도 남천이라는 곳에 포목상 철물상 목재상을 겸한 ‘계림상회’라는 간이백화점을 세우고 남부럽잖게 살다가 6·25동란이 터지자 빨갱이세상이 싫어 소위 1·4후퇴 때 삼팔선 이남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을 거둔다. 아! 그때 내 부모가 날 데리고 이북을 탈출하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쯤 보나마나 아오지탄광에서 곡괭이질을 하고 있을 것이다. 뻔하지 않은가. 일단은 인민가수로 올라가지만 말을 막하는 고질병 때문에 일찍이 반동분자로 끌려갔을 것이었다. 하여간 내가 태어난 장소는 황해도 남천이다. 세간에 알려진 충청도 삽다리는 그러니까 제2의 고향이다.

주민등록증에는 내 출생년도가 1944년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그게 도무지 정확하질 않다. 아버지가 얼결에 피난 내려와 서울 성북동사무소에 새로 신고를 하면서 자식들의 출생년도를 대충대충 적어넣었기 때문이다. 어머니와 큰누나의 주장은 내가 1945년 해방둥이라는 거다. 어머니는 독립만세 소리가 울려퍼질 때 핏덩어리인 나를 안고 어디론가 뛰어간 기억이 생생하단다. 그러니까 나는 1944년과 1945년 중간쯤에 태어났을 가능성이 높다. 4월2일이라는 생일도 아버지가 지어낸 가공의 날짜라는 주장이며 그게 음력인지 양력인지 아무도 모른다. 미안하지만 그런 걸 생판 모르는 채 나는 지금껏 잘 살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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