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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 나의 아버지

‘줄서지 마라’ ‘돈받지 마라’ ‘술자랑 마라’ 평생 가슴에 새긴 아버지의 ‘공직 3戒’|고건

  • 글: 고건 전 국무총리

‘줄서지 마라’ ‘돈받지 마라’ ‘술자랑 마라’ 평생 가슴에 새긴 아버지의 ‘공직 3戒’|고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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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항상 ‘이쪽’ 아니면 ‘저쪽’으로 쏠리기 쉬운 사람의 마음과 세상의 흐름 속에서 중용과 평형을 찾아내고 화이부동(和而不同)하며 원융회통(圓融會通)을 이루는 것, 이런 마음가짐 속에서 나와 만년의 아버지는 무언으로 통했다. 세상이 소란하고 앞이 안 보일수록 아버지가 안 계시다는 사실이 나를 더욱 허전하게 만든다.
‘줄서지 마라’ ‘돈받지 마라’ ‘술자랑 마라’  평생 가슴에 새긴 아버지의 ‘공직 3戒’|고건

내장산에 칩거하면서 집필에 몰두하시던 1991년 당시 아버지 故 고형곤 박사.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벌써 반년이 되어간다. 모두들 호상(好喪)이라고 했다. 아흔아홉의 백수(白壽)를 누리면서 끝까지 맑은 정신을 간직하다 돌아가신 점이 그렇고, 철학으로는 동양과 서양을, 생활에서는 정치와 참선을 두루 경험한 남다른 인생경로를 놓고도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많았다. 맞는 말이다. 참으로 복 받으신 분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를 여읜 자식의 서운함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요즘도 늘상 아버지가 떠오른다. 시국이 어수선할 때, 어떤 것이 옳은 길인지 판단이 잘 서지 않을 때면 더 그렇다. 아버지라면 이럴 때 어떻게 판단하셨을까. 그만큼 아버지는 일생을 통해 나를 일깨워주셨다. 때로는 비판하고 때로는 조언을 주시며 항상 버팀목이 되어주셨던 최고의 자문역이자 의논상대였다.

아버지는 전북 임피(지금의 군산시 근교)의 농촌에서 태어나 서당을 다니시다가 뒤늦게 신교육을 받았다. 만학도였음에도 5년 만에 임피보통학교와 이리농림학교를 끝내고 경성제대(京城帝大) 철학과에 입학한 걸 보면 상당히 총명하셨던 모양이다. 형편이 넉넉지 못해 아버지는 가정교사를 하면서 어렵사리 대학을 마쳤다. 문재(文才)도 있으셨던지 ‘머슴 문성이’라는 단편소설로 신춘문예에 당선됐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졸업 후 동아일보 기자가 되었다.

‘옆집의 작은 악당, 경이·건이’

동아일보에서는 이광수 선생 밑에서 편집부 일을 하셨다고 한다. 그 시절 아버지는 고하 송진우(古下 宋鎭禹) 사장의 각별한 사랑을 받으셨다는데, 어릴적 와우산 아래 작은 집에서 도포 입은 송진우 사장을 본 기억이 있다. 돌아가시기 전에도 아버지는 고하 선생의 기일이면 어김없이 노구를 이끌고 추모의 정을 표하러 가시곤 했다.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아버지는 철학 선생님이었다. 내가 태어날 무렵부터 아버지는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셨다. 그래서 내 어린 시절의 기억은 대부분 연세대 부근에 머물러 있다. 한때는 서강 와우산 아래에서 살았고 한때는 신촌 안산 아래에서 살았다. 내가 신촌의 창천초등학교를 다닌 것도 그 때문이다.

당시 우리 형제는 장난이 심했던 것 같다. 와우산 집 옆에는 아버지와 연전(延專) 동료인 이양하 교수가 살았는데, 당시 네 살, 두 살배기였던 나와 우리 가형(家兄)이 아버지와 무척이나 절친했던 이 친절한 옆집 아저씨를 꽤나 들볶았던 모양이다. 훗날 중학교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던 이양하 교수의 수필에 나오는 ‘옆집의 작은 악당, 경이·건이’가 바로 우리 형제 얘기다.

당시 아버지는 내게 무척 자상한 가정교사였다. “이게 뭐예요, 저게 뭐예요?” 하며 끊임없이 이어지는 질문에 짜증 한번 내는 일 없이 차근차근 설명해주셨다. 때때로 “이게 뭘까, 너 아니?” 하고 오히려 질문을 유도하기하셨다. 오죽하면 학교에서 선생님께 질문한다는 것이, 손을 들고는 “아버지이~!” 하고 운을 떼는 바람에 반 아이들의 놀림감이 되었을까.

이 시절 또 하나 생각나는 게 닭장이다. 당시 대학교수 봉급이라는 게 한참 자라는 아이들을 둔 가장으로는 영 넉넉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부업으로 집에서 닭을 길렀던 것 같다. 연전 사택 주변에 레그혼(Leghorn) 100여마리를 키웠던 기억이 난다. 그러다 보니 집 주변이 닭 우는 소리로 꽤나 시끌벅적했을 것이다. 대학총장이 못마땅한 기색을 보였다지만, 교수들에게 충분한 대우를 해주지 못하는 상황이라 그저 눈감아준 듯하다. 나는 청소당번이었는데, 횃대 밑에 들어가 닭똥을 치워놓으면 그것을 받아 비료로 파는 사람이 가져가곤 했다.

양계장 청소당번

덕분에 노란 달걀 프라이가 떨어지지 않던 내 도시락은 친구들의 부러움을 샀다. 아버지도 이 부산물을 꽤 즐기셨던 것 같다. 주말이면 집이나 인근 산에서 친구분들과 막걸리 파티를 가지곤 했으니 말이다. 잔심부름을 맡았던 나는 아버지의 술안주로 닭이 빠지지 않았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분들이 나눈 고담준론(高談峻論)을 어린 내가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사람은 그릇이 커야 한다’는 등의 이야기는 지금도 또렷이 기억에 남아 있다.

이 무렵 아버지는 내 이름을, 당초 지으신 ‘건강할 건(健)’에서 ‘세울 건(建)’으로 바꾸셨다. ‘높이 세운다’는 이름만큼이나 내게 거신 아버지의 기대도 컸던 모양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게 이래라 저래라 강요하신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저 스스로 노력하도록 동기를 제공해주시고 다른 사람을 통해 간접적으로 칭찬해서 나를 북돋아주실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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