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9월호

한국적 여인상 연출했던 ‘문예영화의 大家’ 고은아

“화려했던 영화계, 그러나 나는 행복하지 못했다”

  • 글: 심영섭 영화평론가 chinablue9@hanmail.net

    입력2003-08-22 18: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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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적 여인상 연출했던 ‘문예영화의 大家’ 고은아
    2003년 7월 장맛비가 그치고 맑게 갠 어느 날, 서울극장 옆 한 카페에서 고은아씨를 인터뷰했다. 서울극장 사장인 그녀는 전성기 시절 ‘자애로운 어머니상은 연기라기보다 본성 같다’ ‘고 육영수 여사와 이미지가 비슷하다’는 평을 듣던 배우였다. 그녀를 인터뷰하면서 새삼 깨닫는다. 배우란, 늙어가는 배우란 일종의 걸어다니는 영화 박물관임을. 그녀는 항상 소복 차림에 나이보다 늙은 역할만 맡는 것이 싫어서 문희, 남정임 같은 비슷한 연배의 배우들을 부러워했노라고 고백한다.

    고은아씨는 웃으면서 말했다. “사람들이 저를 ‘바람날 것 같지 않은 여자’로 보는 모양이에요.” 바람날 것 같지 않은 여자.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그녀에 관한 인터뷰의 화두를 이것으로 삼기로 마음먹었다. 바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여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안’ 피우는 게 중요하다. 세상의 모든 ‘의지’는 곧 ‘금기’를 수반하게 마련이다. 결국 바람을 안 피운 것은 피운 것만큼이나 아슬아슬한 욕망의 빗장이기 때문이다.

    대중 역시 그녀의 몸과 마음에서 그러한 코드를 읽어냈으리라. 때론 시대의 희생양으로, 때론 끝까지 가정을 지키는 현모양처로, 때론 대찬 ‘쥐띠 부인’으로 동분서주했던 그녀지만, 대중이 가장 사랑하고 평론가들이 인정한 작품에서 그녀의 역할은 ‘과부’라는 공통점을 갖는다.

    욕망의 빗장을 질러놓은 그녀의 육체는 대중의 에로티시즘 판타지를 한 몸에 받으면서도 위험한 여인, 팜므 파탈의 기운이 없다. 남자 주인공들이 끊임없이 던지는 성적 일탈의 유혹을 물리치다가도, 결국에는 강제적이든 자신 안에 있던 욕망의 불씨 때문이든 몸을 허락하는 영화 속 그녀는, 그때부터 역전된 남녀관계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으려고 발버둥치곤 한다.

    그렇게 볼 때 스크린 속의 고은아는 안온한 판타지의 대상이었다. 이를 상징하듯 근대적 사회로 일탈을 시도한 영화 속 주인공들은 언제나 그 일탈을 끝까지 밀고 나가지 못한 채 전근대적 사회로 하염없이 돌아온다. 영화 ‘과부’에서 머슴을 따라 나서지 못하고 다시 사대문 안 깊숙이 봉건적 체제로 회귀하는 그녀를 떠올려보라. 먼 훗날 노인이 되어 우연히 어려서 떠나보낸 아들을 만나게 되었을 때, 열녀문 앞에 서서 떠나는 아들의 옷자락 먼지를 털어주는 주인공의 손은 하염없이 떨린다. 그것은 열녀문으로 상징되는 1960, 70년대의 모든 억압을 한 몸에 체화하는 깊은 묵념이자, 한숨을 삭히는 의식(儀式)이기도 했다.



    그러나 현실의 고은아가 꿈꾸었던 것은 ‘저 높은 곳을 향하여’에서 보여준 강단 있고 신심 깊은 여인이 아니었을까? 그녀 자신이 원했던 이미지는 찬송가가 울려 퍼지는 예배당에서 기도하는 손이었으나, 대중들이 원했던 것은 판소리를 배경음악으로 소복을 입고 나타난 목이 길고 우아한 ‘임자 없는 나룻배’였으리라. 이 불화하는 이미지 사이에서 그녀, 정숙하고 소박하게 아름다웠으며 동시에 유혹적이었고 단 한번의 성적 일탈로도 소유할 수 있을 것 같았던 여자, 고은아가 존재한다.

    고생스러웠던 영화 데뷔

    -‘신동아’로부터 인터뷰 요청을 받고 무슨 생각을 하셨어요.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었다면 고민이 많았을 텐데 지방에 다녀오는 바람에 그럴 시간이 없었어요. 안 그랬으면 인터뷰 약속을 잡아놓고 머리 속으로 마냥 걱정했을 텐데…. 연재 시리즈에 가장 먼저 나서는 게 좀 어색했어요. 중견 배우들을 생각해보면 제가 제일 밑이거든요. 가끔 ‘원로배우’라는 말을 들으면 화들짝 놀라곤 해요. (웃음)”

    -영상자료원에서 고은아씨가 출연한 영화를 찾아 봤습니다. 비디오로 출시된 작품은 전부 다시 봤는데, ‘며느리’는 출시되지 않았더군요.

    “영상자료원에 비디오 자료가 전부 있던가요? 그나마 참 다행이네요. ‘며느리’는 만든 영화사가 없어져버렸어요. 그래서 출시가 안 됐을 거예요. 제가 출연한 작품이라도 잘 모르는 경우도 있어요. 가끔 텔레비전을 보다가 케이블채널에서 옛날에 출연했던 작품을 방영 하면 깜짝깜짝 놀래요. 이상해요, 누가 볼까봐 겁도 나고.”

    -프로필을 보니 일찍 연기를 시작하셨더군요.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 어린 시절도 아니지만, 당시에는 꽤 이른 데뷔가 아니었나 싶어요. 홍익대 미대 공예과 재학중에 영화 조연출을 우연히 만나 데뷔한 것으로 돼 있는데요.

    “꼭 이른 데뷔였다고 말하기는 어렵죠. 저보다 더 어린 나이에 데뷔한 선배님들도 있었으니까요. 제가 1965년 1월 무렵에 첫 영화 촬영을 시작했는데, 그때 대학 1학년 겨울방학이었어요. 어느 조각가의 화실에 갔다가 친구들 크로키의 두상 모델을 한 적이 있었어요. 거기 계시던 조교수 한 분이 술좌석에서 영화 연출 관계자들에게 제 얘기를 했나 봐요. 그분들이 저 모르게 학교에 와서 살짝 보고 가셨다더군요.

    얼마 후 저희 집에 찾아오셔서 설득을 하시더라고요. ‘지금 찍으려고 하는 영화에 네가 딱 적격’이라면서. 그게 시작이에요. 데뷔작 ‘란의 비가’였죠. 사실 그 영화의 소재가 일본영화에서 따온 거라고 해요. 잘 모르긴 하지만 연출부는 그 일본 영화의 여주인공과 비슷한 이미지를 가진 사람을 찾아 헤맸던 것 같아요.”

    이 작품에서 고은아가 맡았던 역은 골육종에 걸려 시한부 인생을 사는 여자였다. 지금 보면 흔한 역할이지만 당시만 해도 독특한 설정이었다는 것이 그의 회고다. 어머니도 없는 홀아버지의 외딸, 그야말로 ‘청순가련’한 처지였던 셈이다. 얼굴 전체가 다 나오는 장면은 영화 서두와 회상 장면밖에 없고, 투병을 시작하면서 얼굴을 조금씩 가리다가 후반부에는 절반 이상을 가리고 연기해야 했다.

    -난생 처음 영화를 찍어보니 어떻던가요. 그 전에 연기 경력은 전혀 없었던 건가요.

    “제가 원래 집이 부산이거든요. 영화 촬영하는 걸 구경해본 적도 없었어요. 어릴 적 교회 다닐 때 무용극을 연습해서 군대 막사에 위문공연 다닌 게 전부였죠. 첫 촬영부터 육체적으로 상당히 힘들었어요. 일단 겨울 장면부터 찍어야 된다고 해서 초반부터 눈이 쌓인 설악산, 원통, 인제 같은 오지를 훑고 다니며 촬영했거든요. 지금처럼 도로가 좋은 것도 아니고, 밤새 벼랑길을 털털거리며 이동해야 했죠.

    회상 장면 중에 대관령에서 스키 타는 게 있었는데, 그때까지 한번도 스키를 타본 적이 없었어요. 그러니 조금 내려오다 보면 넘어지고, 그러면 다시 장비 들고 올라가서 또 내려오고, 그렇게 몇 번 하면 밤이 됐지요. 머리에는 맞지도 않는 가발을 썼지, 순진무구형이니까 옷은 꼭 치마를 입어야지…. 이건 춥다 못해 온몸이 막 얼더라고요. 그렇게 힘들게 촬영을 하다 보니 영화에 대한 동경이나 애정 같은 건 거의 없었어요. 오히려 ‘다시는 안 한다’는 생각을 많이 했죠.”

    잊을 수 없는 나소원 조감독

    -그런데도 계속 하셨잖습니까.

    “글쎄, 그 이유가 뭐였을까…. 그런 게 있었던 것 같아요. ‘란의 비가’를 찍은 극동영화사가 명동에 큰 광고판을 갖고 있었어요. 평소에 생각 없이 걷던 명동 거린데, 어느 날 보니까 제 얼굴 사진이 엄청나게 크게 붙어 있는 거예요. 촬영 없는 날 지나가며 흘끗 쳐다보면 사람들이 모여서 그 사진을 들여다보는데, 기분이 묘했어요. 극장 간판도 마찬가지였고요. ‘그만두겠다’는 생각과 ‘계속 하고 싶다’는 묘한 매력이 내 안에 공존했던 것 같아요.

    또 한 가지 중요한 이유는 제가 마음대로 그만둘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는 거죠. 영화사가 저에게 엄청나게 투자를 했거든요. 심지어는 제가 영화에 입고 등장하는 옷을 모두 다 유명 디자이너가 직접 일본에서 천을 끊어다가 따로 만들었을 정도였으니까요. 이후로 은퇴할 때까지 그런 대우를 받아본 기억이 없어요.

    영화사에서는 제가 미대생이라는 점을 홍보의 포인트로 삼았어요. 그때만 해도 대학생이 흔치 않던 시절이었고, 게다가 연극영화과 학생도 아니었으니 호기심의 대상이 됐던 거죠. 기자들과 인터뷰를 할 때도 항상 맨 얼굴이었어요. 1960년대 여배우들은 흔히 크고 시커먼 선글라스에 항상 흑백영화용 황토색 화장을 하고 다니는 게 보통이었는데, 저는 화장기 없는 얼굴이었으니 인터뷰 장소에 나가도 사람들이 못 알아볼 정도였어요.

    그러니 애초에 한 작품만 하기로 했지만 영화사 입장에서는 포기할 수 없었겠죠. 영화사에서 워낙 강하게 나오니까 집안에서도 더 이상 반대를 못하셨고, 저는 저대로 ‘보답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다음 작품을 하다 보니 또 다음 작품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져서 계속 영화를 하게 됐죠.”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성공적으로 영화인생을 시작한 고은아는 그 해 가을 영화 ‘갯마을’에 출연한다. 오영수의 동명 단편소설을 바탕으로 한 ‘갯마을’은 1965년 당시 문예영화의 가능성을 최초로 입증한 김수용 감독의 작품. ‘갯마을’은 고은아 개인에게도 의미가 큰 영화였다. ‘그저 얼굴 예쁜 청순형 대학생 배우’였던 그는 이 영화를 통해 한 사람의 배우로 확실히 자리매김하게 된다. 이 영화로 그는 부일영화상 신인상을 수상했다.

    한국적 여인상 연출했던 ‘문예영화의 大家’ 고은아

    고은아가 출연한 작품들. 1965년작 영화 ‘갯마을’, 77년작 ‘과부’의 포스터, 드라마 ‘꽃사슴’(왼쪽 위부터 시계방향·한국영상자료원 제공)

    “‘갯마을’을 찍을 때도 정신이 없었어요. 제작자 호연찬씨나 김수용 감독님이 얼마나 유명한 분들인지도 모르고 작품에 임했을 정도니까요. 오영수씨의 원작에 대해서도 전혀 무지했고요. 그 영화는 묘하게 에로틱한 부분이 있는 작품이었는데, 저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었죠. 첫 작품은 키스신도 없었으니까요. 그러니 이건 못하겠다고 말씀 드렸죠. 그랬더니 김감독님이 ‘당대 최고의 여배우들이 모두 이 역할을 탐내고 있다. 이건 너에게 행운’이라며 꾸중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재미있는 작업이었어요. 단역까지 모두 부산 지역에서 오래 활동해온 연극배우들이 맡았거든요. 황정순, 이민자씨 같은 쟁쟁한 배우들 속에 전 완전히 온실 속의 화초였죠. 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분은 당시 유일한 여자 조감독이었던 나소원씨예요. 저한테 밤마다 러브신을 가르쳐주셨으니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죠. ‘너는 왜 그렇게 눈을 반짝 뜨냐, 거슴츠레하게 감아라’ 그런 식이었어요.”

    -‘갯마을’은 매우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는데요, 남다른 느낌이 있지 않았을까 싶어요. 김수용 감독의 연출 스타일은 어땠습니까.

    “김감독님과는 이후에도 몇 작품을 같이했는데, 일단 배우를 편하게 해주세요. 일정한 틀을 요구하지 않으셨거든요. ‘갯마을’에서도 저의 본래 모습에서 세상물정 모르는 청상과부 이미지를 끌어내셨지, 저에게 뭘 요구하지는 않으셨어요. 또 생각해보면 그 역은 그렇게 만들어지지 않은 모습이 잘 어울리는 역이었어요. 같이 연기했던 연기파 선배들이 만들어놓은 공간 속에서 제가 그냥 업혀갈 수 있도록 그렇게 리드하셨어요.”

    아슬아슬함의 아찔함

    영화 ‘갯마을’은 미학적으로 완성도가 뛰어난 걸작이다. 정적인 영상의 아름다움과 탄탄한 서사구조가 뒷받침된 이 작품은 바다라는 배경이 인물 못지않게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는 영화다. 고은아 또한 배경이 된 마을과 자연 안에서 어우러진다. 롱쇼트, 롱테이크를 많이 사용해 배경과 배우가 하나가 되도록 하는 방식이었다. 이 작품에서 바다는 여인들의 삶이자 욕망이며, 주면서 동시에 빼앗는 존재였다. 김수용은 한 바닷가 갯마을과 거기 숨겨진 여성들의 욕망을 완성도 높게 표현해냄으로써, 과거로 회귀하던 문예영화와 당대의 관객들이 소통할 수 있는 전기를 마련했다. 이 작품 이후 김수용은 ‘문예영화의 대가’로 불리게 된다.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받은 영화가 ‘며느리’와 ‘과부’였는데, 모두 젊은 과부 역할이었죠. ‘소복이 잘 어울리는 배우’라고나 할까요.

    “그러게 말이에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그 시절 우리 영화의 한 흐름이 아니었나 싶어요. 당시에는 그런 영화를 ‘문예물’이라고 불렀거든요. 문학작품을 원작으로 한 작품이 상도 타기 쉬웠어요. 청춘물이나 액션물도 유행하던 시기지만, 상을 타는 것은 대개 그런 영화였어요. 그런데 한편으론 그런 문예물들이 상당히 관능적인 면이 있어요. 지금처럼 에로틱한 장면이 노골적으로 드러나기보다 살짝 감춰진 듯한 스타일이죠. 그게 더 강한 느낌으로 남지 않았을까 해요.

    ‘갯마을’과 ‘과부’, ‘며느리’의 주인공은 각기 나이도 열 살 이상 차이가 나거든요. 때문에 이후 작품은 저도 ‘갯마을’ 때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식으로 연기를 할 수는 없었죠. ‘과부’의 경우에는 혼자된 마님이 머슴과 정분이 나는 설정이었어요. 시대는 옛날이지만 상당히 파격적인 작품이었죠. 그래서 특히 관능적인 묘사가 많았고, 저도 그 부분을 어떻게든 소화해보려고 애를 썼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네요.”

    -제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그 아슬아슬함이 매력이지 않았나 싶어요. 과부라는 건 어떻게 보면 ‘무주공산’의 이미지잖아요. 그걸 고은아씨처럼 요염함과는 거리가 먼 이미지의 배우가 맡았을 때 관객들이 느끼는 심도가 달랐겠죠.

    “사람들이 저한테서 ‘바람날 것 같지 않은 여자’의 느낌을 받는 모양이에요. 모임에 나가 친구들과 얘기를 하고 있으면 남편들한테서 전화가 오잖아요. 그러면 친구들이 꼭 하고많은 사람 중에 ‘나 고은아랑 있는데’ 그래요. 그러면 남편들도 안심하고 별 말 없이 알았다며 끊는다는 거죠. 게다가 제가 결혼을 일찍 한 뒤에 영화를 했잖아요. 그래서 관객에게 더 ‘조신한 이미지’로 투영됐던 것 같아요.”

    -영화에서도 항상 결말에는 집으로 돌아오는 역이었죠. 채석장 같은 외부공간으로 뛰쳐나가 방황하다가도 마지막에는 꼭 집으로, 고향으로 돌아와 눈물을 흘리는 역할….

    “‘갯마을’의 경우도 그랬죠. 얼마 전 회고전에 가서 그 영화를 다시 볼 때 가장 부끄러웠던 부분이 바로 집으로 돌아오는 마지막 장면이었어요. 그건 산전수전을 다 겪은 인물만이 표현할 수 있는 부분인데 저는 전혀 그렇지 못했으니까요.”

    -아마도 고은아씨의 경우는 그 과부 이미지가 대중들의 판타지였던 것 같습니다. 본인에겐 그런 이미지나 영화작업이 어떤 의미가 있었나요.

    “솔직히 말하면 그다지 행복하지 못했어요. 영화판이라는 게 제가 자라온 환경과는 아주 달랐으니까요. 지금은 누구나 연예인이 되고 싶어하지만 그 때는 대중예술이라면 모두 한 자락 낮게 보던 시절이잖아요.

    제 위로 언니가 넷이고 밑으로 남동생이 하나예요. 한마디로 부족함 없는 중산층 가정에서 막내딸로 귀여움 받으며 자랐죠. 그 시절에 부모님이 저를 위해 피아노 선생님, 과외선생님을 집으로 부르고, 매년 어른들도 타기 힘든 비행기편으로 제주도에 놀러 다니도록 해주셨거든요. 특히 제 몸이 약한 편이어서 아버지가 보시기에는 더욱 안쓰러웠던 모양이에요.

    그러다 보니 제가 좀 고지식했어요.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하고, 쓴 물건은 반드시 제자리에 갖다 놓고, 일요일마다 꼭 교회 가야 되고. 그런데 이 동네(영화계)는 전혀 다른 거예요. 지켜지지 않는 약속이 부지기수고, 물건은 먼저 갖다 쓰는 사람이 임자고. 하다못해 인터뷰를 해도 제 본모습보다 훨씬 부풀리는 것이 생리잖아요. 거기서 갈등이 많았어요. 문화적인 차이가 크다 보니 영화를 하는 게 그다지 행복하지 않았어요. 해야 되기 때문에 하지만 솔직히 왜 하는지는 잘 모르는 상태였던 것 같아요. 요즘 젊은 친구들은 아마 그런 갈등이 없겠죠.”

    그러면서 그는 초년배우 시절의 에피소드 하나를 들려주었다. 인터뷰할 때 기자들이 던지는 질문 가운데 ‘이상적인 남성상이 뭐냐, 어떤 배우를 좋아하느냐’는 물음이 그렇게 곤혹스러울 수 없었다는 것이다. 데뷔하기 전까지 남자에 대해 생각해본 일도 별로 없고, 영화도 ‘아 김구’ ‘성웅 이순신’ 같은 작품을 단체관람한 기억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영화사 사람들에게 고민을 얘기하니까 회사에서는 ‘남자는 제임스 딘, 여자는 피어 안제리를 좋아한다고 하라’고 코치를 해주더란다. 그렇지만 정작 고은아 본인은 지금까지도 피어 안제리가 나오는 영화를 본 적이 없다고 한다. 인터뷰가 있을 때마다 혼자 그 이름들을 되뇌곤 했는데 그게 시험공부보다 더 어려웠다는 후일담이다.

    -고은아씨의 이미지 가운데 또 다른 주요 포인트가 ‘전근대적인 여성’이라는 건데요. 흥미로운 것은 이데올로기의 희생양이 되는 역할도 많았다는 거예요. ‘나도 인간이 되련다’라는 작품에서 동료 공산당원을 사랑했다가 결국은 미쳐버리는 ‘복희’ 역이 대표적이죠. ‘수선화’에서는 강제로 임신하고 나서는 고아들을 돌보는 역이었고요. 일련의 1960~70년대 반공영화에서 꼭 희생자의 이미지로 등장하거든요.

    “제게 ‘희생을 끌어안는 사람’의 이미지가 있는 것 같아요. 어려움이나 고통이 닥치면 그걸 튕겨내거나 부딪쳐 나가는 게 아니라 묵묵히 감수하고 받아들이는 ‘순종적인 여자’ 같다는 거죠. 그런 게 있는 건 분명한데, 부끄러운 얘기지만 그 시절만 해도 배우들이 그렇게 분석적으로 역할에 임하지는 못했어요. ‘이데올로기의 희생양’이라는 것도 지금 얘기를 듣고 보니 그랬구나 싶은 정도니까요.

    그때는 제작발표회는커녕 대본을 앞에 두고 감독과 배우가 미리 상의하는 일도 없던 시절이에요. 크랭크인 날짜가 잡히면 그날 비로소 출연배우와 스태프를 만나 그날 촬영할 장면이 뭔지 듣는 식이었죠. 조금이라도 시간이 나면 한숨 자기 바빴고요. 그러니 영화를 깊이 있게 뜯어볼 생각도 못했어요.”

    -아예 연습을 안 했다는 말인가요.

    “연습이고 리딩이고 없었어요. 심지어 대본도 외워가지 않았어요. 그때는 후시녹음이었으니까 프롬프터가 옆에서 대신 읽어주면 그대로 따라하면 됐거든요. ‘과부’는 제 목소리지만 ‘갯마을’은 성우가 더빙을 했어요. 대신 영화제에서 상을 타려면 ‘본인 목소리가 필름 한 롤 가량 들어가 있어야 한다’는 조항이 있었어요. 때문에 배우들이 대사 가운데 일부만을 직접 녹음하는 거예요. 그래서 중간에 목소리가 튀는 경우가 자주 있었죠. 그런 시절이었으니 작품 안에서 제 역할이 어떤 시대적 의미가 있는지, 어떤 역사적 맥락이 있는지 고민한다는 것은 거의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죠. 그때만 해도 영화계가 그랬어요.”

    “겉은 약해 보여도 속은 강해요”

    -초창기를 지나 현대물로 오면 또 다른 이미지를 갖게 되는데요. ‘쥐띠부인’ 같은 코미디영화에도 출연했죠.

    1970년대 코미디 영화들은 흔히 여주인공의 성격을 띠와 연관시켰다. 자기주장이 강한 여성들의 대찬 성격을 타고난 운명 탓으로 돌리는 일종의 ‘사주팔자 코미디’가 인기를 얻었다. 범띠 가시내, 말띠 여대생, 쥐띠 부인 등등. 그러나 영화에서 그녀들의 강인한 기질은 결국 걸맞은 짝을 만나 전통적인 가부장적 사회로 흡수된다. 그것은 1970년대 한국사회가 당시 불어닥친 ‘모던한 여성’의 기운을 받아들이는 하나의 방식이었다.

    “‘쥐띠 부인’은 원래 라디오 드라마로 인기를 얻은 작품이었죠. 참 재미있게 촬영했어요. 당시 영화사에서도 제가 그 역할을 맡는 것에 대해 반대가 많았어요. 라디오에서는 고은정씨가 그 역을 맡았는데, 상당히 자기주장이 강한 캐릭터였거든요. 제 이미지와는 많이 달랐죠.

    그런데 그때 저는 생각이 좀 달랐어요. 제 속에는 사람들이 보는 것보다 상당히 강한 면이 있어요. 겉으로는 연약해 보이지만 안에는 강한 성격이 들어있는 거죠. 특히 제가 침해받고 싶지 않은 부분을 치고 들어오면 속에서 불이 치밀어올라요. 그럴 때는 아주 모질어지죠. 반대로 한번 약속을 하면 기어가는 한이 있어도 반드시 지켜야 하는 성격이고요.

    ‘쥐띠 부인’을 크랭크인 하고 나서도 주변에서 ‘더 강한 배우를 써야 하는 것 아니냐’는 뒷말이 끊이지 않길래 제가 그렇게 얘기했어요. ‘왜 꼭 강해 보이는 사람만이 강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웃으면서 얘기하지만 그 말이 엄청나게 질길 수도 있다.’ 그렇게 가지 않으면 원래 이미지와 충돌할 것이 뻔했어요. 목소리나 체구도 전혀 걸맞지 않았으니까요.

    주인공 쥐띠 부인은 혼란에 빠진 집안을 완전히 다시 일으켜 세우는 인물이거든요. 새로 들어온 며느리의 카리스마가 가정의 질서를 만드는 셈인데 그저 소리나 크게 지른다고 될 일이 아니죠. 또 그게 본래 제 철학이기도 하고요. 저는 지금도 불같이 화내는 사람보다 웃는 낯으로 또박또박 따지고 드는 사람이 훨씬 더 무서워요.”

    카리스마 신성일, 신사 김진규

    -고은아씨가 활동한 때는 1960년대 후반 한국영화 전성기의 마지막 시절부터 1970년대 후반에 이르는 시긴데요, 충무로의 번영과 쇠락을 모두 지켜본 배우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공연한 배우들은 어떤 분들이 있었나요. 그 가운데 기억에 남는 배우가 있다면 누구를 꼽을 수 있을까요.

    “제가 실제로 영화에 출연한 것은 1977년, 78년까지였어요. 유신에 묶여 뒤늦게 개봉된 작품이 몇몇 있었죠. 남자배우로는 거의 신성일, 신영균, 김진규씨 세 분을 쳇바퀴 돌듯했어요. 묘하게도 최무룡씨와는 손에 꼽을 정도로 공연한 작품이 적었어요. 제가 데뷔하던 시기가 최무룡씨의 휴면기였거든요.

    우선 신성일씨는 굉장히 자부심이 강했어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당대의 스타였으니까요. 뭐랄까, 남자주인공을 맡은 배우는 촬영현장에서 어린 배우들이나 스태프들에게 따뜻하게 대해주는 게 일반적이었는데, 그에 비해 신성일씨는 카리스마를 갖고 대하는 식이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신성일씨가 다른 남자배우들보다 어린 편이어서 그랬지 않았나 싶어요.

    반면 신영균씨는 일단 참 푸근했어요. 저랑 ‘갯마을’에서 만난 이후로 영화는 영화대로, 또 같은 교회에 나가는 사람으로도 인연이 이어져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죠. 김진규씨는 이미지 그대로 신사세요, 남한테 싫은 소리도 잘 안 하는. 새카만 후배인 제가 어쩌다 약속시간에 늦어서 죄송하다고 말씀 드리면 연신 ‘괜찮아,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하며 언짢은 표정 한번 안 비쳤어요.”

    -동년배의 다른 여배우들에 대해 어떻게 느꼈는지도 궁금합니다. 문희 남정임 윤정희씨가 모던한 이미지, 개방적인 ‘자유연애’ 여성상이라면, 고은아씨는 그분들에게 남편을 뺏기는 ‘현모양처’를 많이 연기하셨는데요….

    “솔직히 다른 여배우들이 참 부러웠어요. 따지고 보면 제 이미지는 당시 제 나이와는 안 어울리는 거였으니까요. 그분들은 자기 연령에 맞는 분위기를 연출했던 거고요.

    지금은 여배우들이 코디네이터를 데리고 다니지만, 그 시절 여배우들은 충무로에 있던 ‘사다 미용실’에 아침마다 나와서 머리를 다듬었어요. 아침에 가보면 오늘 어떤 배우가 무슨 촬영을 하는지 다 알잖아요. 다른 여배우들은 한참 유행하는 옷에 최신 헤어스타일로 꾸미는데 저는 언제나 소복, 잘해봐야 한복 차림이었어요. 어린 마음에 당연히 그들이 부러웠죠.(웃음)”

    -고은아씨 본인은 대중이 사랑한 ‘과부’ 이미지가 흡족하지 않았던 거군요. 서로 다른 이미지를 갖고 있는 배우 사이에 경쟁심도 있었을 것 같은데요.

    “재미있는 얘기가 많아요. 지금은 영화 포스터들이 한 곳에 붙어 있지만 예전에는 아무데나 붙이면 그만이었잖아요. 지금은 세상을 떠난 남정임씨가 예전에 저한테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어요. ‘나 예전에 고은아씨 영화 포스터가 길가에 붙어 있으면 일부러 시선도 안 주고 앞만 보고 걸었다.’ 생각해보면 나도 그랬어요. 지금은 젊은 여배우들끼리 모여서 놀기도 하는 모양인데 우리 때는 그런 게 전혀 없었어요. 그러니 함께 영화에 출연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경우도 있었죠.

    문희씨는 저보다 한 살 아래고, 남정임씨는 한 살 위인데 영화 데뷔는 같은 해에 했어요. 개봉날짜로만 따지면 제가 제일 먼저고 다음이 문희씨, 남정임씨 순서죠. 나이도 데뷔시기도 비슷하니 경쟁심이 없을 수 없었죠. 지금 생각하면 왜 진작 친해지지 못했나 하는 아쉬움이 커요.”

    한국적 여인상 연출했던 ‘문예영화의 大家’ 고은아

    고은아씨는 현역에서 은퇴한 이후에도 극장 사장으로 영화와의 인연을 계속하고 있다.

    인기가도를 달리던 고은아는 데뷔 한지 불과 삼 년 후, 20대 초반의 어린 나이에 여배우로서는 치명적일 수도 있는 결혼 소식을 발표해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상대는 젊은 영화제작자로 주가를 올리고 있던 합동영화사의 곽정환 사장. 당시 ‘37세 노총각인 영화제작자 곽정환군과 방년 22세의 여배우 고은아양의 결혼’은 상당한 화제와 함께 호사가들의 무수한 추측을 불러일으킨 대단한 이슈였다.

    -데뷔도 일찍 했지만 결혼도 상당히 빨랐습니다. 열다섯 살이나 되는 나이차도 그랬고, 밖으로 드러나는 두 이미지도 상당히 달라서 더욱 의외였던 것 같습니다. 곽정환 사장이 전략가 스타일이라면 고은아씨는 자선가, 자애로운 어머니 스타일이잖아요.

    “밖에서 보기에는 그런 모양인데, 의외로 반대의 측면이 있어요. 남편은 강성으로 보이지만 뜻밖에 아주 약한 부분이 있고, 또 저는 약해 보이지만 고집이 아주 세거든요. 그래서 남편이 가끔 주변 사람들에게 ‘내 아내가 겉으로는 천사 같지만 실제로는 굉장히 독한 여자’라는 얘기를 하곤 해요. 자기는 굉장히 나쁜 놈 같지만 사실은 착한 사람이라고도 하고요. 농담으로 한 얘기지만 어느 정도 맞는 부분이 있어요.

    결혼 무렵을 생각해보면, 영화판에 들어와서 제가 어리둥절하고 적응하는 데 힘들었던 시기였어요. 일을 즐기고 인기가 주는 쾌감에 매료돼 있었다면 그렇게 빨리 결혼할 리 없잖아요. 오히려 그 상황을 즐기고 이용하려 했겠죠. 그런데 저는 그렇게 느긋한 상황이 아니었어요.

    그때 제가 특히 합동영화사 작품을 많이 했어요. 합동영화사 작품리스트 초반에는 김지미씨가 많이 출연했고, 그 다음에는 엄앵란씨가 나오다가 저한테로 옮겨왔거든요. 합동영화사 작품을 한꺼번에 세 편이나 진행했던 적도 있어요. 당시 남편은 제작자, 제작부장, 진행, 심지어 소품담당까지 혼자 다 하다시피 했죠. 그러니 저는 매일 눈뜨면 마주치는 사람이 신성일씨하고 이 사람(남편 곽정환)이었던 거에요.”

    -두 분이 언제 처음 만났나요?

    “합동영화사에서 섭외가 들어왔어요. 찾아갔더니 어떤 분이 저를 앉혀놓고 출연료 문제를 이야기하더라고요. 제가 먼저 주변에서 권하는 액수를 이야기했더니 이 분이 한 시간 넘게 설교를 하는 거예요. 신인 여배우 주제에 그렇게 돈을 밝히면 못 쓴다는 거죠. 저는 그걸 고스란히 들으면서 ‘내가 무척 잘못했나 보다. 이 영화는 하기 어렵겠다’ 그러고 있었어요. 영락없이 그분이 사장인 줄 알았죠.

    그런데 갑자기 사무실에 웬 젊은 남자가 들어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앞에 앉아 있던 남자가 벌떡 일어나서 저를 소개하더군요. 알고 보니 그 사람이 사장이었고 앉아 있던 사람은 부사장이었어요. 자초지종을 듣더니 ‘그 정도 출연료 주면 되지 뭘 그러느냐’고 한 마디로 끝내버리는 거예요. 긴 시간 혼이 난 터라 의기소침해 있는데 젊은 사장이 터프하게 단칼에 해결하니 인상이 오래 남을 수밖에 없잖아요. 단번에 좋은 사람으로 각인이 된 거죠.

    촬영에 들어간 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어요. 언젠가 한번은 낮에는 다른 영화사 작품을 찍고 밤에는 합동영화사 작품을 촬영하기로 한 날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제가 갑자기 위경련이 일어났어요. 추운 겨울날 며칠간 잠을 못 잤더니 탈이 난 거죠. 병원에 가서 누워 있는데 제작부 사람이 저를 끌고 가려고 쫓아왔어요. 도저히 미룰 수 있는 촬영이 아니었어요. 하필이면 대선배들과 함께하는 장면이었으니까요. 질책하는 선배들의 눈초리를 맞으며 겨우겨우 낮 촬영을 끝냈죠.

    그러고선 합동영화사 밤 촬영을 준비하느라 미장원에서 머리를 하면서 간호사를 불러 링거를 맞고 있는데, 그 젊은 사장이 저를 본 거예요. 일단 얼굴이 엉망이니까 ‘왜 사람 꼴이 이러냐’고 물었죠. 자초지종을 듣더니 ‘그럼 촬영 취소해’라는 한마디 말로 현장에 있는 사람들을 철수시켰어요. 사람이 제일 중요하다는 거죠.

    하루 동안 두 영화사에서 전혀 다른 대우를 받았으니 제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수가 없죠. 영화계에서 그런 따뜻한 기억이 흔치 않았거든요. 그 와중에 결혼얘기가 나온 거예요. 결혼이 어려운 상황을 확 바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것 같았어요. 게다가 저희 어머니한테 찾아와 청혼한 사람은 많았다지만 저한테 직접 청혼한 사람은 이 사람이 유일했거든요. 지금 생각하면 제 성격이 참 단순했어요.”

    -의외네요. 당시에는 ‘영화사 사장이 젊은 여배우를 많이 쫓아다녀서 결혼한 것 아니냐’는 추측도 많았는데요.

    “그런 건 아니에요. 우선 남편도 저를 처음 만났을 때는 결혼상대자라는 생각이 전혀 없었던 것 같고, 저도 남편에 대해 ‘사장님’이라는 생각을 거의 안 했어요. 직함은 사장이지만 늘 촬영현장에 있었거든요. 결혼하고 아이 낳고 아이들이 한참 자랄 때까지도 그랬어요.

    비오는 장면 찍느라 살수차를 부르면 꼭 자신이 직접 호스를 잡고 물을 뿌리는 식이었으니까요. 모든 스태프 중에 비를 제일 잘 뿌리는 사람이었어요. 섬에 촬영을 갈 때는 배도 자기가 직접 몰아요. 사장이라는 느낌보다는 스태프의 한 사람, 늘 보는 사람이라는 느낌이 더 컸어요.

    당시에는 그런 제작자가 흔치 않았어요. 어쩌다 촬영중에 갑자기 검은 중형차가 들어오면 ‘사장님 오십니다’ 그러고는 쭉 서서 인사하고, 사장은 둘러보고 격려 한마디 하고 떠나고, 그게 일반적이었거든요.”

    -묘한 것이 문희씨 경우는 굉장히 활동적인 이미지였는데 지금은 대외활동이 별로 없고, 반면에 고은아씨는 현모양처 스타일이었지만 현재 사업 등 많은 활동을 하고 있다는 거죠.

    “인생이라는 큰 틀을 놓고 보면 제가 방향타를 잡은 게 아닌 것 같아요. 아무리 제 의지대로 가려고 해도 뜻대로 안된 일이 많았거든요. 그렇게 보면 절대자가 삶의 구도를 만들어놓은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어요. 기독교적인 중산층 가정에서 나고 자라서, 전혀 다른 문화를 가진 영화계에 들어와서도 큰 실수 없이 지내다가, 또다시 그 경험을 바탕으로 기독교방송에 가서 오랜 기간 일한 것, 그 모든 과정을 돌아보면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미리 마련된 계획이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을 받아요.

    기독교방송 일을 그만두고 회사로 온 것도 저랑은 참 안 맞는 옷이거든요. 내일 또 어떤 다른 역할이 제게 주어질지도 모르는 일이고요. 그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열심히 해야 다음의 역할도 주어지겠구나, 그런 생각을 하죠. 제 인생이 항상 그런 식이었어요.”

    자신의 고은아, 대중의 고은아

    기독교적 세계관은 고은아를 설명할 때 빼놓을 수 없는 키워드다. 고은아의 후기작품, 특히 그가 직접 제작한 영화를 살펴보면 기독교적 세계관이 바탕이 되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후기에 이르러 자신의 뜻대로 영화를 선택하고 만들 수 있게 되면서, 영화 속 그녀의 이미지는 초기와 사뭇 달라진다. 1977년 제작된 영화 ‘저 높은 곳을 향하여’가 대표적인 경우다.

    눈여겨볼 것은 그녀가 자신의 신념과 가치관을 투영한 작품은 대중적으로 큰 반향을 얻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자연인’ 고은아는 ‘강단 있고 신심 깊은 여인의 이미지’를 원했지만, 대중이 원했던 것은 ‘소복 입은 과부’였던 까닭일 것이다.

    -후기에는 기독교를 소재로 한 작품에 많이 출연했고, 또 직접 제작하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전기작에 비해 대중적인 성공을 거두지 못했는데요.

    “우선 말해둘 것이 ‘저 높은 곳을 향하여’는 좀 예외적인 경우였다는 거예요. 제작된 후의 평가도 달랐지만 만들어진 경위도 달랐거든요. 당시에 아는 연예인들이 모여 세운 교회가 있었는데 예배당이 따로 없어 설움을 많이 당했어요. 그래서 그 건축기금을 마련하려고 남편이 자원해서 제작한 영화가 ‘저 높은 곳을 향하여’였죠.

    일제시대 때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투옥되어 지독한 고문을 당하는 주기철 목사님 일대기였어요. 그런데 당시가 긴급조치 시대였잖아요. 저항, 고문, 투옥 이런 주제가 당국의 검열에 걸려 상영허가가 안 났죠. 그게 온 교계에 은밀하게 소문이 난 거예요. 무려 4년 동안이나 쉬쉬하면서 입에서 입으로 홍보가 된 거죠. 결국 박대통령이 죽은 뒤에야 상영허가가 났어요. 사람들이 소문으로만 들었던 영화가 궁금해서 엄청나게 몰려들었어요. 명보극장 유리창이 깨질 정도였다니까요. 덕분에 교회도 잘 지었죠.

    이후에 너도나도 순교자나 목사를 소재로 한 기독교 영화들을 제작했지만 거의 성과가 없었어요. 저도 또 다른 기독교 영화 ‘무거운 새’를 직접 제작했는데, 큰 수업료를 치른 셈이 됐죠.”

    -이제까지 출연한 많은 영화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무엇인가요. 혹은 배우로서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우선 가장 큰 영향을 남긴 영화는 ‘갯마을’일 텐데요, 아무리 그래도 기억에 남는 것은 역시 데뷔작이죠. 제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놓은 영화니까요. ‘갯마을’은 제 이미지를 만든 영화죠. 그 영화가 없었다면 ‘과부’나 ‘며느리’도 없었을 거예요.”

    그러면서 그녀는 “배우로서만 따지자면 그렇게 훌륭한 연기자는 아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자기 안의 끼를 마음껏 발산하거나 폭발적인 에너지가 넘치는 그런 배우는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열 개를 느끼면 두 개 남짓 표현하는 수준, 때로는 그것도 부담스러웠다는 고백이었다. “늘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에 시달렸기 때문에 영화에 온 정열을 쏟을 수도 없었다”는 회고는 한편으론 뜻밖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수긍이 가기도 했다.

    그러면서 그녀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지금까지 자신이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를 요약하는 한마디였다. 스크린 밖의 그녀, 고은아는 그런 사람이었다.



    “단지 이것 한 가지는 있어요. 영화인들에게 부끄러운 동료는 아니었다는 거예요. 그게 제 원칙이거든요. 그 사람은 나와 참 절친한 사이라고 이야기하고 다닌다는데 그 얘기를 전해들은 나는 기분이 나빠지는 사람, 그 사람과 친하다는 소문이 나면 왠지 나도 같이 취급당할 것 같아 싫은 사람은 되지 말자는 거죠.

    제가 이제 영화에 출연하지는 않지만 여전히 영화로 밥을 먹고 살잖아요. 다른 영화인들이 저에게 동료의식을 느낄 수 있는 그런 사람으로 남고 싶은 게 제 욕심인데, 지금까지는 크게 벗어나지 않은 것 같다는 느낌이 참 다행스러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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