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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奇人·名人 ④

춤꾼 운심|“천하 名妓가 천하 명승지에서 죽는다면 그 또한 만족이니”

  • 글: 안대회 영남대 교수·한문교육 ahnhoi@yumail.ac.kr

춤꾼 운심|“천하 名妓가 천하 명승지에서 죽는다면 그 또한 만족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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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인이 음주가무를 즐긴다지만 이름난 무용가에 관한 기록은 남은 게 거의 없다. 영남기생 운심(雲心)에 관한 이야기가 강렬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래서일까. 흐드러진 검무로 일세를 휘어잡은 춤꾼.
  • 당대의 서예가와 사랑을 나누며 예술적 정서를 교류했다는 기개와 천재성. 사대부의 글에서 한낱 기생의 기록을 찾기란 쉬울 리 없건만, 운심의 독특한 풍모와 특별한 인생은 조선 중기 지식인들의 글 곳곳에 그 흔적을 남겼다.
춤꾼 운심|“천하 名妓가 천하 명승지에서 죽는다면 그 또한 만족이니”
운 심이라는 춤꾼의 이름을 처음 본 것은 박제가(朴齊家)가 묘향산을 여행하고 나서 쓴 절묘한 여행기 ‘묘향산소기’에서다. 박제가는 스무 살 때인 1769년 장인 이관상(李觀祥)이 영변도호부사로 부임하자 함께 영변에 가서 머물렀는데, 그해 가을에 관서 제일의 명산이라는 묘향산을 열흘 동안 유람했다. 장인이 도호부사인지라 동행인이 꽤 많았는데 그 가운데에는 기생과 악공(樂工)도 포함되어 있었다.

여행이 끝나갈 무렵 일행은 관서에서 절방이 가장 넓다는 용문사에서 검무를 구경하게 되었다. 박제가는 검무 공연이 인상 깊었던지 ‘검무기(劍舞記)’를 써서 여행기에 부록처럼 실었다. 이 ‘검무기’는 여행기와는 별개로 나중에 그의 문집에도 실렸다.

‘검무기’의 끝에는 용문사에서 벌어진 검무를 총평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그는 여기서 “이번에 내가 본 것은 검무의 극치는 아니다. 그러므로 검무의 기이한 변화를 자세하게 얻어 보지는 못했다”고 하여 이미 검무의 극치를 이룬 무용을 본 것처럼 말했다. 그가 운심을 언급한 것은 바로 이 대목에서다. ‘검무기’의 마지막에 추가로 “근세의 검무를 추는 기생으로 밀양(密陽)의 운심(雲心)을 일컬으니 내가 본 기생은 그의 제자이다”라는 주석을 덧붙인 것이다.

박제가는 다른 장소도 아닌 묘향산 절방에서 검무를 구경하는 흔치 않은 체험을 했다. 그런데 절방에서 검무를 춘 기생이 바로 밀양 출신 기생 운심의 제자이며, 그 운심이 근세에 가장 유명한 검무 무용가라고 밝힌 것이다. 그의 이 추록(追錄)을 볼 때, 운심은 당시 일반에 널리 알려져 있던 인물임을 쉽게 알 수 있다.

‘마음 심’자에 담긴 의미

한번 운심에 주목하게 되자, 그에 관한 또 다른 기록은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었다. 정조 연간의 저명한 문인이요 학자인 성대중(成大中)은 ‘청성잡기(靑城雜記)’란 필기(筆記)를 저작했는데 그 가운데 운심에 얽힌 에피소드를 소개하며 다음과 같이 밝힌다.

“운심은 (경상도) 밀양 기생이다. 서울로 뽑혀 왔는데 검무가 온 세상에 이름이 있었다.” 두말할 나위 없이 박제가가 언급한 운심과 동일인이다.

조선시대에는 전국 각지에서 가무와 온갖 잡희(雜戱)에 재능을 보유한 기생을 뽑아 서울로 올려보내는 제도가 있었다. 여기에 뽑힌 기생을 선상기(選上妓)라 불렀는데 그들을 서울로 불러들이는 것은 각종 공연에 충당할 예능인을 충당하기 위해서였다. 공연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중국에서 온 사신을 위문하기 위한 공연을 꼽을 수 있다. 전국 각지에는 그 지역 특유의 전통 기예가 있었다. 거기에서 배출된 기능인은 그 실력을 인정받으면 서울로 진출하는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밀양의 기생 운심도 검무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기에 불려왔을 것이다.

그런데 이들 선상기 가운데는 한번 서울에 올라온 다음 지방으로 돌아가지 않고 한양에 그대로 정착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한양은 그때도 지금처럼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운심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한양에 머무르게 되는데, 보통 기생과는 달리 장안에 이름이 자자한 기생이 되었다.

그녀에 대해 기록해놓은 단편적인 자료를 살펴보면, 운심은 한창때 장안에서 이름난 기생으로 활약하면서 후배를 여럿 키웠고 또 명사의 소실(小室) 자리에 있다가 만년에는 전국을 여행하면서 삶을 마쳤다. 서울에서 잘나가는 기생이었지만 출신지가 꼬리표처럼 따라다녀 사람들은 그녀를 밀양 기생이라 불렀다.

운심이 경상도 출신 기생임은 그 이름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당시 경상도에서는 여자 이름에 ‘마음 심(心)’자를 흔히 사용했던 까닭이다. 서울 사람들에게 매우 이상하게 보였을 법한 이 현상에 대해 정조 때의 소품가(小品家) 이옥(李鈺)이 기록을 남기고 있다.

이옥은 1799년 경상도 김해 지역을 찾아가는 길에 성주와 김해 등지에서 특이한 현상을 경험한다. 여자 이름 끝에 모두 ‘마음 심’자를 쓴다는 공통점을 발견한 것이다. 성주(星州)의 한 주막에서 만난 여자의 이름이 대심(大心)이어서 이상하게 여겼던 그는, 김해에 도착한 뒤에도 길거리에서 여자한테 계심(桂心), 화심(花心), 녹심(綠心), 채심(彩心), 분심(粉心), 금심(琴心), 옥심(玉心), 향심(香心), 이심(二心), 고읍심(古邑心)이라고 부르는 소리를 여러 차례 들었다. 고을 여자들의 이름이 상당수가 ‘심’자로 끝나 영남의 여자들은 모두 ‘심’으로 이름을 짓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설명이다.

이옥이 말한 현상이 당시 경상도 전역에 널리 퍼져 있었던 것이라고 확대해석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우연하게도 밀양 출신의 기생 운심의 이름도 이옥이 포착한 현상에 정확하게 맞아떨어진다. 그러니 운심이라는 이름에서 기생의 느낌과 함께 경상도 여성이라는 추측을 끌어내는 것은 그리 큰 무리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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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안대회 영남대 교수·한문교육 ahnhoi@yumail.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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